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낭만적인 개소리 리뷰
밤은 길어진 만큼 일찍 다가와 있었다. 6시가 겨우 지났거늘 벌써 내린 이른 어둠 속에 서강대 교정을 밟아 지났다. 처음 보는 곳이었고, 전형적인 대학로 가로등 불빛 아래로 대학생들이 지나다녔다. 그 모습들에 괜한 웃음이 흘러나는 한편, 나이답지 않게 주책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겨우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오늘의 연극은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덕분에 교정 구경도 하고, 그리운 옛 생각도 나고 참 좋았다. 학교 안에 극장이 있다는 건 참 부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극장에 이르기까지의 싱그러운 감상관 달리, 오늘 연극은 노조의 굴뚝 농성을 다룬다. 그러나, 그러므로 대학교라는 장소가 적절하다 생각했다. “낭만적인 개소리”, 그야말로 대학의 교정과 대학생에게 걸맞은 낱말이 아니인가. 맥주에 은은히 취한 채 밤을 새워 뱉어낸, 지키지 못한 약속들과 아직 세상을 모른 채, 뱉어댄 개소리들이 참 많았다. 그땐 내가 뭐라도 할 줄 알았지, 근사한 걸로다가.
무대에는 커다란 굴뚝 위에 전형적인 시위용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그 위에 노조 지부장 ‘고진웅’과 ‘허수인’이 선 채로 무대가 밝아온다. ‘비정규직 철폐, 노동 삼권 쟁취’라고 적힌 익숙한 붉은빛의 조끼를 양손에 들고선 허공을 향해 휘두른다. “미래 자동차, 홍성호. 복! 복! 복!” 홍성호는 함께 농성을 시작했으나, 얼마 전 지상으로 내려간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홍성호는 엽기적인 사내였다. 철권 게임의 마스코트 캐릭터인 헤이하치를 닮은 머리 하며, 유달리 촌스러운 아저씨 선글라스와 빨간 ‘마후라’를 두른 그는 왠지 모르게 시종 의기양양해 보이고, 입가에 걸린 미소는 좀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다. 그는 로보트 태권 V의 주제가에 맞추어 율동한다. 이건 그를 상징하는 주제곡이고, 머리 아닌 몸만 커버린 듯 어딘가 천진난만한 그와는 썩 잘 어울리긴 했지만,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태극권을 상기시키는 몸짓을 하며 무대를 휘젓고 다닌다. “축지법과 비행술”을 연마한다는 것이다. 운신의 폭이 넓지 않은 75미터의 굴뚝 위 좁은 난간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몸에도 좋지 않지만 마음에도 좋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고공 농성 370여 일 째, 노동자들은 까마득하고 좁은 공중에 갇힌 채, 눈비와 계절과 추위에 몸과 마음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연극은 사측의 일방적 해고 통보에 따른 노동조합의 파업 시위, 그중에서도 굴뚝 농성을 다루고 있다. 75미터 굴뚝 위 420일 동안의 고공 농성이라는 소재는 파인텍의 일화를 참고하고 있는 듯하고, 회사의 부도와 은밀한 매각 시도 그리고 노동자를 향한 손해배상 소송이라는 소재는 쌍용자동차에서 그 사례를 참고하고 있다.
지부장 ‘고진웅’은 농성이 1년이 넘은 시점으로부터 마음이 꺾이기 시작한다. 함께 농성을 시작한 홍성호의 죽음도 한몫했을 것이고, 비와 열사를 피할 차양이 없는 환경에서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무엇보다 1년이 넘은 장기농성에도 불구, 지상의 동지들이 아무런 성과도 보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인 이상, 극한 환경에 몰리면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제 포기하겠다는 ‘고진웅’을 그러나, ‘허수인’이 말린다. 이 정도 시련은 이미 예상했으며, 아무런 소득도 없이 내려가 버리면 지금까지의 투쟁이 물거품이 된다고 말하는 그에게서는 어떠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상적 인간의 면모가 돋보인다. 그런 허수인에 대조되는 인간 고진웅의 절규는 더없이 이해되었다.
일주일이 지났나, 사측으로부터 협상 소식이 들려오고 두 사람은 영웅처럼 지상으로 내려온다. 각종 매스컴과의 인터뷰가 잇따랐고, 마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감개무량한 소회를 풀어헤친다. 그러나 사측은 곧장 말을 바꾸어 전체 파업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노조원들은 공포와 불안에 흔들리기 시작하고, 지부장인 ‘고진웅’은 이내 완전히 의지를 상실하곤 사측의 압박에 굴복하고 만다. 노란 봉투 법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연극이 한창인 와중, 한때 매일 붙어 다니던 절친한 친구를 생각했다. 그는 시민 신분으로도 민주당 당적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노동 투쟁이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의 연대에 관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에 반면 나는 천성이 염세적인 동시에 보수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사회 문제에 있어 우리의 의견은 대부분이 엇갈리곤 했다. ‘노란 봉투 법’만 해도 그렇다. 그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면서, 사회가 조금씩 진전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하는 한편, 내 입에선 소위 신문의 경제부에서 볼만한 주장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미국발 관세전쟁 여파 하에 국가 GDP 성장률이 어떻다느니, 하청에 재하청 업체까지 모조리 원청과 협상을 하게 되면 경제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따위의 말들을 의식 없이 뇌까렸다. 그럴 때마다 그는 빙긋이 웃고는 대화 주제를 돌려버리곤 했다. 나는 그와 토론을 했으면 싶었지만, 내가 모르는 것을 그가 알려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많은 이야기가 그 침묵 뒤로 삼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떠했을지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노란 봉투 안에 무엇이 담긴 지 모르는 채로, 피상적인 뉴스만 접한 상태에서 내 의견을 공고히 하였던 점, 그리고 얄팍한 사실을 토대로 하는 이런 공고함이란 그에 대립하는 처지로서는 풀어내기 어려운 벽과 같이 단단하고 막연하게 생각되었으리라는 것을. 그 노란 봉투라는 범박한 소재가 특별한 상징을 갖게 된 경위와 그 봉투가 향하던 사람들의 무력함과 불안을 몰랐다는 사실을, ‘너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라는 사실을 연극은 자연스레 들춰내고 만다. 거기에 얽힌 사연들을 몰랐다는 것엔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세상 모든 이야기를 나의 몸과 피부의 그것처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러나 몰랐음에도 신중하지 못했다는 점, 몰랐음에도 ‘대충 알 만하다’는 식으로 시건방을 떨었던 것에 대해서는 조금, 아니 그보다는 더 부끄러웠다.
노조 지부장 ‘고진웅’을 연기한 ‘성노진’ 배우의 연기는 놀라울 정도였는데, 1열에 앉아있는 내 바로 앞에서 닭똥같이 커다란 눈물을 볼 위로 떨어뜨리며 객석 너머를, 그에게 닥친 암울한 미래를 응시하는 대목에서는 완전히 두 손을 들었다. 주연 배우인 그가 자아내는 호소력과 흡인력이 나를 그들에게로, 그러니까 사회 문제에서 내가 속했던 반대쪽 진영으로 속절없이 끌어당겼다. 비단 이런 사회문제에 국한치 않더라도, 기존에 고수하던 입장에 정반대되는 태도를 간접 체험하는 것은 언제나 전율할 만한 일이다. 그게 연극이든 르포든 다큐멘터리든 간에,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재구성하는 모든 작업물의 목표이자 가치가 아닐까 생각했다. 말인즉 이쯤 되어 완전히 설득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얼마든지 끌려가도 좋으니 나를 이렇게 감상적인 채로, 그들의 입장에 폭 담가버린 채로 연극이 대미를 장식했으면 했다. 나는 그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성노진이 내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세계에 젖어있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하지만 연출상의 아쉬움이 나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한때 지부장이었던 고진웅의 변절, 사측의 압박에 굴복하고 다시 채용되었으나 사측은 잔인하게도 그를 인사팀장으로 앉힌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구조조정으로 내모는 장면들은 이 극의 위기부이다. 동료들이 배신감에 치를 떨고, 누군가는 생을 마감했으며, 함께 투쟁했던 아내는 떠나간다. 고진웅은 내적으로 갈등하고 변절을 후회하며 무너지기를 반복하는데, 그때 이 장면 위를 따라 흐르는 가사 없는 배경음악이 내 의식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음악은 나른하고 무기력한 노란 빛을 상기시키는데, 말하자면 위로와 위안의 순간에 어울릴 법했다. 그러나 그때 고진웅의 내면은 거듭되는 혼란과 좌절로 무너지고 있었으므로, 장조로 이루어진 나른한 선율과 어우러들지 않았다. 그의 처절한 연기 위로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지부장에 대한 배신감으로 끝내 생을 마감한 청년의 장례식 장면에서, 눈물을 연기하는 연기자에게서 눈물 대신 로보트 태권 V의 주제가가 흐르는데, 서러운 듯한 목소리로 그 주제가를 부르는 것이 오히려 내 의식에 마지막 균열을 가한다. 물론 이 로보트 태권 V라는 소재와 장례식 장면의 대사는 원작인 ‘축지법과 비행술’을 따라가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전부 거두어들이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건 관객으로서 원작을 존중치 않고 작품에 과도하게 개입하려는 꼴이 될 것이다. 세상엔 관대한 관객들이 더 많겠지만, 그럼에도 차회 무대에서는 이 부분을 직접 가창이 아닌 녹음본으로, 무대 스피커가 아닌 핸드폰 음량 수준으로 대체하면 어떨까 한다.
몰입은 마음대로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아쉽게도 내 의식은 무대 바깥, 객석으로 튕겨 나오며 다시금 극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한다. 사측의 인물로는 미래 자동차 사장과 그의 심복인 ‘본부장’이 등장하는데, 몰입이 깨져버린 뒤 냉정해져 버린 눈길엔 ‘본부장’의 캐릭터 설정이 편파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전형적인 권선징악 소설에서의 악당 같다고나 할까. 현실에서 그런 일이 왜 일어나지 않겠느냐마는, 어쩌면 더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만, 조직원의 구조조정으로 고진웅을 내몰기 위해 압박하는 장면과 조합원의 살해 혐의를 고진웅에게 뒤집어 씌우는 장면에선 조금 더 싸늘하고 냉담하게 연기해도 좋을 것 같다. 사측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돈과 자신의 안위만을 우선시하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묘사하는 것에는 냉소적인 무시와 싸늘함, 비인간적일 정도로 이기적인 면모를 선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오히려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눈을 부라리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설정은 나 같이 삐딱한 관객에게는 편파적이라는 인상을 낳을 수도 있는 셈이다.
비판은 여기까지. 열심히 무대를 구성한 극단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이 들지만, 커다란 애정에 뒤따르게 마련인 미련과 아쉬움으로 읽어주었으면 한다. 극의 제목을 환기하는 것으로 리뷰 마무리한다. 인사 팀장으로 변절한 고진웅에게 조합원들이 묻는다. 같이 싸우고 이겨내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함께 약속하고 믿었던 것을 잊었느냐고. 이에 고진웅은 답한다. 그건 내가 몰라서 그랬던 거라고, 회사도 정부도 이 세계 전부가 이토록 싸늘하고 냉철한지를 몰랐기에 할 수 있었던, “낭만적인 개소리”였다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그 당시 대법원은 쌍용자동차 노조에 11억 원을 지불하라고 선고했을까. 그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비정한가. 정당하다면, 시설을 불법 점거한 노조만의 책임일까, 아니면 그 사람들의 존재와 가치를 무시한 사측의 은밀한 떠넘기기에 그 책임이 있을까. 그러니까, 그건 낭만적인 개소리였을까, 아니면 자격과 당위성이 있는 구호였을까. 나는 아직 답을 내리지 않기로 한다.
그건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다. 이전이었으면 완전히 다른 대답을, 그것도 굳은 믿음으로 대답하였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엔 노란 봉투 하나가 들어왔고, 앞으로 누군가 내게 그러한 사안에 대해 물을 때마다, 이전과 다른 대답이 나오게 될 것임을 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며, 과거와 조금 달라진 내 생각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이 연극을 발견하리라 믿는다. 오늘의 공연일기, 끝.
https://www.youtube.com/watch?v=ikoqKbYDBH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