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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Oct 28. 2020

엄마는 나를 배신자라고 했다.

내가??


직장까지 정리되었겠다 이렇게 된 거 이제 정말 떠나는 준비를 하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2년 동안 살면서 마련했던 신혼살림은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막상 정리를 하려고 하니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옷은 쓸만한 것들을 모아 재활용하려고 담는 과정에서 옷 가지에 쓸려 손등이 다 터서 갈라질 정도로 많았다. 팔 만한 것들은 모두 팔았다. 가구와 전자제품이 하나씩 팔려 나갈 때마다 그걸 사려고 심사숙고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아쉬웠다. 손 때 묻은 자잘한 살림살이 들을 깨끗이 씻어 쓸만한 녀석들은 친구들에게 주었다. 고작 물건 일 뿐인데 사라지고 나니 빈 공간이 더 크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세간살이들을 정리하는 고된 일도 ,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한 것도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로 엄마를 설득시키는 일이었다. 처음 캐나다로 떠난다고 선포를 했을 땐 나도 확신 하진 않았지만 엄마는 더욱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미안한 마음에 매일 전화도 드리고 문자도 드리고 긴 메일도 적어 보내며 서운함을 덜어 드릴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저녁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내가 택 도 없이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 네가 정말 가족, 나라 다 버리고 가 버릴 생각인 거야? 너는 배신자야!  엄마가 느끼기에 너는 배신자라고, 너도 싫고 사위도 싫어! ]

흐느끼는 엄마의 목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듣고 있는데 힘이 쭉 빠졌다. 지금껏 내가 했던 말들과 글들이 다 쓸모없는 헛소리였던 걸까? 나는 정말 배신자인 걸까? 내가 정말 잘 못 한 걸까? 누가 가라고 떠밀지 않았잖아? 남들은 한국에서 잘 만 사는데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는 걸까? 밤 새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죄책감에 가슴이 무거웠다.

엄마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이혼을 하셨다. 나는 아빠가 짐을 챙겨서 나가던 그날 밤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가슴 한 복판의 그 통증도 기억한다. 엄마는 늘 자기가 남편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탄을 하셨다. 나와 동생은 남편 복 없는 엄마가 가진 유일한 자산이었다. 엄마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남편은 아니더라도 자식들은 자기 곁에 있을 거라고 종교처럼 믿는 분이셨다. 그런 내가 직장 때문에 서울로 가고 그것도 모자라 지구 정 반대편에 이름도 생소한 도시로 떠난다고 하니 그 상실감과 분노를 어떻게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캐나다에 와서 8년 가까이 지났지만 엄마에게 나는 아직도 배신자다. 자주 화상통화를 하는데 엄마는 우리가 어서 빨리 한국으로 왔으면 하는 속내를 종종 비치신다.  최대한 내색을 안 하시고 씩씩한 척하시지만,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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