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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마차 Aug 10. 2020

집이 도대체 뭐길래

집이 우리 가족에게 주는 의미

 요즘 일을 할 때  경제 유튜브를 보며 작업을 하곤 한다. 대부분 알아듣기 어려운 경제 상식과 용어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듣고 있으면 왠지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는 것 같아 좋다. 요즘 그야말로 핫 한 이슈는 부동산이다. 그 어떤 경제 키워드를 재치고 일단 부동산 관련 영상이 업로드만 되었다 하면 댓글에, 조회수가 폭발적이다. 나도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 좋은 지역, 크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내 집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서러웠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해마다 나 같은 월급쟁이가 도저히 꿈도 꿀 수 없이 집값이 오르는 걸 보고 애써 아닌 척했지만 맘 한 구석엔 서울에서 집 사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서울에 있는 동안 내가 살았던 집은 반전세였다. 보증금 얼마에 월세 얼마. 평균 2년마다 이사를 다녔다. 집주인에게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온 적도 있었고, 내가 원해서 나온 적도 있었다. 집주인 중엔 본인 아들이 장가갈 때를 대비해 서울에 조그만 빌라를 구입 해, 놀고 있는 집을  나에게 세를 놓은 집주인도 있었고, 본인의 집 이외에도 가지고 있는 집이 너무 많아 제대로 기억도 못하는 집주인도 있었다. 직장생활 초기에는 회사에서 집까지 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은 바닥이 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 집을 구할 땐 최대한 직장과 가까이 있는 곳에 구하리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며 2년을 버텼다. 이사를 위해 보증금을 모으고 이번에는 내 맘에 드는 집을 구하고 싶은  희망에 부풀어 부동산을 방문하면, 나의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힘없이 바스러졌다.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았지만 언제나 집값은 저 멀리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집은 항상 내 예산보다 많았다. 그래도 다음번 이사할 땐, 다음에 할 때는 내가 더 열심히 한다면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까 했지만, 내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그다음은 결코 없었다.


 집에 대한 나의 갈증은 아마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이 초등학교 때 생애 첫 집을 사셨다. 아주 오래된 지방의 낡고 작은 아파트였지만, 그 어떤 호화로운 집보다 좋아 보였다. 이사 한 첫날밤, 집이 어떠냐고 묻는 엄마에게 이모네 집에 놀러 온 것 같다고 말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형편이 우리 집보다 훨씬 좋았던 이모 댁은 늘 아파트에 사셨다. 또래의 사촌들이 있어 방학 때마다 일주일씩 놀다 오곤 했는데 현대식 화장실에 사촌 오빠들 각각의 방이 있는 그 집은 내게 있어 부잣집의 상징이었다. 그 때문에 그 낡은 아파트에서 자는 그 날 마치 이모 댁에서 잠을 자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은 단칸방에서 월세로 신혼살림을 시작하셨다. 그 후에 전세로 집을 구하셨는데 전세금을 떼이기도 한 적도 있으셨다. 우리를 낳으신 후에도 첫 집을 장만하시기 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좋은 집주인도 물론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집주인들 때문에 상처도 많으셔서 엄마에게 집은 한 이고 설움 이었다. 그렇게 처음 집을 마련하고 부모님은 우리와 함께 몇 번 더 이사를 다니면서 조금씩 집을 넓혀 가셨다.
 동생과 나를 다 공부시키고 집 한 채 남기면 열심히 잘 살았다고 말씀하시곤 했지만 곧이어 아빠가 보증 사기를 당하고  그나마 한 채 있던 집 마저 날리신 부모님은 아직까지 본인 명의의 집이 없으시다. 엄마는 지금도 종종 말씀하신다. 그때 우리 집만 그렇게 날리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어렵지 않을 텐데….. 그것만 아니었으면 너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넉넉히 가진 것 없이 독립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은 재산, 그것 외에 정서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우리 가족에게 내 집 마련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우리 가족이 안정을 갖고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부모님은 집을 구매하며 빌린 대출금을 갚고 나면 나중에 돌아가신 후에  나와 동생을 위해 뭔가 하나는 남겨 줄 수 있게 되었다는 뿌듯함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모든 미련을 내려놓으신 아빠와 달리 엄마는 아직도 상실감을 안고 사신다. 내가 캐나다에 와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집을 마련했을 때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켰었다. 부모님께 미안하고, 기뻤고, 슬프기도 했고 두려웠지만 안도감이 들었다. 도대체 집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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