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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Aug 01. 2020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해외 생활 중 가장 힘든 순간

나고 자란 곳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다 보면 여러모로 한국과 비교가 돼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언어문제를 꼽자면, 특히나 전화로 뭔가를 진행해야 할 때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집에 방충망을 몇 개만 갈고 싶어서 의뢰를 하면 안 그래도 긴 제작기간을 훨씬 넘기고 올 생각도 안 하는 업체 때문에 속이 터져 나가고, 입 맛 당기는 한국음식을 원할 때 신속하게 배달시켜 먹는 꿈 조차 꿀 수 없을 때 너무나 아쉽지만 그런 것들은 다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방학이나 주말에 외할머니댁을 자주 갔었다. 같은 지역에 살진 않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쉽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나와 남동생을 종종 외할머니댁에 데려가곤 했다. 외할머니는 연세가 꽤 있으셨음에도 시멘트 공장에서, 시장 안에 있는 한약방에서 이런저런 몸 쓰는 일을 오랫동안 하셨다.

외할머니가 일 하시는 평일, 직장으로도 가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시고 뽀얀 먼지를 온몸에 뒤집어쓰신 채로 우릴 향해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은 엄마 손을 뿌리치고 외할머니를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가 안겼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릴 적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때 있던 재산을 병원비로 모두 써 버린 탓에 가세가 기울었다고 하셨다. 아직 어린 외삼촌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일을 놓지 못하셨다. 그렇게 힘들게 버신 돈을 낡은 지갑 안에 고이 접어 넣어두셨다가 나와 동생이 가면 아낌없이 과자며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고 용돈까지 챙겨 주시느라 모두 쓰셨다. 나와 동생을 포함해 외할머니의 손자 손녀들이 다 자라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본인을 위해 쓰셔도 모자랄 돈을 차곡차곡 모았다가 명절에 인사를 드리러 가면 나눠주셨다. 외삼촌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나서도 외할머니는 외삼촌과 함께 지내셨다. 두 딸, 엄마와 이모가 번갈아 가며 모시겠다고 외할머니를 집에 모셔와도 하루를 못 버티시고 다시 아들 곁으로 가셨다.  외할머니는 옛날 분이시라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이 엄연히 다르다고 여기셨고, 가끔 우리 집에 오시면 남동생이 부엌일을 하는 걸 끔찍이 싫어하셨다. 그래도 나는 외할머니를 무척 좋아했다.

 일 때문에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 캐나다로 오게 되면서 자주 뵙지 못했지만, 가끔 엄마를 통해 소식을 듣곤 했다. 연세가 드실수록 병치례가 잦아지셨고 최근에는 치매 때문에 요양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다.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고 늙으신 홀어머니 인해 비롯된 이런저런 사건들 때문에 가족끼리 시끄러운 일도 많았고, 싸우고 화해하고 고민하기를 거듭했다.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고 바이러스 때문에 면회도 못하게 되었다고 엄마는 무척 서운해하셨다.

병원에 들어가셔서 치료받으시고 잘 지내시나 싶었는데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는 서둘러 이번 생에서의 여행을 마치셨다.


비행기를 타면 되지만 너무 멀리 살고 있어 가시는 길 배웅도 못했다. 살아생전 왜 더 챙겨드리지 못했을까 자책하고 슬퍼하는 엄마를 곁에서 위로해 주지도 못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외할머니를 모시며 힘들었을 외삼촌 댁에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전화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필요할 때 함께 하지도 못하는데 나는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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