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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강함과 약함

한 몸으로, 두 왕을 모셨지

by 풍금이 있던 자리


남양주에서 석계로 넘어오는 버스 안에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약발을 믿고 너무 세게 달린 것일까. 아마 그저께 늦게 잔 피로에 더불어, 어제도 조금은 늦게 잔 탓이다. 버스를 내린 시각은 5시였다. 해가 아직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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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버스에서 내리니, 내가 가장 싫어하는 늦은 오후 햇발에 눈이 부셨다. 나는 이 시간을 싫어해, 왜냐하면 그건 내 아버지의 시간이거든. 명멸하기 시작하는 햇빛을 석양이라고 부르지만, 내게 그건 상실과 방황의 시간이야. 지금 같은 겨울 석양이 내리쬐던 때, 어린 나와 내 누이동생은 갈 곳이 없었거든.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없으면서도, 걸어가야만 했던 시간이야.


젠장, 또 시작이구나 생각했다. 잠에서 깨 눈을 뜬 나는 약해져 있었다. 내 마음이 땅에 떨어지고 노랗게 무른 사과처럼 해져, 모든 것을 감상적으로 ‘느끼게’ 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나는 이 순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느낌’이 ‘해석’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느낌’이 ‘해석’을 지배한다는 것마저도. 이 순간은 어제까지 내 영혼의 전부였던 이성이 힘을 잃는 시간이다. 오래도록 켜켜이 쌓아온 모든 논리, 나를 강하게 해주었던 전부가 ‘감정’ 앞에 녹아내리며 아무 반응도 일으킬 수 없는 심장의 시간이다.


이성이 점유한 채 강인함으로 무장해, 무심히 젖혀버릴 수 있던 온갖 감상들이 나를 걷잡을 수 없이 사로잡는다. 강함, 탁월함, 훌륭함을 ‘느낄’ 수 있던 어제와 그로써 그것에 좋음이라는 ‘해석’만을 알 수 있던 나는 한순간 지도에서 사라진다. 강함은 부드러움이 되고, 탁월함은 고요함이 되며, 훌륭함은 평화로움으로 되자리 잡는 순간이다. 왕좌의 지배자가 갈아 치워지는 순간. 내 안엔 익숙한 것들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더는 그것이 예전처럼, 나를 가누지 못할 만큼 휘두르지 못한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하는 동시에 슬픔을, 바다 같은 슬픔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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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함이 걷힌 심장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은 다소곳한 것이 되어 있다. 다름 아닌 내가 다소곳해진 까닭이다.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할머니를 향하는 나의 마음이 다정하고 측은하고 약해져 있음을 느끼면서, 강함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내가 강함을 바라던 것은 내가 약한 동시에 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모든 감상, 감정의 사정이 나 자신을 완전히 점유한 채, 나른하게 머무르려 하기 때문이다.


허나 언제나 ‘느낌’은 ‘해석’에 선행한다. 무엇을 느끼는가가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낳는다는 것. 우리의 해석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한 각자의 사유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의 연장선이라는 숨겨진 사실은 허망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믿음을 의심하게 되지. 왜냐하면 믿음이란 완전한 것이니까. 한 가지 느낌만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그 느낌만을 알고 그것을 세상의 전부라고 여길 수가 있으니까. 그것이 그 사람의 내면의 전부이고 모순 없는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그로써 자기 해석에 대한 원환적인 믿음, 온전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어제까지 내가 지향하던 강함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대결과 의지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조금은, 약함이 필요하다'는 생각. 나는 까닭 없이 겸손하게 낮아지길 바라기 시작했고, 그 결과 다정해져 있었다. 누군가를 보듬고 어루만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누군가에게 위안의 손길이길 바라는 진심 어린 생각, 다정한 평화 속에 잠기고 싶다는 갈망.



눈매는 서글프듯 힘없이 아래로 쳐진다. 어제까지 확신에 찬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것에서 좋음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눈길로 세상을 거닐 수 있었다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힘의 작용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 형형했던 눈초리가 향했을지 모를 저 할머니와 행인들을 향해, 허락받지 않은 투사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연민과 공감이, 합일과 만찬과 평화의 공상이 샘솟는다.


다정함이 약함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힘찬 쾌활함이 강함에서 온다는 사실도.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약함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고 강함도 마찬가지니까. 어쩌면 그건 이성과 의지를 기준으로 한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건 모두 오해일 뿐이다. 한 가지 느낌 속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는 것일 뿐. 약함에게 정력적인 진군과 정복의 기쁨을 명할 수 없는 것처럼, 강함에게 허물어지듯 낮게 되는 기쁨을 알릴 수 없다. 왜냐하면 내게 이러한 강함과 약함의 전환은 꽤 자주 일어났고, 그러므로 나는 내 몸으로 두 왕을 섬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만 나는 두 가지를 알되, 동시에 알지는 못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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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에 대한 해석이 이성이 아닌 심장으로부터 나올 때 그것은, 어제까지 나를 지탱하던 빛나는 이성의 월계관을 그 뿌리부터 갉아 먹는 달콤함이다. 나는 조금 나른하게 있었다, 잠기는 듯이 그저 바다가 흐르고 범람하도록. 왜냐하면 이 감상, 어제까지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면서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의 홍수는, 그 반전의 기적적인 특성과 진솔함을 근거로 삽시간에 나를 점유하고 그것을 열렬히 믿게 하지만, 그래 마치 소설 속 회개하는 인물들처럼, 그러나 나는 이 순간을 또한 수없이 지나왔고, 내일 잠에서 깨 심력을 회복한 심장이 어제와 똑같은 것을 뱉어내기 시작하며 내가 저절로 돌아갈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슬펐다.



내가 약함에 머무르며, 그 안에서 다소곳이 조용하게 살 수 없다는 것도.

내가 강함에 머무르되, 그 안에 영원히 거하며 다스릴 수 없다는 것도.


그래서 나의 세계는 애초부터 흔들리게,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듯 마구 흔들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강함과 약함을 모조리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로써 두 가지 세상을 몸소 누릴 수 있었기에, 어느 한 가지로서 완결된 세상에 정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강함을 알면서도, 약함을 앓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약함을 알면서도, 강함을 숭상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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