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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금이 있던 자리 Jul 29. 2024

[Review] 우리 사인 너무 멀었다

연극, 까마귀 클럽

7월 25일 목요일, 저녁, 혜화에 도착했다. 날은 가열을 마친 찜솥처럼 습하고 무덥다. 축축하게 살갗 속으로 밀접해 오는 여름, 변화무쌍하다. 오전만 해도 전혀 비 내리지 않을 것처럼 도도하고 가열차게 밝던 하늘은 느닷없이 소나기를 부리던 것이다. 아니 글쎄 점심 무렵에는 우박이 쏟아졌다고도 하더라. 물론 그의 말을 믿진 않았지만. 


비가 오면 도시는 더욱 느리게 꾸물거린다. 차들의 붉은 점멸등으로 더욱 빽빽해지다. 느리게 흐르는 버스 차창 밖으로 쏟지는 비를 걱정하였다. 하지만 정류장에 즈음하여 거짓말처럼 화창해진 세계는 엄청난 습기 속에 알알이 열기를 머금는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길을 건너며, 잠시 창경궁 쪽으로 바라본 하늘은 다시 맑은 바탕에 홍조를 띠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기에는 너무 더웠다. 회사로부터 하루를 겨우낸 옷가지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땀으로 어지러웠다. 찜통 같은 세계를 거닐며 생각했다. ‘왜 비는 오다가 차라리 마는 것이고, 덥기는 또 이다지도 더운지. 육시를 할 것.’ 그만큼 무더웠다는 것이다. 참으로 변덕스런 하늘. 그건 결코 유쾌하지 않은 동시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변덕스런 것에 대한 신경증, 하지만 그건 곧 죽여내야 할 익숙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내 기분 따위를 괘념키에 너무 높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하나 신경 써주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 말고는 방법 없기 때문이다. 하늘이, 저기 구름이 그렇고, 세계가 그러하며, 실은 너도 그리고 나도 그러하다. 우리가 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 모조리 신경 써주기엔, 우리 사인 너무 멀고 거기 사람이 너무 많다. 익숙해져야만 할 일이었다. 





연극 ‘까마귀 클럽’은 은둔 청년을 주제로 하는 극이다. 이원석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본 극은 ‘2024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지원사업’을 통해 극단과 만났다. “가장 낮은 곳에서의 분노, 감정적 약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우리 사이에 축적된 분노는 어디에서 비롯돼 어디로 가는지”를 그려낸다, 고 전한다. 


*시놉시스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
온라인에서라도 친구를 사귀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이제는 다 때려치워야겠다고 다짐한 순간 발견하게 된 수상한 모집공고

”화 못 내는 사람, 억울하면 눈물부터 나오는 사람, 이제 더는 참고 살 수 없다고 다짐한 사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믿고 함께 분노할 사람을 찾습니다. 당신을 노력형 분노 스터디 까마귀 클럽에 초대합니다.”


나는 은둔 청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비자발적으로나마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기대한 것에 비하자면, 극 중의 인물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극의 초반부는 캐릭터를 형성하고 관객을 설득시키며, 향후 서사의 개연성을 쌓아올리는 단계. 그러나 주인공 ‘나’는 내가 이입해보기엔 지나치게 밝고 순수하며, 아름다웠다. 어찌 저리 해맑고 담담한지. 그는 철저한 고독 속에 있었지만, 아주 조금 시무룩할 뿐이었고 그러므로 얼마든지 당차게 내일을 살아가리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저 어여쁜 캐릭터의 등 뒤로 이런 믿음과 신뢰를 보내주었고, 그건 이 극이 적어도 내게 있어선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주인공 ‘나’는 소심하고 답답할지언정, 담담하고 굳세다. 그에게는 고독과 소외로 말미암는 분노, 세상과 타자에 대한 아무런 분노도 억하도 없다. 시종 긍정적이었고 순수했다. 그런 사람은 놀랍도록 강인한 사람이며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세계로부터 고립되었노라, 사람들로부터 거부되었노라는 극의 설명, 나아가 향후 모든 서사의 행간에서도 함의될 이 전제에 나는 몰입하지도 동의하지도 못했다. 주인공에게선 인간적인 결함과 모순, 온갖 발칙함들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거세된 것처럼. 


어쩌면 관객들에게 적나라히 선보이기에 그들, 은둔 청년의 심리 행태는 지독하고 아득하며 이해받기 어려운 것인 까닭일까. 어쩌면 내가 익히 보고 듣고 알고 기억하는 그들은, 극의 무대 위에서조차 그 자리를 다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씁쓸한 생각을 했다. 나 또한 세상의 이면에 대한 지나친 리얼리티를 추구하다가 몇 안 되는 독자들로부터 몰이해와 거리감을 사는 경우가 잦다. 또 내가 매우 흡족하게 관람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부조리극엔 좋지 않은 리뷰들이 달리곤 하였지. 어느 쪽도 이해하기에 어려운 것, 이해받기 어려운 그대, 그리고 늘 이해하기를 어려워하는 반대편의 그대, 그러므로 슬펐다. 우리 사인 너무 멀고, 그 사이엔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의 은둔 청년은 사람이 그리워 수상한 단체에 가입한다. ‘어디 가서 화 한 번 못 내는 그대들, 같이 모여서 분노합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합시다.’ 팜플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주인공의 관심사가 ‘화를 내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람이 그리워서 가입 신청을 누른다. 호스트인 ‘별’과 게이 커플 ‘워리’와 ‘프로틴’, 그리고 신입 회원인 ‘나’, 총 네 명으로 구성된 모임. 운영 방식은 이렇다. 달에 한 명씩 시나리오를 작성해 팀 내에 공유하고 짝을 맞추어 롤플레잉을 진행하는 것. 롤플레잉이 끝나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이 소심한 사람들은 서로의 면전에 대고 화내는 연습을 한다. 그렇게라도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한편 모임장인 ‘별’은 어딘가 미심쩍은 인물이다. 딱히 관객에게는 그런 낌새를 감추지 않는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이 곧 있을 절정부 메인 빌런이다. 그녀는 독선적이고, 맹렬한 표독의 감정을 넉넉하고도 온유한 미소 뒤에 감추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회원들은 이 모임에 의지한다. 어쨌든 여긴 참으로 평안한 유일한 곳이니까. 하루는 호스트를 제하고 사내들끼리 술을 한잔했다. 그날은 호스트가 수다스러운 ‘워리’에게 면박을 준 날이었다. 취중의 워리는 시종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다간 술김에 이 모임의 어두운 이면을 밝히려 하였으나, 취기를 못 이겨 고꾸라진다. ‘나’는 물었다, 그렇게 불만이 많은데 왜 여기 아직 남아 있느냐고. 프로틴은 “우리를 우리라고 불러주는 곳은 여기뿐이기 때문에”라고 답했다. 흠, 글쎄. 극이 끝나고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다시 보아도, 나는 그 말에 공감할 수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화가 나지 않지만 화를 내고, 그러니 당연히 화는 제대로 나지 않고, 그런데 화를 못 내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어쩜 너무 진지하게 피드백하고 있었고 여하튼 이상하다. 하지만 좋았다. 중요한 건 성공적으로 화내는 게 아니라, 그런 시늉을 하면서라도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니까. ‘나’는 텔레마케터이다. 매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일상. 대부분의 시간은 통화연결음과 ‘뚜-뚜-뚜’ 통화가 끊긴 소리로 가득 차 있으나, 간혹 불같이 화를 내며 모멸스러운 이야기를 쏟아내는 사람도 얼마든 있는 법이렷다. 


그 기억을 빌어 ‘나’는 마침내 모임에서 성공적으로 화를 “연출”했다. 물론 그게 ‘화’를 냈다고 보기엔 어려움이 많지만, 적어도 할 말을 다 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쏟아질 회원들의 찬사도 충분히 이해될 법하다. 워리와 프로틴은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 ‘나’는 아무래도 여러분들이 편해져서 그런 것 같다고, 쑥스럽고 기쁘게 말하였다. 그러자 우리 ‘별’이는 눈이 돌아버린다. 완전히 돌아버려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다. “편하다”는 것이 그녀의 발작 버튼이었던 것이다. 나는 심히 황당해졌다. 




그래, 별에게도 사연이 있지. 별은 창구 민원을 담당하는 공무원이다. 하루는 크리스마스 이브 당직 날이었는데, 진상 민원인이 들이닥치더니만 압류된 자기 번호판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놓는다. 그건 그녀의 소관이 아니다. 그녀는 달래듯 생글이 웃었다. 화가 풀리겠지, 풀려라 제발, 그런 내심의 기대와 상냥함으로. 그러자 뺨싸대기를 맞는다. 아팠다. 그러나 그녀는 무력했고, 여전히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어코 화를 내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 반쯤만 불을 켜둔 민원 사무실에는 나와 저 미치광이 사내 단둘 뿐이었다. 다른 선임이 도착하고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 다음 날, 일이 커지지 않기를 바란 민원인은 ‘별’을 찾는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그래선 안 됐는데… 죄송했습니다 선생님.’ 민원인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게 ‘별’의 안에 있는 인간성의 한 귀퉁이를 끊어내 버렸던 것 같다. 


허나 리얼한 연기는 좋지만, 그전까지의 서사가 하나도 리얼하지 않았던 판국에 갑자기 리얼리티를 획득하려는 것은 어려울 일이다. 간극을 뛰어넘기 위해 무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공연장을 쩌렁쩌렁 뒤흔들어 놓은 그녀의 소리 큰 분노와 완전히 희번득해진 눈알이란… 온갖 저주 섞인 말들이 객석을 향해 불필요하게 날아들었다. “뭐? 편해? … 이 새끼들은 오냐오냐하면 아주 머리끝까지 기어올라. 으으으으 이 건방진 새끼가. 편해? 내가 편해? 니까짓 걸 사람들이 뭐 대단하게 생각하는 줄 알아? 이 쓸모없는 텔레마케터 새끼가 주제를 알아야지! 이 씨-발놈이!!!’ 


어우, 욕이 괜스리 차지다. 내가 이렇듯 리뷰에 고스란히 욕을 옮기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과하고 불쾌하게 생각될 줄을 안다. 굳이 다 옮길 필요까지 있나… 내 감상이 딱 그렇다. 이게 다 ‘여러분이 편했다’는 한 마디의 대가라니. 깔때기로 물병에 물을 담기 위해서는, 그 원뿔이 담아낼 수 있는 만큼 나누어서 담아야 한다. 한꺼번에 몰아서 담으려 하면 전부 흘러넘쳐 버리는 것이다. 정해진 절정이 있었으나 극은 차근차근 준비하지 못했고, 절정부에 이르러 돌연 낯빛을 바꾸어 기존의 톤과 볼륨을 아득히 벗어나 버렸다. 그건 관객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여 주기 어렵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게 차라리 현실이라면, 어찌 흘러가든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현실엔 설득력이라든지 개연성이라든지 핍진성이랄 게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은 현상이고, 나는 인간 안에 여러 가지 트리거를 내포하고 있는 카오스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대 등장인물과 나 사이가 그런 쿨한 체념의 관계, ‘익숙해져야만 하는’ 관계일 수는 없어서 말이지. 내가 올여름 더위에 앞서, 변덕스러운 일기와 습기로 가득 찬 세계와 뭇 사람들의 변덕스러움에 대해서 그랬던 것,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과는 달리 말이야… 


‘별’이는 관계를 제멋대로 맘대로 뒤엎어버렸고, ‘나’만 혼자 된 다시 방으로 돌아오고, 자책한다.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함께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까마귀 클럽’의 모집 공고가 인터넷에 다시 게시되며, 암전. 극은 그렇게 맥없이 끝나 버렸다. 주인공은 다시 캄캄한 방으로 돌아왔고,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별’은 발작했고, 실은 그렇게 이미 예전의 회원 하나를 보내버린 전적이 있었으며, 그럼에도 모임은 유지될 것이다. ‘워리’와 ‘프로틴’은 그 모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우리라고 불러주는 곳은 여기뿐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흠 글쎄, 너희에겐 이미 사랑하는 연인인 서로가 있지 않나.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희 지나치게 자연스러웠어. 마치 모든 기억이 제거된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이 서사의 결론은 ‘인성 파탄자에게도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게는 없다. 선하고 걱정과 웃음 많고 애초에 화도 억하도 허영도 적은 인간, 무해한 내게는 아무튼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내 안에서는 이렇게 멋대로 갈무리되고 만다. 무대와 객석 사이, 우리 사인 너무 멀었다. 내가 찾던 사람 사이의 거리라는 게 이런 건 아니었는데… 적어도 그날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런 아득한 몰이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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