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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Jul 24. 2020

작고 비좁은 나의 첫 집

캐나다에서의 첫 집, 서울에서의 첫 집


나와 남편은 캐나다에 와서 조그만 방 한 칸을 얻어 캐나다 생활을 시작했다.

큰길을 끼고 있는 집이라 창문을 열어 두기 힘들 만큼 자동차 소음이 심했다. 여름엔 특히 끔찍이 더웠고 화장실과 샤워실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 불편한 곳이었다. 언제 다시 돈을 벌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최대한 돈을 아껴야 했다. 내가 몸이 아파서 예정보다 한 달을 늦게 그리고 따로 도착했기 때문에 남편은 혼자서 첫 집을 청소하고 세간살이들을 정리했다. 얻은 집을 내가 맘에 안 들어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캐나다는 집을 얻을 때 월세를 내야 하고 집주인의 보증금 요구는 불법이다. 월세를 일정 수준 이상 함부로 올릴 수 없으며, 임대료를 올리려면 가령 레노베이션 같은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 집은 햇빛 하나는 기가 막혔다. 처음으로 일을 쉬게 되었지만 당장 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캐나다는 공식 적으로 영어와 불어를 사용하는 나라다. 내가 사는 퀘벡주는 불어의 사용 빈도가 더 높다. 외국 유학 비슷한 것도 가본 적 없던 남편과 나는 열의에 불타 올랐다. 늦지 않은 나이에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주변에선 걱정이 많았다. 우리 역시 한국에서 일하며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 도박판에 베팅하는 심정이었다.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얻은 작은 단칸방, 나무로 된 바닥에서 먼지가 뽀얗게 아지랑이처럼 올라왔다.


 한국에서 첫 직장으로 일을 하기 전 살 곳을 알아보러 엄마와 서울로 올라왔다. 올라오기 전 엄마는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전화를 하셔서 사는 곳 근처에 빈 집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미리 부탁을 하셨다. 엄마에게 출퇴근 거리가 얼마나 걸리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혼자 서울 생활을 하는 딸을 누군가가 근거리에서 보살펴 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작은 게임 개발회사 첫 월급은 터무니없이 적어서 월세를 내면 생활비가 모자라 부모님께 손을 빌려야 할 처지였다. 지방에서 자고 나란 나와 엄마는 그야말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너무 비싸서가 아니라(예산에 맞지 않는 집은 구경을 할 수도 없었으니) 적은 돈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곳은 그야말로 허물어져 가는 집뿐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친구분들은 어차피 결혼하고 아기를 갖게 될 거고 그러면 직장을 그만둬야 할 텐데 너무 여기서 힘 빼지 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적당한 때가 되면 좋은 곳으로 시집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는 서울로 상경한 멋진 커리어우먼의 환상이 가득 차 있던 상태라서 누가 뭐라고 회유를 해도 소용없었다. 출근길 지하철, 목에 걸린 사원증,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 직장 동료들과의 점심, 나의 인생이 서울에서 다시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맘을 다 잡았다.

 그날 밤은 친척 할머니 댁에 신세를 졌다. 낮에 보았던 집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내가 살 곳이라고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았다. 솔직히 무서웠다. 세수를 하고 있으면 거기 어딘가에서 쥐가 나올 것 같았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할머니 이웃분께서 월세 20만 원에 작은 지하 방 한 칸을 내주시겠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독 주택이었는데 지하에서 동네 아주머니들 머리를 해 주는 용도로 쓰고 계셨고, 방 한 칸이 놀고 있으니 세를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의 서울 첫 집이 정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했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지하 단칸방에서 울었다. 9월에 일을 시작 해 첫 해 겨울을 그곳에서 지냈다. 출근할 때마다 지하철로 가는 길은 유난히 춥고 매서 웠다. 딸을 서울로 보내 놓고 걱정에 잠 못 이루시는 엄마는 2시간마다 한 번씩 연락을 하셨다. 회식이라도 하는 날엔 강도가 더 심해졌다. 참다못한 나는,

“엄마가 자꾸 이렇게 나를 못 미더워하면 내가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겠어!”

매몰차게 쏘아 부쳤다. 엄마는 할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하시고 울먹이며 전화를 끊었다. 마음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고 싶지도 않았고 여기서 중단하면 나는 앞으로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정식으로 일과 관련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놀랄만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닌 나는 첫 직장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부족한 실력으로 인해 번번이 무시당했고 회사 사정이 매달 안 좋아진 탓에 월급을 받지 못하는 달이 더 많았다. 안 그래도 빈약했던 내 통장 잔고는 점점 줄어갔고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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