지긋지긋한 정리해고
남편이 나에게 캐나다로 가자고 했을 때, 과연 우리가 갈 수 있을까 싶었다. 그곳에 가서 살아남기엔 너무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시간이 되면 자포자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돈 문제만은 아니었다. 영어 한 마디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이나 친구도 없고, 짧은 시간 안에 취업을 할만한 실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상황은 점점 갈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내 일을 좋아하고 열정도 있었지만 늘 불안에 시달렸다. 회사는 자주 프로젝트가 엎어져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게임 일을 하는 동료들은 늘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일이 끝나고 나면 집에 가서 취미 같은 건 꿈도 꿀 여유가 없었다. 지금 있는 회사에서 나오게 된다면 다음 직장을 위해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나서 저녁엔 자기 직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대부분 피곤해서 개인 작업을 하기보다는 집중을 하지 못하고 인터넷을 보며 시간을 때우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불안감은 해소가 되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 여느 때처럼 다니고 있던 회사가 경제적인 이유로 문을 닫고 월급도 다 정산받지 못한 채로 회사를 나왔다. 이런 상황이 또 일어나다니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 실업 급여를 신청하러 간 곳에서 처음 공황발작이 왔다. 책상에 앉아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데 갑자기 글씨가 읽히지 않았다. 숨 쉬기가 힘들어서 곧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류에 있던 질문에 대답을 체크하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몇 번을 다시 읽어야 했다. 온 힘을 다해 그 시간을 버텼다. 끝나기가 무섭게 밖으로 빠져나와 찬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걸었다. 잠시 후에 발작은 잦아들었지만 난생처음 경험하는 현상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땐 그게 공황발작이었는지도 몰랐다.
일을 계속 쉴만한 상황도 아니어서 다음 직장을 알아보던 중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1개월 동안 프리랜서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개월이지만 일하다 보면 연장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어쩌면 이 곳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렇게 그동안의 불운을 전부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출근 후 회사에서 모든 일이 너무나도 잘 풀려나갔다. 좋은 팀원들을 만나 즐겁게 일했고, 다닐수록 더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바람 때문이었을까 1개월을 계약하고 들어갔지만 다음 달도 그다음 달도 총 3개월을 일 하게 되었다. 연장되었던 계약이 끝날 때쯤 나는 그 회사에 있던 다른 팀에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렇게 연봉 협상 직전까지 모든 일들이 아름다우리 만치 술술 풀려나갔다. 게임 업계에서 일을 하면서 이렇게 모든 일이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어지러울 정도였다. 어느 것 하나 걸리는 일 없이 너무 잘 풀렸던 탓 일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있던 팀을 비롯해 여러 팀이 급하게 접혀 버렸다. 회사의 경영권 일부를 다른 회사에게 넘기게 되면서 정리해고가 기습적으로 진행되었다. 회사는 신규 프로젝트와 일부 개발 중인 프로젝트 그리고 신규채용 모두를 예외 없이 중단시켰다. 바로 그 전날 나는 새로운 팀으로 가기 위해 인터뷰를 마치고 연봉 협상만을 남겨 둔 상태였다.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이 가까이 다가온 기회가 눈 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상황이 정신없이 진행되어 직원들도 갈팡질팡 하며 회사의 결정이 잘못 전달된 정보이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비정한 회사는 기습 발표를 끝으로 그날 오후 5시가 되자마자 전 사무실의 불을 강제로 소등했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망연자실한 직원들이 까맣게 타버린 시체처럼 미동도 않고 앉아있었다.
나야 고작 3개월이 다 였지만 그 들 중 대부분은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밤낮으로 달려왔던 사람들이었다. 얼굴을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허망한 한 숨 들이 새어 나와 사무실 안을 방황했다. 죄지은 사람처럼 나는 조용히 불 꺼진 사무실을 뒤로 한채 짐들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회사 밖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그래도 3개월이나 다녔는데 회사 건물이 낯설게 느껴졌다. 엄청 좋아했었는데……… 바람에 나의 긴 머리카락이 청승맞게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저어내는데 팀장님께 전화가 왔다.
[일이 이렇게 돼서 안타깝네요. 최대한 다른 회사라도 알아 봐 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감사하지만 그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같이 일 할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지하철 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건가. 정말 이렇게 끝이라고? 더 이상 알아볼 회사도 없을 것 같은데….. 애써 들어가면 뭐하나 또 정리 해고될 텐데…….
그때 나는 모든 마음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니 결심이 되었다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