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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Jul 23. 2020

캐나다에서 재택근무 5개월째

서울에서 첫 직장을 잡고 일하고 싶었다.

코로나로 시작된 재택근무가 근 5개월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부랴부랴 3월 중순에 회사에 있는 짐을 싸서 집으로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재택근무가 길어질지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엔 답답해서 할 짓이 아니다 싶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 제법 집에서 일하는 게 익숙해졌다. 적어도 이런 난리 통속에 직장을 잃지 않고 일할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건 갚아야 할 모기지, 숨만 쉬어도 나가는 각종 공과금 , 돈이었다. 회사는 8월 말까지는 문을 열지 않을 것이며 추후 상황을 봐서 다시 결정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캐나다 퀘벡 정부는 7월 중순 현재, 사업체 근로자들의 출근을 허락하였지만 건물 면적의 25%만 사용할 것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간에서는 반드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마스크 의무화도 불과 며칠 전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게임 그래픽 디자이너로 게임 개발을 하다 30대 나이에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줄 곧 같은 일을 18년째 이어가고 있다.  길다면 길수 있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18년 나의 커리어의 시작은 지방의 작은 사립대를 졸업하고 서울로 취직해 상경한 내 친구에 대한 부러움으로 시작되었다. 앞서 말했듯 지방에서 사립대학을 그것도 순수미술을 전공한 내가 취직을 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 흔한 공인된 영어점수 하나 없고 뭐하나 기술을 배우기를 했나 막상 졸업을 하니 막막했다. 세상 철없이 그저 졸업식날 학사모 쓰고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취업난은 나와는 먼 세상 일이며 사실 그게 뭔 지조차 몰랐을 정도로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또 생각 없이 지방의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다. 만화가 하고 싶었다는 게 이유였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들어가 보니 대학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 과는 많이 달랐다. 학부생들의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어 자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내 뒤에서 학부생 2명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대학원생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대학원 가면 뭘 하지? 솔직히 학부 졸업하고 할 거 없어서 온 거잖아.”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구구절절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어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후로 학부 수업에 들어가는 건 그만두었다. 그 무렵 같은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 한 친구는 서울의 한 회사에 취업에 성공해 한껏 들떠있었다.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저녁에 친구에게 전화해 서울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나도 서울로 올라가서 멋진 커리어 우먼처럼 일을 시작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를 누가 가져다 쓰겠는가. 마냥 위축된 채로 꾸역꾸역 대학원 한 학기 수업을 마쳤다.  여름 방학 동안 나는 집에 틀어박혀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남동생이 좋아하는 게임 잡지를 살펴보던 중 나 같은 미술 전공자들이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직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취직을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배워서 서울로 가고 싶었다.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에 익숙해지기 위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내가 이렇게 참을성이 없는 인간이었는지 자아 성찰을 제대로 하게 되는 계기가 될 정도로 처음엔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래도 계속했다.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아는 학교 선배를 들들 볶아 모르는 것을 하나하나 익혀갔다. 학원을 다닐 수도 있었지만 없는 집안 형편에 학원비까지 대 달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방학 내내 땀을 흘리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나는 대학원을 자퇴했다.
예상 가능하듯 내 작업물은 그다지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력서를 냈다 아주 열심히. 그렇게 몇몇 작은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면접을 위해 서울행 버스를 탔다.서울에 가서 내가 길을 잃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엄마와 함께.

면접 때마다 서울을 올라가기도 여의치 않고 경비도 문제라서 면접 날짜를 조정해 하루에 2~3 차례 버스를 타고 움직이며 일정을 소화했다. 지리도 익숙하지 않고 태어나 처음으로 큰 대도시에서 움직이려니 넉넉히 시간을 잡고 출발한다고 했지만 면접장소에 늘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혹여라도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점수가 깎일까 싶어 조급함에 혼자 바쁘게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엄마가 자꾸 뒤처지기 시작했다. 저만큼 떨어져서 느릿느릿 오고 있는 엄마를 챙길 시간이 없어 빨리오라고 재촉을 하고 나는 또 저만큼 앞서 나갔다. 무더운 한여름 온몸은 땀에 젖었고 결국 엄마는 나를 따라오기를 포기하고 길 가 조경용 바위에 앉아 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일부러 나를 따라잡지 않았다고 하셨다.  여름내 집안에서 잠도 줄여가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낑낑대는 모습부터 가족들 없는 서울로 가서 일을 하겠다고 버둥거리는 모습이 없는 집에 태어나 치러야 할  죗 값인 듯 , 그것이 마치 엄마의 잘못인 듯 느껴져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하셨다. 그렇게 정신없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쯤 나는 한 작은 게임회사에 합격했고 서울 살이를 위한 집을 알아보기 위해 다시 한번 서울행 버스에 엄마와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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