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미션, 뉴델리에서 2박3일
뉴델리로 - 마지막, 인도의 침대칸 열차 여행
물빛 가득한 도시를 뒤로하고 기차에 올랐다. 여러 클래스의 기차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마음과는 달리 처음 예약했던 SL(슬리퍼 클래스)에 적응했던 터라 마지막 기차 역시 침대칸이었다. 역사 중에서는 우다이푸르 기차역이 가장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바라나시의 기차역은 그야말로 '헬게이트' 였으며, 아그라 역의 대기실에서는 유전자 조작이 의심스러웠던 거대한 회색 쥐님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발견해 기겁한 적도 있다. 연착이 잦다는 악명 높은 인도 기차였지만, 내 일정이 틀어질 정도의 심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운행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는 걸 보니, 20여 일 동안의 인도 생활에서 큰 여유를 배우긴 했나 보다.
기차가 종착지를 1/3 정도 남겨두었던 즈음이었다. 잠시 멈추었던 어느 도시, 다수의 승객이 빠져나가고 여성 전용칸이던 객차가 휑하니 비워지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한두 가족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침대칸의 3층 전용 침대에서 누워가던 나는 또 다른 어떤 승객들이 올라탈 것인가 턱을 괴고 구경하곤 했다. 곧 기차가 출발했고, 다시 눈을 붙이려는데, 10대~20대로 보이는 인도 청년들 예닐곱이 떠들썩하게 들이닥쳤다. 거의 빈칸이라 생각했는지, 그야말로 자유로운 몸짓이 장착된 청년들은 갑자기 커다란 카세트에 음악을 틀고 흥얼거리더니, 급기야는 창문을 열고 담배까지 피웠다! 경악했다. 몇 분 동안 이 사태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이방인을 흘깃거리는 그들의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불편함'을 표정이나마 전달해보려 노력했다. 아마도 인도가 아닌 우리나라였어도 쉽지 않았을 일이다. 음악을 틀어놓는 것이나 좌석이 없는 그들이 빈칸에 들어와 점유하는 것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다. 다만 담배 연기로 자욱해지는 공기만은 (직업병이 발동해서인가) 견디기 힘든 시점에 도달했다. 삼십 여분 흘렀을까. 몸을 움직여 3층 침대칸에 엎드린 채 그들을 향해 뭔가 표현해 보기로 했다.
“Please, Don't smoke.”
내 얼굴은 아마도 가능한 최대로 경직되어 일그러져 있었을 게다. 담배 피우던 중학생 녀석들 잡아 지도하던 카리스마는 어디 가고, Please라니. 하지만 나름대로는 그들 무리와 맞대응할 <에네르기파>를 눈빛으로 쏘았다(고 믿는다). 알아듣지 못했을까 손으로 x를 만들며 부정의 몸짓까지 덧붙여주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그들의 흥겨운 분위기를 깨자, 그들도 놀라기는 했는지, 서로 힌디어로 중얼거린다. 잠시 후 담배를 끄는 놈, 담배를 갖고 나가는 놈이 있긴 했다. 담배 연기는 줄긴 했으니, 내 눈빛 공격이 그다지 효과가 없던 액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했던 그 '행위'는 다소 무모했던 것임을 두고두고 반성하고 되뇌곤 했다. 시간이 더 흘렀을까. 음악 소리와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그동안 나는 평온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소음과 상관없이 어디서건 밤을 잘 보내는 편이라 개의치 않을 수도 있었지만, 이미 그들에게 행했던 '경고'로 오히려 내 불편한 마음이 더 커진 탓이었을 거다. 참을 수 없는 지경이라고 혼자 중얼거릴 즈음, 다행스럽게도 기차 안을 돌아다니던 차장 사무원이 내가 있던 객차로 들어왔다.
-오, 구세주.
재빨리 그를 불렀다. 내가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이곳이 여성 전용칸이라는 사실밖에는 없었다. 모른 척 지나가려던 그는 나의 다소 경직된 항의에 바로 다른 객차에 있던 가족 일행과 그들의 좌석을 바꾸어 주었다. 자리를 떠나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아야 했다. 사실 그 이후로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도 왠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잘했어, 잘했어!
뭔가 찜찜하고 미안한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새벽잠에 다시 들었다. 그렇게 무사히 뉴델리 역에 다다랐다.
이른 새벽에 역사에 내려 주섬주섬 짐을 정리해보니, 갑자기 가이드북이 보이지 않는다. 침대칸에 놓고 내린 것인지 아리송하지만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충 메모해 두었던 여행자 거리로 일단 빠져나왔다. 물론 새벽녘에도 릭샤왈라와의 흥정이라는 관문은 여지없이 치러야 한다. 일단 눈에 보이는 숙소를 찾았다. 보통 숙소의 체크인은 오후 이후지만, 델리는 워낙 관광객이 많은 탓인지, 이른 체크인 서비스도 부담 없이 해주고 있다. 1박-2일의 시스템이 아닌, 24시간-12시간으로 단위를 끊어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런저런 것을 따지기 힘들 정도로 고단한 침대칸 여행이었기에, 내 예상금액과 큰 차이가 없던 화장실이 딸린 1인실을 잡았다. 그리고 일단 모자란 잠을 청했다. 끼니를 해결하려 눈을 떴다. 내가 도착한 날은 공교롭게도 인도의 국경일! 국경일이므로 교통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여, 어떻게든 이 날짜 이전에 도시 이동을 마치려고 계획했었다. 무사히 계획대로 예상한 날짜에 델리에 입성했다.
뉴델리에서의 각종 ‘사기’ 행각은 여러 종류로 유명했다. 예를 들면 어리숙한 여행자들이 ‘타지 마할을 보고 싶어요.’와 같은 정보를 구하면서 현지인들의 친절을 기대하는 잠깐의 순간을 노린다. 잠시 마음을 놓은 여행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기찻삯과 대행료를 바가지로 씌워 판다던지, 기차와 버스가 갑자기 운행하지 않는다는 둥, 티켓 서비스가 열리지 않는다는 둥, 여러 가지 핑계를 들여 자가용-택시를 태워 역시 요금으로 200~300%를 당당하게 요구한다는 에피소드가 여행자 카페에 즐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도시에서 방향을 잃고 어리바리 마지막 도시를 헤매고 있던 나에게도 사기꾼의 손길이 닿았다. 공교롭게 가이드북의 ‘델리’ 편만을 분실했던 나는 시내 관광지도라도 얻어보려 근처의 인포메이션 사무실을 찾아 헤맸다. 물어 헤매다 횡단보도 앞에서 운 좋게 금세 (i) 표지판을 발견한 나에게, 옆에서 날 보던 멀끔한 인도인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여행 왔어요?, 어디서 왔어요? (몹시 친철하고 예의바르며, 온화한 표정이었다.)
-한국요. (살짝 경계하며)
-음, 그럼 지금 어디 가요? 오늘 국경일이라 갈 데가 별로 없을 텐데. (아이고, 걱정까지!)
-아, 조오기 인포메이션 센터 가요. 지도 좀 얻을까 해서... (괜찮겠지?)
-아! 그럼 날 따라와요.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걸? (오, 예!)
-난 지도만 얻으면 되요.
-OK! OK! 가까워 바로 근처네~
그는 내가 가려던 인포메이션 센터 맞은편의 사무실 ‘***tour여행사‘로 안내했다. 나도 나름의 경계심으로 치자면 빠지지 않는 터인데, 어딜 봐도 ’호객꾼‘의 냄새가 나진 않았단 말이다. 그래도 여행사를 가면 각종 도시 관광 지도를 배포하고 있으니 하나 얻어야겠다 싶어 그가 손짓하는 사무실로 의심 없이 들어갔다. 사무실엔 멀끔한 남자 직원이 데스크에 앉아 마치 인도의 집 한 채라도 보러 온 고객을 대하듯 나를 대접하며 앉힌다.
-어디서 왔어? (응? 또 물어보는거냐?)
-한국!, 아 그런데 어제 우다이푸르에서 넘어왔어요. (더이상의 자세한 개인정보는 주지 않겠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아그라 가야지? (아! 그 타지마할 호객이 이렇게 시작되는 거였나!!! 대박! )
-No~. (타지마할 보고 왔지요~) 나 내일 한국 가요. 여기 마지막 도시라니까. (메롱!)
-근데, 저 미안한데, 다른거 다 필요없고요.
나 지도나 한 장 얻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도 얻어가는 주제에, 공손히!)
어수룩해보이는 날 꼬드겨 아그라로 데려갈 생각이었으려나.
호객꾼 역할을 했던 멀쩡한 청년이 아무래도 손님을 잘못 골랐다. 여행사 직원은 갑자기 얼굴에 짜증이 일며 서랍을 열어 델리 지도를 던지듯 내준다. 나는 환한 미소로 감사의 인사를 5번쯤 반복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이틀 뒤, 길에서 우연히 이상한 여행사 직원을 다시 만났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아직도 한국에 안가고 뭘 하고 있는가'라고 묻길래 인도 관광미션의 만렙을 찍은 시늉과 시크한 표정을 지어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갈 거야. 기회 되면 또 봅시다.
그가 던져준 지도는 델리의 유명 관광지들을 위주로 그려진 1장짜리 큰 지도였다. 사실 나침반이라도 구해볼까 고민하던 나에게 그림지도라도 주신 분께 큰절하고 받아야 했겠지만, 숙소며, 식당이며, 교통정보까지 세세히 필요했던 나에게 가이드 북이 없다는 암담함은 정말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인도의 독립기념일이다. 숙소 근처의 지하철역을 가보니 정말로 일부 구간이 차단되었고.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이 큰 인도, 그리고 그 중심 뉴델리 - 대중교통도 제법 복잡한 인도에서의 일정이 2박 3일이 남아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여행자 거리에서 먼저 배를 채우고 일정을 고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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