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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함이라는 위증

니체, 도덕의 계보 서평2

by 풍금이 있던 자리


정직이 자신의 이해 범위에서만 기능한다면, 그것이 미덕이기 위해선 너무 많은 것들이 해부되어선 아니 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밝혀져선 아니 된다. 그가 여전히 정직하면서도 온건하려면, 사람들로부터 온당히 받아들여지려면 앞서 말한 것들, 인간의 모순과 부조리를 까마득히 몰라야 한다. 그렇게 무지는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요구된다. 모르는 것들은 순수한 망설임으로 끝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전편, ‘정직에 대한 사유 - 도덕의 계보1’ 中


정직에 대한 사유, 나로서 인간의 정직에 대해 천착해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각자 자신의 정직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고 내심 각자의 그것이 올바르다고 여기게 마련인데,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 세간의 그것이 달랐기에 우리의 생각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신념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을 때, 즉 어느 하나의 참이 다른 하나의 거짓을 가리키는 구도에서 누가 옳은가의 문제는,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끝없이 떠돌게 마련이다.


나는 인간이 앞에서나 뒤에서나, 홀로 있으나 함께 있으나 일관되길 원했고 우리의 말이 적확하기를, 어제 한 말이 오늘도 내일도 일관되기를, 밖으로 쏘아낸 말이 우리 자신에게도 일관되게 돌아오기를 바라왔다, 엄정하게, 그러지 못할 바엔 기꺼이 스스로 경멸하기를. 인간이 자신의 바깥에서 인간을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이것에서 최소한의 합리성을 논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우리에게 이것은 문제적이다. 그런 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높은 수준의 엄정함과 꾸준한 긴장을 요하기 때문이며, 그마저도 온전히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거니와 열패감과 원한을 낳기 일쑤였던 까닭이다. 생이 적당한 시기에 멈추어, 중간 정산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한, 그래 그것이 끊임없는 까닭에 닿을 수 없는 이상인 것이다. 허나 정확히 말하자면 문제성은 그러한 요구 자체가 아니라, 지나친, 적나라한, 타협 불가능한, 원리주의적인 그 정도에 있다. 그것, 그러한 요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이르러 이미 ‘사소함’으로 전락해버린 딴에는.


나는 거짓말 그 자체 - 그것은 우리가 영영 자유할 수 없는 것 - 보다도 그것을 용인하고 외면하려는 사람의 자그마함, 나 자신의 그것을 도저히 인내할 수 없다. 괜찮다고 말하며 산뜻하게 뒤돌아버릴 수가, 그러므로 경멸한다. 보이는 한 거슬리는 것이고 이미 느껴진 이상 쉬이 외면할 수 있는 것도, 하물며 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건 “나쁜 공기”와 같다. 사방이 웃는 얼굴로 가득하지만 그 위의 경직된 주름과 고운 말소리 속에 똬리를 튼 반감들, 너무도 훤히 보이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감식안과 그러한 ‘인간적인’ 것들을 견딜 수 없는 타협 불가능한 나의 취향이 바로, 내 안에 샘솟는 문제적인 것들의 수원(水源)이다. 여느 그대는 이러한 나와 내 삶을 동정할 것이고, 예컨대 네 삶이 고난되고 고독하리다와 같은, 그것은 정확하다.


나는 도덕을, 다시 말해 이제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찬양되어온 모든 것을 의심한다. 이러한 의심은 나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 특유한 것이다. 이러한 의심은 나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내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너무나 일찍부터 나타났다. 그것은 나의 환경, 시대, 범례, 관습과 너무나 모순되는 것이어서 나에게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중략) 인간은 어떤 조건에서 선과 악이란 가치판단을 고안해냈는가? 그리고 그러한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떠한 가치를 갖고 있는가? (중략) 그것들은 이제까지 인간의 번영을 저지해왔는가 아니면 촉진해왔는가? 그러한 가치판단들은 삶의 위기와 빈곤, 그리고 퇴화의 징후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들에는 삶의 충만함과 힘, 삶의 의지와 용기, 삶에 대한 자신감과 미래가 나타나 있는가?

(중략) 나는 여러 시대와 여러 민족 그리고 개인들의 등급을 구별했고, 나의 문제를 세분화하여 전개해보았다. 여러 해답으로부터 새로운 물음과 탐구, 추측, 개연성이 나타났고,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의 나라와 땅을 갖게 되었으며, 침묵 속에서 성장해가는 꽃이 만발한 세계를, 즉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은밀한 정원을 갖게 되었다. 오오. 우리 인식하는 자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다만 오래도록 침묵을 지킬 줄만 안다면!

- 도덕의 계보, 니체, 아카넷, 2022, 15~16p


심심찮게 들려오는바 보통 정직의 기준이란 의도의 유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정확히 이렇게 생각한다기보다는 그들의 행태에서 엿볼 수 있는바, 사람은 자신이 의도치 않은 것으로부터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생각하고 그 생각은 자연스레 행동을 통해 드러나 버린다. 내 눈에 비친 그 정직의 기준이란 자신이 의식적으로,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늠할 때에나 동작하는 무언가처럼 보인다. 즉, 의식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많은 것, 자신으로부터 부지불식 간에 일어나는 많은 것들에 있어 인간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관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 이유에서이다. 허나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기망 자체가 아니라 모순이다. 자신에게 관대할 수 있는 자, 타인에게도 그러할 수 있었더라면 적어도 그는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리를 내재한 어떤 인간은 영영 순결한 무지자 無知者가 되어야 하며, 은연중 스스로와 타인에게 그것을 요구한다. 아직 모르는 것들과 모르기로 한 것들은 그의 의지로부터 자유롭고, 그로써 그는 자책과 자괴, 의심으로부터의 자유와 정당함의 ‘감각’을 소취할 수 있게 되는 뿐만 아니라, 오직 그것으로 영위되고 또 유지될 수 있을 만큼 허약한 사상이 그것인 까닭이다. 몇 가지 문답으로 우리는 그 사실을 유도할 수 있겠지만, 그들로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아직, 실은 오래도록, 또는 영영! ‘스스로 정당한 인간’이라는 완결되고 원환적인 세계관에 일어나는 균열은, 그 바깥의 미지와 반전으로서의 세계관, 낭떠러지와 같은 저기 경계 바깥을 두려워하는 처지로서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공포인 것이다.


허나 이 문제, 정직에 있어 의도란 하찮은 것이어야 한다. 의도는 얼마든지 가변할 수 있는 것이기에, 실패가 거꾸로 승리가 되고, 패배가 곧 겸손으로 둔갑하듯이. 의도가 목적물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더 자주, 실패한 결과가 거꾸로 의도를 만들어내기도 하며, 주어진 결과에 우리의 의도는 자주 끼워 맞춰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의지의 작용, 쉽게 말해 정신적 고난을 대비하기 위해 의지의 힘이 가미된 결과물로서의 의도 자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나, 그것이 온통 가려져 있다는 사실에 문제적 본질이 숨겨져 있음을 가리키고자 함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얼마든지 가변하는 이런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 아무런 무게도 그러므로 의미도 지닐 수 없는 것 대신,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고 어느 방향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것을 나는 원한다. 부정과 산파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리고 반드시 증명되는, 그때 마구잡이로 솟는 수치와 원한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진실을 나는 원한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해서는 영영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는 난쟁이이므로. 이성이 우리를 짐승 이상의 존재로 거듭나게 했지만, 이성은 우리를 인간 이상의 것으로 뛰어넘지 못하게 묶는 쇠사슬 같다. 의도가 다름 아닌 이성의 수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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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폭로로써, 원치 않게 드러나는 그것에서 우리는 최고 수준의 정직을 느낄 수 있다. 악인의 파멸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그대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극장과 객석에서 희열하는 우리들을 기억하나. 다만 나는 공평하기를 원한다. 선악의 문제 이전으로부터, 그러니까 선인과 악인에의 낙인과 분류 작업을 거치기 전, 그로써 우리로 하여금 마음껏 우리의 분노와 야성을 허락게 하는 달콤한 면죄부가 눈꺼풀을 가리기 이전으로부터 인간의 진실을 탐구한다. 순수하게 들통 나버리는 인간의 마음, 불편한 진실에 나는 천착해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소한 거짓들이 만연한 까닭이다. 바로 그 사소함, 치명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꾸로 그것이 만연할 수 있었음이란 나의 몹시 유감스러움이다. 뱉어진 말들 속의 사소한 결함들이 모여, 어떤 중요한 지점에 이르러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뱉어져 주워담을 수 없어진 것들을 뒤늦게 뒤돌아 볼 때, 즉 예기치 않게 찾은 불편한 진실의 시간은 결국 삼켜내지 않고 배길 수 없는 것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래 그것은 진실이 마침내 우리를 찾기 한참 전으로부터 이미 결정되어 버리던 것이다. 나아가 그런 사소함들이 일상에 가득 차면 그것이 다른 하나의 진실, 반전된 진실로 탈바꿈하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유감스러움의 본질이다. 단 세 명의 입회자의 동의, 단 세 명의 작은 인간들만으로도 사실이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었음이야말로 진정 유감스러운 지점이다, 바로 그 ‘별것 없는 사소함’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것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난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입회자들의 동의와 서로의 등을 토닥이는 두둔일 뿐, 영영 진실이 아닐 것이다. 허나 무엇이 중하랴, 우리에게 진실이 그 자신의 믿음과 동일한 한에는, 즉 의심 없는 이에겐 자기 자신이 곧 모든 진실과 하나인 딴에는. 그러나 작은 것이 큰 것을 결정한다는 경구는 이 대목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의미를 지닌다.



동정과 동정의 도덕이 갖는 가치라는 이 문제는 (나는 오늘날에 보이는 감정의 유약화라는 수치스러운 현상에 반대하는 자이다) 처음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 단순히 하나의 독립적인 의문부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단 이 문제에 매달려 그것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을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내가 경험했던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즉 어마어마하게 새로운 전망이 그에게 열리고, 새로운 가능성이 현기증처럼 그를 사로잡으며, 모든 종류의 불신, 의혹, 공포가 치솟고, 도덕에 대한, 모든 도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마침내는 새로운 요구가 소리를 높이게 된다. (중략)

그와 같은 지식은 이제껏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러한(동정의) '가치들'이 갖는 가치를 주어진 것으로서, 사실로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 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하면서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진보와 복지 그리고 번영(인간의 미래도 포함하여)에 훨씬 더 이바지한다는 통념을 조금이라도 의심해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 반대가 진실이라면?

즉 '선한 사람'에게 퇴보의 징후가 숨겨져 있다면, 또한 어쩌면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희생시키는 위험, 유혹, 독약, 마취제가 숨겨져 있다면? 아마도 현재의 삶은 더 안락해지고 덜 위험해지겠지만 동시에 삶의 양식이 더 범용해지고 더 저열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바로 도덕이, 인간이란 유형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강력함과 훌륭함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에 책임이 있다면? 그 결과 도덕이야말로 위험한 것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면?

- 도덕의 계보, 니체, 아카넷, 2022, 21~22p


진실은 때로 불쾌한 것이다. 아니, 진실은 대체로 불쾌한 것이다. 그대들의 마음속에서야 그대 모든 감정이 진실하게 여겨지겠지만, 사람들이 쉽게 행할 수 있는 말의 대부분을 진실되지 않다고 간주하는, 인과와 자격에 천착하는 이런 잔인한 시선(이것은 분명 잔인하다!) 하에서 진실이란 삼키기 좋은 알약 같은 것이 못 되다, 그러므로 잔인한 것이다. 그대의 입으로부터 달콤함을 빼앗아버리는 행위이므로. 진실이 달콤하게 느껴진다면, 예를 들어 자신의 선량함, 자신의 정직함, 자신의 도덕성이 온당하고 감미롭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의 의도 하에 스스로 기망되었다는 증거쯤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진실에 대한 개념 자체가 우리 서로에게 다르다.


예컨대는 남용되는 칭찬 대부분에 있어 우리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처럼. 그것은 순수한 감탄의 발로라기보다는 관습적인 것들이며, 칭찬을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 학습해버린 결과이자, 면피의 손쉬운 방식이다. 인간은 칭찬받지 못해 안달이 난 동물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 문제는 그 욕구 자체가 아니라 그 방식에 있다. 그때 그는 소심하고 면구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자신이 마치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양 겸손을 떨면서도 아닌 척 손을 내민다. 이것은 작은 인간들 사이에 암암리에 합의된 ‘요구의 방식’인데, 시의적절한 순간에 시의적절한 방식으로, 마치 전통 의식처럼 정확히 재현된 관습은 사람들에게 암암리 약속된 것을 요구한다.


다시 한 번 요구함 그 자체는 문제도 아니다. 그 요구, 즉 욕구가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숨겨지길 원하는 까닭에, 끝까지 아닌 척 발뺌을 해야 하는 것이 문제이고 나아가 그것을 받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원한마저 꼭꼭 숨겨야만 하는 것으로 결정되어버렸음에 그것의 문제적 본질이 있다. 인간의 무분별한 칭찬은 대부분 그 칭찬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다. 주지 않는 것이 나쁨이 되고, 그것에 어깃장을 대는 것이야말로 천인공노할 만한 것이 되어버리는 이 불편한 강요, 그리고 정당화되었기에 무분별해질 수가 있었던 조용한 원한에 의해서. 이렇듯 관습화된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오직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어이없는 상황은 이미 우리 주변에 “나쁜 공기”처럼 만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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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습은 마치 식사 예법과 같이 정형화된 표준과 같아, 얼마나 그것을 잘 따라 하느냐에 그 인간의 평가가 갈리곤 했다. 그뿐이랴, 한편 이러한 작은 인간들도 자신과 닮은 타인, 그들 사이에서 이미 정착되어 버린 기망적 정직에 대한 의심 탓에 히스테릭한 신경증을 앓고 있었으므로,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방식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것인데,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례의 순서와 방식을 잘 지키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의심의 물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즉, 그것을 진심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 것, 표정과 목소리, 몸짓의 구석구석까지 탁월하게 포장해야 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의심하는 자, 그 자신에의 관대함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의 엄격함을 강요하는 것이란… 자신의 나약함을 그 자에게 모조리 떠넘기는 것일 따름이다.


우리를 더욱 기만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하게 하는 요구, 우리를 점점 더 왜소하게 만드는 힘과, 점점 더 소외되게 만드는 원인, 나는 이 모든 수상함을 여기에서 예증한다. 예법은 점점 더 그 목록이 비대해지고 있고, 인간의 의심증은 그를 따라 커져가고 있다. 동시에 시대의 불신을 논하다니, 내가 보기에 그대는 그 돌 아래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자신이 그 돌 중의 하나이다. 문제의 원인이자 그 문제의 대상물인 인간은 점점 더 예민한 히스테릭 환자로 전락하고 있고, 스스로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 기만적인 인간이 되는 데 실패한 인간, 진심을 연기하는 것에 탁월하지 못하거나 진절머리를 느낀 탈락한 인간은 ‘도덕이라는 정당함’의 이름 아래 소외되거나 스스로 그것을 포기하고 칩거하게 되었다. 칭찬은 이런 여러 가지 인간 기망 중 이제 겨우 하나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해부된 것 안에서 인류애나 다정함보다는 두려움과 왜소함, 그리고 소름 끼치는 것들을 읽는다.


정작 인간은 그러한 자신의 기만행위를 부끄러워할 줄은 알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 경멸하고 단조하지 않은 이로서는 그 행위가 아닌 그 행위의 적발만이 문제가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할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정직, 실로 정직이란 이름에 걸맞은 진실한 이런 것은 그런 사람에게 있어 알러지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들이 도덕의 계보를 서투르게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선’이라는 개념과 판단의 유래를 탐구할 때 바로 드러난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원래 비이기적 행위란 그 행위가 고려했던 사람들, 즉 그 행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의 관점에서 찬양되었으며 선한 것으로 불렸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찬양의 기원을 망각하게 되었고 비이기적 행위가 습관적으로 항상 선한 것으로서 찬양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행위를 또한 선한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마치 그 행위가 그 자체로 선한 어떤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중략) ‘유용성’, ‘망각’, ‘습관’ 그리고 최종적으로 ‘오류’, 이 모든 것이 더 높은 인간이 지금까지 인간 일반의 특권인 양 긍지를 가져왔던 가치평가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긍지는 마땅히 꺾여야 하고 이러한 가치평가는 가치를 상실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는가? (중략)

무엇이 '좋음'인가에 대한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판단은 '좋은(탁월한) 인간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든 저급한 자, 열등한 자, 범속한 자, 천민적인 자들에 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좋은(탁월한) 것'으로서, 즉 최상의 것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자, 강한 자, 드높은 자, 고매한 자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에서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의 이름을 새길 권리를 비로소 획득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공리라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공리의 관점은 위계를 정하고 위계를 분명히 하는 최고의 가치판단이 뜨겁게 용솟음치는 곳에서는 극히 낯설고 부적절한 것이다.

이 경우 이 감정[거리의 파토스]은 온갖 타산적인 영리함과 공리 계산의 전제가 되는 저 미온적인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번만 그렇다거나 예외적인 순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그렇다. 고귀함과 거리의 파토스, 즉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더 높은 지배 종족이 더 낮은 종족인 '하층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면서 지배적인 전체적 감정과 근본적 감정, 바로 이것이야말로 좋음[탁월함]과 나쁨[저열함]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지배자가 갖는 명칭부여의 권리는 너무나 강력하여 언어 자체의 기원을 지배자의 권력 표현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들은 '이것은 이러저러하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사물과 사건 각각을 하나의 소리로 봉인하고 이를 통해서 그것을 소유해버린다.)

따라서 '좋음'이라는 용어가 저 도덕 계보학자들의 미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비이기적 행위와 결부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은 이러한 기원을 고려해 볼 때 분명하게 된다. 오히려 이러한 '이기적'과 '비이기적'이라는 전체적인 대립이 인간의 양심을 갈수록 더 짓누르게 되는 것은 귀족적 가치판단의 몰락을 계기로 하여 비로소 일어난다. 이러한 대립과 함께 마침내 발언권을 얻게 되는 것은 - 내 용어로 표현하자면 - 무리 본능이다. 이 경우에도 무리 본능이 지배하게 되면서 도덕적인 가치평가가 저 대립[’이기적'과 '비이기적'의 대립]에 매달리고 고착될 때까지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도덕적인 가치평가가 저 대립에 매달리고 고착되는 현상은 예를 들면 오늘날의 유럽에서 뚜렷하게 보인다. 오늘날의 유럽에서는 ‘도덕적’, ‘비이기적’, ‘사욕 없는’을 동일한 가치를 갖는 개념들로서 받아들이는 선입견이 이미 ‘고정 관념’이나 정신이상처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 도덕의 계보, 니체, 아카넷, 2022, 33~36p


이러한 집단 상황과 무리 본능으로부터 스스로 깨치고 솟아날 힘이 없는 개인은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내면화해야 한다. 불편한 것과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다고. 집단에 편입되거나 하다못해 집단으로부터 심판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안으로부터 그 개념 자체를 바꾸게끔 하는, 민중과 대중 사이를 횡행하는 소리 없는 소문이다 그것은. 침묵은 왜소함이나 굴욕이 아닌 다정함이고, 이러한 다정함,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마땅한 것이며, 그로써 올바른 규율을 내재한 한 마리의 정당한 인간으로 점차 우리는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강요된 것으로부터 스스로 동의한 것으로 변모된다.


돌십자가에 깔린 인간이 또 다른 돌 십자가가 되는 것. 그러나 십자가가 쌓여갈수록 우리 이후의 시대 인간이 버텨내야 하는 무게는 그 얼만 하겠는가. 혹은 어느 임계점에 이르러 드디어 이 모든 짓누르는 힘을 버텨내지 못해 포기하는 인간들이 속출함에 따라, 그리고 그것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함에 따라 또 다른 집단적 힘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일전과 정반대 방향의 힘, 반동적 힘이 대두할 것인가! 비록 내가 그 반동적 인간이긴 하나, 그것은 위험하다.


허나 이쯤 미리 짚어두자면 나는 이 보드라운 규율과 조용한 강요, 즉 도덕을 전적으로 부정하여 마치 그것은 없어지는 편이 나으며 우리가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만이 진정 자유를 위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필요악 같은 것이되 언제나 중한 것은 과잉과 넘침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타인이 되었다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는 아이로부터 연기자가 된 다음에나 참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고, 그것은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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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런 불편한 상황을 유발하는 불청객, 나와 같은 인간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적나라함에 대한 증오는 정작 아닌 척 손을 내민 그 사람보다, 그 주변의 ‘선량한’ 사람들로부터 쏟아지곤 하는데, 그 이유는 ‘선량한’ 인간들에게 이러한 개념 전도가 깊이 내면화되어 스스로 그것의 주체이자 수호자가 되어버린 까닭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에겐 증오마저 앞서와 똑같은 이유에서 정직한 것일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증오는 그 주체자가 아닌 타인의 손을 빌려 행할 수 있는 소극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그를 통해 그들의 연대의식은 한층 강화된다. 얼마나 고마울 것이냐, 얼마나 커다란 안도감을, 다정함과 ‘선함’을, 이타적 힘으로 가장한 무력한 자의 안도감을 느끼고 서로 찬양하고 싶을 것이냐. 자신의 증오를 내비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칭찬하지 않는 그 소극적 행위에 비하자면 훨씬 무도한 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타인의 증오를 대변하는 것만이 히스테릭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꾀해봄 직한 정의로운 일이다. 타인의 증오에 대신 목소리를 내는 것만이 그들에게 허락되어 있다. 그러나 그 증오 속에서 그들의 인간적인 본래 모습, 동물적인 본능의 속삭임을 우리는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다.


겨우 몇 예시만으로도 이제 완전히 알게 되었듯이, 진실에 대한 개념 자체가 우리 서로에게 다르다. 예컨대는 사소한 흠결을 그저 덮어두려는, 인간을 두둔하는 말들 대부분에서 우리의 의견이 충돌하는 것처럼. 진실은 특히 이 지점에서 자주 그 빛을 잃어버리곤 하는데 두둔을 청하는 것은 말 그대로 나약함일 뿐이며, 그것을 주는 것은 환심을 사고 원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 나약함에 대한 찬동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나약함 자체를 탓하지 않는다. 인간의 심력이 새끼 사슴처럼 가녀리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것의 기망됨이 끝 모르고 첨예해지매 생겨나는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들이다. 그것에 신물을 느낄 뿐이다.


그에 덧붙여, 사람들을 감각을 적대시하고 게으르고 섬약하게 만드는 성직자들의 형이상학 전체와 이슬람교 성직자와 브라만 승의 방식에 따르는 자기최면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근본적인 치료법인, 무 無 (혹은 신, 신과의 신비적 합일에 대한 열망은 무, 즉 열반을 향한 불교도의 열망일 뿐이며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에 의한 최후의 너무나도 당연하고 전반적인 포만 상태를 생각해보라.

성직자들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더 위험하게 된다. 치료제와 치료술뿐 아니라 오만, 복수, 명민함, 방품, 사랑, 지배욕, 덕, 병을 비롯한 모든 것이 더욱 위험하게 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공정함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렇게 본질적으로 위험한 인간의 존재 방식, 즉 성직자적 존재 방식의 토양 위에서 인간 일반은 비로소 흥미로운 동물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좀 더 높은 의미에서 깊이를 갖게 되었고 사악하게 된 것이다. 이것 [깊이와 사악함]이야말로 정녕 인간이 이제까지 다른 짐승들에 대해서 지녀온 우월함의 두 가지 형식이다! 34)


* 34번 주석) 인간의 영혼이 깊이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내면화와 연관이 있다. 성직자적인 가치평가가 지배하게 되면서 인간은 성욕이나 소유욕과 같은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불순한 것으로 보고 그것들과 투쟁하는 내면의 싸움에 몰두하게 된다. 원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사냥을 비롯한 갖가지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외부로 분출해야 하지만, 이제 인간은 그 에너지를 자신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인간은 자신을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단죄하면서 고통스러워한다. 이러한 현상은 동물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전통 형이상학이나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내면화를 인간이 동물 세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보면서 긍정적으로 본다. 이에 반해 니체는 이러한 내면화와 함께 인간은 동물적인 건강함을 상실하고 병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본다.

니체는 성직자적 가치평가가 지배하면서 인간이 또한 사악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7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니체는 기사적인 귀족계급은 정직하지만, 성직자들은 교활하고 위선적이라고 본다. 기사적인 귀족계급은 자신이 설령 전투에서 패배했더라도 자신의 역량이 부족해서 패배했다고 인정하며,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적을 존경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성직자적 귀족계급은 회의 지배자들을 다른 인간들을 억압하는 악한 자들로 단죄하면서 자신은 민중을 사랑하는 선한 자들로 자처한다. 그러나 이들도 사실은 기사적인 귀족계급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권력을 갖고 싶어한다. 이 점에서 이들은 위선적인 자들이다. 또한 성직자적 귀족계급은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라는 식의 거짓말로 민중을 선동하여 기사적인 귀족계급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자신들이 지배자가 된다. 니체는 성직자적인 귀족계급이 보여주는 이런 식의 위선과 교활함은 동물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사악함이라고 본다. 또한 니체는 성직자적 귀족계급이 보여주는 이러한 사악함을 사회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이 이어받고 있다고 본다.

- 도덕의 계보, 니체, 아카넷, 2022, 44~48p



집단 의식인 그것, ‘사소한’ 흠결에 대한 그들의 사고방식은, 예컨대는 적당하게 덜어낸 질투와 적당하게 덜어낸 미움, 허영, 교만쯤을 스스로 생각할 때,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작음을 스스로 축출할 바에는 다른 사람 속에서 발견코자 하고, 발견한 다음에는 연결되기를 소망한다. 그 집단의식이 그들의 정당성이고, 연결을 위한 시도가 두둔 행위이다. 두둔함이란 그대의 작음이 나의 것과 다르지 않고, 그대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달래주는 일이며, 그러므로 닮은 사람들끼리 서로의 이마에 성호를 긋고 입을 맞추는 행위이다. 난쟁이들의 고해성사 같은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목자는 없고 오로지 양 떼뿐이었다. 양 떼는 더이상 목자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머리 위에 서 있는 모든 것을 끄집어 내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해류 속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 만큼 심지 굳은 인간은 그 얼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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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식이 얼마나 뼛속 깊이 박혀 있는지, 마치 자신을 두둔하지 않는 것을 적대 행위라고 인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 나머지 그러한 ‘선량한’ 동료의식을 줄 수 없는 사람, 자신과 다른 사람 및 강인한 사람에게서는 본능적인 배척감을 넘어 적대감마저 품곤 했다. 그리곤 작은 인간의 부족으로 돌아가 그 사람을 죄책 없이 음해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겠는가, 무엇이 사람을 이처럼 저열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는가. 다름 아닌,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그대 안의 작음이 아니던가? 그대도 본능적으로 자신의 작음을 알고 있는 딴에, 그것을 괜찮다고 서로 두둔하는 것이야말로 이것을 방치하고, 나아가 그것의 몸집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작은 인간의 부족 안에서 평온과 자유, 해방의 감정을 체험하고 그로부터 ‘선’을 느낀다. 그리고 그 느낌 위에 ‘선’이라는 개념을 덧댄다, 발명한다. 그대로서는 스스로 이것을 떨쳐 땅에 내팽개칠 수 없는 딴에는 나의 말을 도무지 머리로 이해하기는커녕,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해방되는 것이 무엇으로부터인가? 산속에 사는 짐승에 대한 두려움인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떨치고 호령하는 강한 인간들에 대한 두려움인가, 아니, 그대 자신이 감내하지 못한 온갖 나약함들에 대한 자각으로부터이다. 자각과 우울감, 그것을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정말이지 그것조차 스스로 할 줄 모르는 ‘퇴화한 인간’은 끝없이 타인이라는 자장가를 갈구해야 한다. 자장가 없인 잠에 들 수조차 없게 된 불면의 인간들. 그러나 다시 한 번 문제는 이러한 요구 자체가 아니라, 그 요구 뒤에 깊숙이 가려진 수치와, 그로 기인하는 무분별한 원한이다.



그대는 나약할 때, 그대의 자각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대체 얼마나 휴식을 취한 다음에야 우리는 스스로 일어서려 할 텐가. 혹 나른한 잠의 촉수가 우리를 끝없는 나태와 외면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아닌가? 세상은 어느새 “괜찮다”라는 낱말이 범람해 온 사방에 가득 차 있다. 이것이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괜찮다’는 말을 필요로 한 나약한 개개인의 요구와, 그 요구의 대중화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문단과 잡지를 장식한 ‘괜찮아’ 유행으로부터 시작해 이제는 당연한 것, 불문율로 정착되어버렸다. ‘괜찮다’라는 위안의 말은 희구되는 것으로부터, 당연히 요구되는 것으로 그 너비를 확장하였다. 이제 ‘괜찮지 않다’라는 말은 쉬이 좌시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버림으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이 나선 위에서 히스테릭 신경증을 앓으며 점점 왜소해질 수밖에 없겠다. 그들의 감정은 모조리 소외되고 있고, 서로의 감시 하에 너무 손쉽게 죄악시되고 있었다. 그들은 칭찬받기 위해, 두둔받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감정들을 적당하게 덜어내 적절한 모양으로 빚어야만 하고, 덜어내고 남은 것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 추방된다. ‘적당’하고 ‘적절’히 꾸며낸 감정만이 허락되고, 오직 슬픔만이 그들에게 허락된 그 자체로 적절한 감정이면서도, 그것을 일시에 쏟아내는 것은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선량한 사람들 사이에도 부담스러운 것이고 부담스러움은 나쁜 것, 미움을 되받아도 전혀 이상이 없는 당연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의 연쇄를 추적함에 따라, 우리는 이 모든 기망의 본질을 알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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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바로 성직자적 귀족사회에서 가치평가의 대립이 왜 그렇게 일찍 위험한 방식으로 내면화되고 첨예화될 수 있었는지가 본질적으로 성직자적인 귀족사회의 전체적인 성격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그리고 사실상 이러한 가치평가의 대립 때문에 마침내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자유정신의 아킬레우스조차도 전율하지 않고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한 성직자적 귀족주의와 그것을 지배하는 행동 기피적이고 부분적으로 침울하며 부분적으로 감정을 폭발하는 습관에는 처음부터 건강하지 못한 것이 있다.

- 도덕의 계보, 니체, 아카넷, 2022, 44p


그러나 우리가 추방한 감정들은 먼지처럼 쌓인 뒤 스스로 산화될 수 있는가. 그대들이 암암리에 규정한 ‘나쁜’ 감정들은 여전히 그대의 가슴 안에 준동하매 잔뜩 어지러워져 있다. 허락되지 않은 감정에 대한 죄악감, 실은 추방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기인한 불안과 보드라운 억압에 대한 무의식적 반감, 또한 허위에 대한 구토감과 동시 그 안온함에의 희구가 그대 안에 모순처럼 휘몰아치는 딴에, 이제 그대는 무엇이 두려움인지 스스로 알아차릴 수 없다. 여전히 그대 안에서 샘솟은 다음 갈 곳을 잃어 방황하는 온갖 ‘나쁜’ 감정, 기피해 마땅한 것으로서 개념화된 온갖 인간적인 것들과, ‘선량한’ 인간들의 세계로부터 허용되지 않는 온갖 야성들이 그대들을 사납게 만들고 있다. 존재하나 허락되지 않는 감정들이 그대를 날카롭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누구인가, 그대들의 증오와 적의는 바로 그대들이 스스로 배척한 것이다.


아- 정당함과 선량함을 자처하는 온순한 인간들로부터 얼마나 무도하고 잔인한 공격성이 표출될 수 있었던지, 우리는 그것을 익히 기억하고 있다. 위험한 감정은 그대들 사이에서는 조금도 허락되지 않기에 유배자들, ‘선량함’이라는 울타리 바깥의 인간들, 공동체의 바깥, 완전한 ‘타인’에게만 허락되기 십상이다. 그들은 그대가 원하는 ‘나약한 사랑’을 줄 수 없는 인간들이며, 그대의 ‘정-당한’ 자격을 평가하지 않거나 그럴 수 없는 무가치한 인간인 딴에, 재고를 필요치 않는 무용한 인간으로 개념화된 까닭에 그대로부터 아무런 두려움을 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예의는 공포로부터 오고, 공포를 잊어버린 인간은 점차 괴물이 되어가고 만다. 그대를 위해 마련된 온갖 서사와 허구 속의 존재, 대적자들의 예시이고 이것이 그들의 존재의의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선량함이라는 탈을 쓴 채로 점점 더 잔악해졌다. 겸손을 가장한 허영, 정의를 가장한 증오, 두둔을 가장한 나약함. 이 모든 것을 하나로 꿰차는 것인바 선량함이라는 위증에서 나는 심각한 악취를 느낀다. 그것이 작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들의 생존전략이다. 그러나 보라, 지금 누가 세상의 기준이 되었는지. 누가 승리하였는지! 어느새 사방이 그것으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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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이러한 인간 감정이 내포하고 있는 흠결을 ‘사소함’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쯤 되면, 이런 사소함들에 말 그대로 천착하고 낱낱이 해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몹시 불쾌함과 원한을 느끼실 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사소함’으로 말미암아 마음 깊숙한 곳으로 내팽개쳐둔 것이 스스로 감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이미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이었으나, 외면한 것들이 저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그대는 내게 묻거나 따지지 말고, 그대 스스로에게나 물어보라.


유사 이래 이러한 위증이 우리만의 문제겠는가, 천만에. 같은 것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느낌의 공유 그것을 증거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쯤이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 정당화야말로 이성이 지니고 있는 설계상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놀라울 일도 아니지만, 문제는 그러한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탱하는 기만이 점점 첨예화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가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 가면이 현대화됨에 따라 점점 더 엄격한 수준을 요구하며 우리 스스로의 목을 졸라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고 보면 이전 시대의 그것에는 엉성한 구멍들이 잔뜩 나 있었다. 어쩌면 그때는 모든 저열함을 대속해줄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엉성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죽어버린. 그에 비추어 볼 때 작금의 상황이란 바로 신 이후의 인간세대가 겪어야만 하는 것들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신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가할뿐더러 무가치한 일이다. 한 번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반복되기 마련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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