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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죄인들의 윤무

연극, 단테 신곡 후기

by 풍금이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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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단테의 신곡 中



단테의 신곡은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다들 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유명 고전이다. 오늘의 연극은 세 개의 시편 중 ‘지옥 편’에 집중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따라, 단테는 지옥의 문을 지나 지옥의 심층을 향한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구가 가리키듯, 그가 장차 경험하게 될 지옥에는 아무런 희망도, 속죄와 구원도 없는 영원한 고통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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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단테 신곡’은 기독교 세계관 속 지옥을 무대로 그 안의 죄와 벌, 그로 인한 고통의 형상화를 목표로 한다. 지옥으로부터 출발해 연옥을 지나 천국으로 향하는 그의 상상의 여정은, 중세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기독교 중심 사회인 중세 서양에서 이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 영향력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지옥과 천국의 형상화를 통해, 믿음이 약한 자에겐 두려움과 외경으로서, 믿음이 강한 자에게는 약속으로서의 믿음을 일으켰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 그러한 시대·문화적 배경을 공유하지 않는 우리에게 그것은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을까? 신이 죽고, 아무도 그러한 신적 세계관을 진지하게 믿을 수 없게 된 작금 우리에게, 더구나 그러한 문화적 배경을 경험하지 못한 동양의 현대인에게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 마르코 복음서, 9장 42 ~ 48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 누가 복음, 16장 19 ~ 28절



곧 발행될 니체의 오피니언에도 묻어있을 테지만, 나는 강력한 무신론자이고 종교적 관점에서는 깊은 회의주의자이다. 나는 불가지론자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의 회색분자가 아니라, 신은 단 한 번도 증명된 적 없거니와, 종교적 세계관을 충실히 따르자면 그 신은 모순적이며 어불성설이라는 믿음을 고수해왔다. 나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동의할 수 없다. 아무런 자각 없이 세상으로 내던져진 인간 존재를 시험하는 ‘얄궂은 눈을 한’ 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으면서도 믿음을 강요하는 ‘터무니없는’ 신, 무지 속의 죄악을 대가로 영원한 형벌을 주는 ‘지나치게 잔인한’ 신, 그리고 그러한 죄악과 죄악의 피조물에 “맹렬한 복수의 감정”을 느끼는, 너무도 인간적인 신. 강력한 불신자인 나의 눈에 비친 예수교의 신은 악신에 가까웠다.


물론 이에 대한 수많은 종교 철학자의 반론이 시대를 걸쳐 있었겠지만, 여전히 그러한 세계관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었을까. 단테와의 여정 중간에, 나는 갑자기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급작스럽고 터무니없는 일이며,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신도, 사후세계도 그 어떤 것도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굳게 믿던 나로서는. 그때 우리는 지옥 제3층을 지나고 있었고, ‘아- 만약에 정말로 사후세계가 있다면 나는 제1층에 수감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단테의 신곡이 당대에 미친 영향이자, 어쩌면 그 목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통감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등불로 삼아, 하늘 아래 당당히 양심껏 사는 것으로는 부족한가?’ 나는 마음 한 켠에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 이건 일종의 보험 같은 질문이다. 사후세계의 존재를 진실히 믿지 않는다면,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기독교는 아니 된다고 말한다. 불교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는 거듭 윤회를 통해 새로운 기회, 상승과 하강의 계층 변환이 주어지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단 한 번, 지금 이 순간만이 주어졌다는 것은 영 섭섭하다. 그래서 단테 본인도 말하지 않는가. ‘지금, 주어진 이 한 번의 생이 전부라는 사실은 서늘하다.’


지옥의 제1층은 ‘림보’로, 이곳은 악하지 않은 무신론자와 세례받지 않은 유아, 그리고 예수 강림 이전의 인간들이 거한다. 즉, 죄를 범하지 않았으되 예수를 믿지 않은 인간들이 거하는 지옥이다. 그 밑으로는 죄질에 따라 지옥이 분류되고, 죄인은 그 자신이 행한 죄에 걸맞은 벌 속에서 신음한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작은 배를 타고 지옥의 아홉 층을 내려가고 있었고, 각 층에서 이름있는 죄인들과 주인공이 대화를 나눈다. 주제는 단순하다. 중요한 것은 주제의식이 아니라, 그것의 형상화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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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역의 배우들은 스킨색 타이즈를 입고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고통받는 몸을 형상화한다. 채찍 소리에 바닥에 뉘인 몸을 퉁기고, 발을 전갈처럼 세우고, 손을 위로 뻗고 등을 뒤로 구부리는 몸짓들에서 고통에 더불어 아름다움을 느꼈다. 특히 손을 뻗고 몸을 흔들 때마다, 소상히 드러나는 갈비뼈와 근육의 움직임들은 몹시 아름다웠다. 바닥을 휩쓸고 머리를 움켜쥐고 가슴을 때리는, 소위 전위적인 무용을 상기시키는 몸짓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내게 아주 귀한 경험이었다. 이제 와 생각할 때, 그 몸짓에 담긴 절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전의 서사가 죄인들의 절규와 무용에 가까운 몸짓들에 의미와 개연을 부여한 것 같았다.


죄인들의 윤무와 그 사이를 거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는 고고히 지옥의 길을 개척하고, 단테는 처음 겪는 이 상황에서 마음껏 의문하고 고뇌하고 절규하고 분노한다. “너 죄인들아. 너희는 네가 지은 죄에 따라 영원히 지옥의 불에 타오를지어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연극의 몰입력은 배우에게 큰 몫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나 중년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연극들에 거는 기대가 크다. 소위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정동환, 한윤춘, 문경희 배우의 연기는 일찍이 내가 가진 기대를 정확하게 충족해주었다. 그들의 목소리에선 응집된 힘이 느껴진다. 전달력을 키우기 위해 음량을 높일 필요가 없었던, 그들의 담담하고 곧고 명확하게 뻗어나오는 발성은 언제나 그랬듯이 쾌감을 자아낸다. 그 발성에 조화를 이루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연기에서 나는 이번 공연신청을 정말 잘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제9 지옥 코키토스의 얼음 호수 장면은 연출적으로도 기발했다. 죄인들이 얼음 호수 밑에 얼어붙은 채 모가지만 빼놓고 있는 모습을, 거울을 들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했고 그것을 저화질 핸드카메라로 촬영해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다. 포커스는 죄인들의 위쪽 얼굴과 밑 쪽에 반전된 얼굴이 동시에 포착되게끔 잡혀 있고, 거기서부터 배우들의 열연이 이어진다. 특히 죄인1 역의 안성채 배우가 보인 열연이 몹시 인상 깊었다. 속삭이듯 흐느끼는 연기를 저화질 영상에 비친 두 얼굴로 보고 있자면,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진정성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전은 역시 고전이다. 그리고 고전에는 현대적 재해석이라든지, 떠오르는 신예라든지 하는 새로운 맛보단, 익숙한 맛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발칙한 생각을 한다. 원전에 충실한 서사에 세련된 연출, 노장의 훌륭한 연기와 아름다운 몸짓의 향연, 정말이지 잘 만든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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