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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에 대한 사유

니체, 도덕의 계보 서평1

by 풍금이 있던 자리


아트인사이트에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날아온다. 슬슬 때가 된 것 같은, 어떤 경미한 불안이 내 안에 감도는 이맘때의 것, 활동 취합 요청이다. 2달간 아무런 글도, 아무런 문화초대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딱히 전전긍긍하지 않는 까닭은, 내 삶이 몹시 바빴고 때는 여름이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아무런 생각,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글로 빚어볼 법한 근사한 생각에까지 사유가 미치지 못한다. 상념은 눈앞에서 촌각을 다투는 것들, 예컨대는 더위와 일정만으로 부산하기에 외려 나는 이맘때 ‘편리’하다. 이 이야기도 참 자주했다.


회사에서 2달짜리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리고 2달이라는 프로젝트 기간에는,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당사의 요구사항과 필수 요건을 정의하고, 현재의 AS-IS를 파악 및 분석하고, 업체들에 견적 요청 및 입찰을 진행하고, 각 협력사와 당사 유관부서의 일정을 조율하고, 사내 결재를 올리고 하는 등의 준비 업무는 모조리 빠진, 알짜배기 만으로서의 2달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어제, 기나긴 프로젝트의 7부 능선을 넘었다. 어제는 프로젝트 라이브 날이었고, 낮 동안 부랴부랴 진행한 개발계 테스트 결과를 개발자들에게 던지듯 쏘아내고는 오산의 물류 현장으로 넘어와 사용자 교육과 모니터링으로 밤을 새웠다. 그런 정신 없는 와중에 울린 한 줄기의 카카오톡 알람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희한하지. 종일 업무 카톡과 전화의 진동음, 그 외 개인적으로 신청해둔 각종 뉴스피드와 푸시 알람으로 핸드폰이 뜨거운데, 아트인사이트의 그것으로 울린 진동에서 무언가 다름을 느끼었음이란. 그리고 그 자각, 아니 육감이 번뜩이는 순간 지난 2달은 주마간산처럼 스치며, 내가 글을 썼는지 안 썼는지, 왜 안 썼는지,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고, 지금껏 무얼해 왔는지에 이르기까지의 퍽 긴 생각들이 촌각에 뇌리를 차오르는 것이란. 나는 두 달간 참으로 바빴구나. 이성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일정과 우선순위 사항들에 혼이 빠져 있었고, 사유는 비었으며 그러므로, 나는 ‘편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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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하다. 다른 뉘앙스로는 ‘간편’하다고 해볼까. 사유가 비면 내 삶은 간편해진다. 나 자신을 운용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운용하고 몸과 정신을 이끌어가고 있는지들 모르겠다만, 사유가 사라지면 나의 일상은 몹시 간편해진다. 그것은 더 이상 내 안으로부터 스치듯 떠오르며, 솟아나기만 하되 스스로 멈출 줄 모르는 온갖 잡다구니들이 소강상태에 들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재밌는, 아니 즐거운 역설이다.


무의식이 의식을 향해 투척하는 온갖 귀치 않은 투정과 생떼 같은 것들. 말하자면 불안과 의심, 스스로 굳게 믿는 생각 내지는 고집과 그 고집이 세계에 부딪힌 뒤 내게로 돌아들 때 알게 되는 낙차와 괴리, 그로 기인하는 반감과 비관, 나아가서는 그 비관에 살을 덧대는 갖가지 반례들. 저절로 떠오르는 이 모든 부당함 즉, 부조리의 감각들. 정신을 굽어보고 있으면, 즉 사유하고 있노라면 묵주를 세듯 이것들을 한 가지씩 꼽아보게 된다. 더 정확히는 그런 것들로 아우성치는 이 가슴을 잠재우기 위해 우리는 속 깊은 바다의 어둠으로 빠져들어 간다. 이점에 있어서는 아마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함이란 번뇌가 있은 뒤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다. 사유를 논함에 깊이라는 모호하기 그지없는 것을 완전히 제하자면, 그것은 그냥 번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이다. 감정에 지나침이 있을 때 뒤따르는 자제함이고, 가슴을 비집어 자꾸만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려고만 하는 반항으로부터 생겨나는 통제의 요구이다. 다만 직접 가슴을 따고 머리를 열어, 이 안 어딘가에 꾸물거리고 있을 벌레들을 솎아낼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 별다른 수가 없어 행하는 허약함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갈등이란, 상반되는 두 가지 에너지의 충돌에서 비롯되므로… 내적 갈등에 있어 그 갈등의 기원은 부조리가 아니라 저항에 있음이다. 왜냐하면 부조리는 선택할 수 있는 것도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반면에, 후자는 그러하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것들이 이 안에 존재한다 한들, 저항하고 반항하지 않는 한 그것은 갈등으로 거듭나지 않는다. 그간 내 삶이 조금 편리해졌단 것은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말인즉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의 맥락으로 해부한 바 사유란 곧 저항이 아닌가.


나는 그저 살아갔다. 사유가 부조리를 굽어보지 않는 한, 아직 그것은 가벼운 불안과 억하의 예감으로만 나를 감돌 뿐이고, 그렇게 나는 눈앞의 것들로만 살아갈 수 있다. 평안에 이르렀단 말이 아니다. 화나고 억울하고 어딘가 불안하되, 또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잊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그것을 반복하며 그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미봉책이라지만, 애초에 인생이라는 것이 영영 미봉책은 아니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다음에 뒤이을 말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곧잘 편리에 이를 수 있었다 하여, 그것이 곧 올바른 선택이 되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즐거운 역설이 아니인가? 눈앞의 편리와 멀리 있는 평안 사이, 선택의 기로가 아닌가 우리는. 보지 않고 묵혀두는 편이 좋은가, 부러 들여다봄으로써 번뇌하는 편이 좋은가. 그러나 나는 물을 뿐, 딱히 더는 무언가가 더 옳다는 듯이 선택하고, 마치 형이상학자들처럼, 그것을 긍정하는 논리의 얼개를 부과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인생은 셀프고, 선택은 각자의 몫이며, 오직 그 자신의 몫이어야 하는 것이기에. 권리는 책임에 후행하는 것. 선택의 권리는 그 선택의 책임을 지는 이의 전적인 몫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랬듯이 내 이야기만을 한다. 지금 내 가슴에 부조리가 넘친다. 결국 들여다보는 것이다. 더는 어린아이와 같이 이 부조리의 감각을 객관적 사실에 결부하거나 자기 외적인 것들로 치부해버릴 만큼 어리석지 않다마는, 그럼에도 한편은 어린아이와 같이, 그 감각을 손수 해결해주어야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유는 먼저 들여다봄이 하나이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하나하나 스스로 풀어헤쳐 나감이 둘인 듯싶다. 지속해서 부조리의 감정이 발생하는 바로 그 지점, 이해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 헤쳐주어야 한다. 더러 망각이 그 실타래 위에 두터운 먼지를 덮어주리라마는, 먼지에 덮이는 것보다 새로이 쌓여가는 것이 더욱 많음이다.


나는 사유한다. 이것은 그리 거창하거나 젠체해 볼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므로, 공공연히 표함에 부끄러울 일도 아니이다. 2달 동안 쌓이고 묵혀 있는 부조리를, 아니 부조리의 감정을 본다. 거기 내 삶의 곤란함이 있다. 삶이 자주 곤란했던 것, 그리 대단치도 않은 내 몸과 정신을 운용하는 것이 유별하리만치 난감하고 까다로운 것이 되어 있던 까닭은, 세간의 이해와 나의 그것이 충돌하고 반목하고 이별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리고 개중 가장 희극적이고 본질적인 갈등은 도덕에 대한 양자 간의 차이에 있다. 사유는 이 두 가지 먼 사이에 끝없이 다리를 잇는 일이다.



아, 내 안을 들여다보노라면 가슴 벅차다. 충분히 오래도록 해부된 나는 내 문제의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너무 정직하다. 그게 나를 줄곧 곤란하게 한다. 정직이란 그 극단에 있어 온전히 미덕일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애초부터 그 자체로 미덕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직이 미덕의 외형을 획득하는 것은 특별히 마련된 비극의 무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자기를 파멸시키되 공리적으로 이익이 되는 진실의 폭로 앞에서, 말하자면 휘슬 블로잉, 그때 몰락의 두려움과 진실에의 욕구가 일으키는 고뇌가 밑 재료가 되고, 이윽고 폭로된 비밀이 낳은 예정된 비극이 완성하는 아름다움이며, 그 폭로에 괴로워하는 대적자들에 대한 우리의 원망과 반감으로 완결되는 서사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공리적이고도 자기 파멸적인 어떤 정직은 극적인 것이 되어 우리의 뇌리에 남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정직의 대표격으로 생각한다. 이때 정직의 다른 이름은 도덕이다.


비밀의 폭로에 따르는 고뇌와 그 결과, 비극성에 대한 우리의 애호와 동의는 그것을 가능케 한 본질적인 것에 찬사를 보낸다. 그때 정직이 미덕으로, 즉 도덕으로 변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허나 주지하였듯 그것은 어떤 정직에 해당하는 것이지 모든 정직의 양상에 해당하지 않고, 다른 반례로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상정이다. 오히려 그 사례에도 적용되는바, 정직의 본질적 성질은 폭로이고 그것을 가능케 한 냉철함과 의기, 참을 수 없는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지금 도덕의 범주에 들지 않는 정직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언젠가 내 삶의 무대에 비극의 재료가 마련되면, 피할 수 없는 그 장면 앞에서 폭로하고 몰락하게 될 것이다. 그로써 내 삶이 미덕의 정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살아감에 매 순간이 극적일 수 없듯이 대부분의 일상은 잔잔하고도 시시하게 흘러가고, 그 소시민적 무대 위의 주인공인 나는 지나치게 정직하며, 그 정직의 본질적 성질이 폭로라면 나는 비로소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매 순간 너무 많은 것들이 나로부터 폭로되길 원하고 있고, 그것은 아주 곤란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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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감각되는 정직의 순수한 본질은 잔인함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폭로하기 위해 열린 눈이고, 장막을 거두는 칼끝이다. 그것은 두건과 베일, “사소한 거짓과 기만”들을 투시하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의 모든 것들을 나신 裸身으로 만든다. 이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 사람들이 정직한 인간을 불쾌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대 앞에 선 정직한 인간은 그대의 옷을 투시해 그대의 맨살 위에 튼 자국과 접힌 주름을 바라본다. 그러니 정직한 인간은 고개를 돌려야 한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순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있다.


정직은 자신이 이해하는 범위 내에서 세계의 모순과 불합리와 부조리를 스스로에게 가감도 층위도 없이 올곧이 펼쳐버린다. 그 세계라는 광의의 개념에는 나와 그대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정직이 그 자체로 미덕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나와 그대의 모순과 실패, 거짓과 부조리를 가림 없이 드러내 버리는 잔인한 눈이다. 눈을 감거나 돌려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감은 두 눈꺼풀의 아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순, 말의 앞뒤가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쯤이야 인간에게는 제기할만한 문젯거리도 아닌 것임을 익히 학습했다. 나아가 그것은 결코 제기되어선 안 될 무례함, 부조리가 되어버리는 것까지도. 그러나 보이는 한 거슬린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여러분이 떠올릴 법한 반례인 ‘정직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사람’, 즉 정직이 아직 미덕으로만 기능할 가능성을 언급하고 넘어가자. 그로써 두 가지 사례의 구분과 유별성이 드러날 것이다. 정직이 자신의 이해 범위에서만 기능한다면, 그것이 미덕이기 위해선 너무 많은 것들이 해부되어선 아니 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밝혀져선 아니 된다. 그가 여전히 정직하면서도 온건하려면, 사람들로부터 온당히 받아들여지려면 앞서 말한 것들, 인간의 모순과 부조리를 까마득히 몰라야 한다. 그렇게 무지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요구된다. 모르는 것들은 순수한 망설임으로 끝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 그럴 수 있지.”


나는 그걸 몰랐다. 그게 나의 실수다. 왜 나는 타인들에게 부조리인지를 알기 위해 배워왔으나, 앎은 역설적으로 나를 더욱 부조리하게 한다. 아는 만큼 보이되, 내 문제의식의 본질이 ‘보는 것’에 있는지를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다. 오 솔직함이여. 이상 논증한바, 그것이 정말 미덕이었을까. 그리고 비단 정직뿐 아니라, 다른 많은 미덕들도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극적으로 고양된 감정 이면에 가려진, 기계적 원리를 바라본다. 이쯤에서 서평의 주제가 될 책을 언급하자면 내 실수가 좀 더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서론은 시지프 신화, 혹은 도덕의 계보의 서평이다. 부조리와 가치 전도에 대함.


나는 부조리의 사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부조리한 객체가 아니라 부조리의 감각을 일으킬 만큼 거슬리는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건 하등 쓸모없는 논증이다.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걸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것은 무용하다. 이렇듯 모순에 대해 서로 다른 것을 견지하는 두 사람, 나와 그대들의 신념이 부딪히면서 또 다른 모순들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나도, 이 글도, 나아가 세계도 온통 즐거운 역설이 아닌가. 인간의 모순 위에서 우리 둘이, 그대와 내가 온통 춤추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모순, 불필요하고 불편한 사실들에 지나치게 밝은 나와 그것을 쉽사리 이해치 못하는 그대. 나는 그대와 나의 모순을 직면하고 부딪히며 깎여나가고 있다. 지쳐간다. 습하고 후텁지근한 기후와 매일 달아오르는 핸드폰과 그보다 더 뜨겁게 익어가는 나의 뇌는 한계에 달했다. 나는 모순이 되어가고 있다. 허나 그로써 나는 무지에 의한 모순들보다 더욱 순수하지 않은 것, 터무니없는 것이 되어간다. 알고도 행하는 모순이라니. 이게 얼마나 자기 파괴적인 지를 그대가 이해할 수 있을까? 모순을 들여다보느라, 그 자신이 모순이 되어가는 것을. 그러므로 즐겁지 않은가.


그러니 이쯤에서 서론을 다시 불러오자. 사유가 멈춘 나의 삶이 편리했던 것은, 이 모든 비밀과 부조리가 후순위로 밀린 채 잠깐 잊혔던 까닭이요, 내가 그것을 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는 곧 세계가 나를 바라보는 태도와 공명하고 서로 간섭한다. 닮은 것이 된다. 즉 내가 세계를 부조리하게 바라보면, 세계 또한 나를 부조리한 존재로 대접한다. 그러므로 이 기로 앞에 선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저항 혹은 순응이다. 너무 많이 파헤쳐버린 자에게 보류라는 온당한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사유는 가장 먼저 이러한 부조리를 의식 전면에 띄우는 행위이므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며 기피감을 자아내는 행위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이편 나의 이해로부터, 저편 타인들의 그것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선 피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사유한다, 끝내 모순으로 떨어진 채 멈춰버리지 않으려고. 앎으로 삶이 더욱 불편해졌다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또 다른 앎과 지혜의 다리가 있으리라 믿는다. 눈치 채시겠지만, 이 주제가 다음편 본론이다.


이상 서평의 서론을 마무리한다. 이 서론을 도덕의 계보에 바칠지, 시지프 신화에 바칠지는 아직 고민된다. 이 이상은 책을 도서관에 반납해 인용이 어려우니, 글은 서론까지만 전개해놓고 이만 기고하련다. 마감 시간을 맞춰야 하거든.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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