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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한 사람들

아트인사이트 오프라인 모임 후기 - 지연, 효주

by 풍금이 있던 자리



이내 그녀들은 힘 빼고 편안한 글을 써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딱 전형적인, 일종의 쓰여진 각본 같은 대화의 흐름이었다. 말하자면, 큰 사건이 없는 한 천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것들. 마치 소설의 대부분을 이루는 자연스러운 대사들 같이… 그러던 와중 L(지연)이 특유의 수구래하고 커다란 눈을 말똥히 뜨곤 약간 갸웃거리는데, 좌우로 번갈아 고개를 모로 갸우뚱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건 그녀의 특이점이다. 말 없이 보았다, 이런 건 말 없이 보아야 하기 때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는 것으로 봐선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런 걸 좋아한다. 자연스러우면서, 솔직한 것들. 소설에 이어, 이젠 만화 같다고 생각했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그녀의 눈이 ‘그냥 몸에서 힘을 빼면 되지 않아?’ 라고 입을 대신해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것을 이미 자신의 글과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하면 오해할 법하지만, 딱히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실은 넘어져 땅에 철푸덕거려도, 그렇게 좌중이 웃음을 터트려도 잠깐만 수줍어하곤 이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툴툴 털고 곧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탄력성을 본다.

- [에세이] 내 별명은 테토녀



나는 강한 인간을 사랑한다. 다정함으로 말미암아 유약해진, 또는 그 반대의 과정으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선 고통인 것, 그저 오늘도 세상을 휩쓸듯 일어서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바람처럼 쉽게 태어나고 그만큼 쉽게 사라지는 온갖 종류의 사소함이, 그에게 이르러 인내 될 수 있고 심지어는 극복마저 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강함을. 쉽게 말해, 쉽게 우는소리를 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강함. 그러한 힘을 이루는 것이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나는 긍정한다. 고집, 자존심, 허영, 수치, 의뭉스러움과 망설임,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나는 그러한 종류의 심리적 요소, 오해받을 만하고 그만큼 가치 있는 인간의 정신을 긍정한다.


인간의 슬픔보다도, 그러한 슬픔에의 태도에 나는 관심 가진다. 그것에 대결하고 어떻게든 극복하려 애쓰는 자의 어른스러운 의기를. 그것을 “공부”하여도 좋고, 그것을 뛰어넘으려 해도 좋다, 일어서다 다시 넘어지고 주저앉아 울어버리는 것마저도 좋다, 머물러 잠겨있지만 않는다면! 그 반대편은 버티지 않고 곧잘 허물어지곤 쉬이 죽은 척하기로 결심하는 유약함의 있을 자리이다. 가운데 자리라는 말은 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그사이 어딘가라고 말들 하지만, 그것은 방황의 위장된 모습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것의 전부이고 그게 전부다. 선택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라고 내게 말하지 말라. 그런 언어유희는 지겹다. 모든 것이 모순의 품 넓고 허무한 대지 안에서 허약한 명맥을 붙들고 겨우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재는 재고, 먼지는 먼지일 따름이다. 선택 또한 그런 것이다.


미리 정해진 한 가지 답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의 섬약함과, 그러한 섬약함이 이제 정해진 바로 그것을 얻지 못하였을 때 내지르는 비명, 또는 수치에 길들여진 침묵 어린 원한을 머금는바 오직 그것만을 꾀할 수 있도록 태어난 얇은 성대와 허약한 목줄기가 그 반대편에 있었음이니 강함, 그것은 여기 빗대었을 때 저절로 드러나는 반대급부로서의 것이다. 그러한 비명과 원한에 더는 관심 없다, 그 아무리 엄숙하고 진지한 옷을 입고, 기나긴 연설로 그 얼마나 친절히 열렬히 자신을 변호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을 따름이다. 그에게 이르러 강한 인간이 그렇게 낯설듯, 나에게 있어 섬약함이 그러하다. 나는 침묵하고 인내할 줄 알며, 자기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일 줄 아는 심줄 굳은 인간만을 사랑한다.


짐짓 심각하고 장대하게 서문을 열었으나, 의외로 나의 사랑은 그리 엄격하다거나, 지나치게 높고 멀고 고매한 가치, 그러므로 허황되다거나 하물며 자격 없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저 우는소리를 하지 않기로 다짐한 앙다문 입술과 자신도 몰래, 아주 조금만 떨리도록 스스로 허락한 그의 울대를 나는 사랑한다. 소리죽인 신음과 눈물을 삼키려 부릅뜬 눈망울, 그러한 소리 없는 떨림들에 나는 한없이 다정하다. 한 아름 눈물을 머금은 채로도 울지 않기로 다짐하는 소녀와 소년들이라면 모두 내 가없는 사랑을 받을 만하다. 받아들이기로 한 슬픔의 창백하고도 담대한 얼굴, 굳어진 눈꼬리와 각오 어린 입술 앞에 이르러 내 입은 비로소 일전과는 다른 것들을, 위안과 용기와 힘을 울력하듯 밀어 넣듯 주입하듯 말하기 시작한다. 하물며 그것에 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은 더욱 좋다! 내가 사랑하는 강함이란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다. 서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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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과 효주는 내게 그런 사람들이다. 너희는 이 글의 제목을 두고 필시 의아해할 것이나, 바로 그것이야말로 내 사랑의 평범함을 드러낸다. 너희는 이 글이 가리키는 너희 자신을 두고 ‘강함’을 상기하기가 도저히 어렵다거나, 결코 자신은 그러한 수식언에 걸맞지 않다며 저어하고 당황할지도 모를 테지만, 그것이야말로 내 사랑의 넓고 얕음을 가리킨다. 내가 긍정하는 것은 그다지 높지도 깊지도 좁지도 않고 오히려 그 반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그야말로 평범한 우리들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 숨겨지고 오래 가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한 것을 드러낸다. 너희는 정열적이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거나 덜어내려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당당했고, 그렇게 타인에게로 거침없이 펼쳐낸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평가를 되받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의견에는 신중할 줄 알았으며, 예상치 못한 상대의 감정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보일 만큼의 여유로움마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모르고도 그저 행하고 있었다는 것. 내 이것을 두고 강함이라 부르는 것엔 넘침은커녕 일절 모자람도 없다.


담담하게 서서 올곧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 자신에게 행한 그 모습 그대로 상대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힘. 상대의 말과 벅찬 의지 앞에도 그저 버티고 서서, 이해를 꾀할 만큼만 기다릴 줄을 아는, 딱 그 정도의 힘. 내가 사랑하는 이런 소박한 것의 반대편에는 어쩜 두려움이 있을 테다. 부정당하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이야말로 사람의 작음을 이루는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앞에 곧잘 허물리고는 주저앉아 버리는 것 말고, 우리가 다른 것을 꾀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그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두려움을 거슬러 오르려는 사람들이다. 그 두려움이 우리를 집어삼키도록 두기엔, 너무도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다.


자기 확신을 잃어버리고는 그것을 되찾고자 하지 않는 자, 나아가 그런 의지 자체를 세상으로부터 빼앗겨버린 사람에 있어 두려움이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그러나 그것을 귀하지도 대단치도 않은 것인 양,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하며 떨쳐버릴 줄을 아는 태도야말로 내가 오래도록 기다려온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취기와 망각의 디오니소스보다, 겨울의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우수보다, 아폴론의 태양과 헬리오스의 전차를 사랑한다. 우리는 오해나 왜곡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담대했고 거꾸로 그런 담대함이 우리를 웃게 했다. 우리의 담대함에 대한 사람들의 오래되고 사소한 오해, 그게 우리를 묶어주는 한 가지 테마였다. 그래 우리는 너무도 담담하고 담대했기에, 소위 너무 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해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정한 사람들로, 유감스러운 사람들로, 부도덕한 사람들로, 상냥하지 않은 사람들로.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었나?


그대들의 곁에서 가을을 떠나보낸다. 우리가 더불어 지나온 가을 위에 흘려둔 웃음이 많다. 경복궁 담벼락의 맞은편, 서촌의 은행나무 잎잎 위로 한 움큼씩 떨어뜨리곤 곧 시시하게 밟히도록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사소하고 만연한 웃음이. 고개를 젖히고 목젖을 들이켜 웃던 나와, 참아낸 이윽고 쏟아지듯 웃음을 흘리던 너희를 나는 아직 잘 기억할 수 있다. 각자가 겪어낸 오해가 서로에 이르러 온전한 것일 수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나를 스쳐 간 사람이 그 많지만, 나의 모든 것을 본 사람은 결코 얼마 되지 않는다. 그간 나는 오해로서 존재했고, 오직 그것은 내가 아직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후의 최후까지 나를 맴돌던 망설임을 떨쳐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의 뜻과 의지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을 벗어던졌으며, 그것을 관철해 나감에 따라 뒤이어질 무수한 원망을 각오하고 있던 내게 너희는 유쾌했다. 아, 너희는 내게, 지금 이 순간의 내게 최고였다. 바로 지금 너희를 만난 게 나의 몇 가지 행운이었다. 너희 앞에서 나는 온전히 나로 있으면서도 그토록 즐거울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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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담대할 수 있었기에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었고, 그게 무엇이건 웃을 수 있었다. 그게 기쁨이건 슬픔이건 간에, 농담이건 진지함이건 간에, 희극이건 비극이건 간에. 그러므로 불안한 미래의 안개 속을 거니는 너와 낯선 세상으로 갓 던져진 채 야근과 피로에 짓눌려 있는 너와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 이제는 새로운 방황을 알기 시작한 나의 이야기가 같은 책상 위에 공존할 수 있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군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좁았더라면, 이처럼 풍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의 영역은 너무 비좁을뿐더러, 누구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선 그 깊이를 얕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 반대되는 것, 다른 이의 이해를 담보하거나 확증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기 위해서, 즉 풍요로운 서사의 식탁을 위해서는 이미 말했듯 담대함이 필요한 법이다. 자각 없이 행한 것이라도 좋다. 나는 그런 비밀스러운 담대함을 사랑했다. 그런 연유로 취업 준비생과 사회 초년생과 5년 차 직장인이 동등한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음이란 크나큰 기쁨이다. 너희도 차차 알게 될 거야.


우리는 일과 사랑과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일에 대해서도, 떠나간 사람과 사랑 이야기를 함에서도, 누군가에겐 비정하게 보일 정도로 서로에게 담대했다. 우리는 위안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의 고뇌가 우리에게 이르러 미소와 축제가 될 뿐이었다. 우리는 연민하고 위로할 바엔, 그의 고민을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어냈다. 괜찮다는 말 대신, 그의 지금을 나의 과거로 바꾸어댔다. 즐겁지 않은가, 애초부터 아무런 문제는 없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시간과 인과의 커다란 흐름 아래에서, 어제도 오늘도 반복되고 있는 것들이다. 그대의 세상에 낯선 것이 들어섰을 뿐 그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수많은 인간을 관통해 나가며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익숙한 것들이다. 그대의 현재는 나의 과거였고, 나의 지금은 그대의 어제였다. 바로 그 이유로, 그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고 지금은 찰나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눈앞에 놓인 낯선 현실과 부조리를 의문할 뿐 아직 슬퍼하지 않았다, 않으려 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일이 힘겹다고, 자기 연차에 이만한 일을 해내라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너는 말한다. 괜찮냐고는 묻지 않는다. 그건 그 사람의 능력과 의지를 의심하는 일이므로. 너의 눈은 의문할 뿐, 미리 답을 정해두지 않았다. 그런 건 눈동자 안에서 깊이 빛난다. 나는 훌륭하다고 답한다. 연차에 걸맞은, 마치 미리 계량한 듯이 짜맞춘 업무량 따위는 없고, 인간은 자기가 감내하기로 한 부담만큼 강제로 성장한다. 스스로 정한 과업이 아닌 주어진 일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문제를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문제의 몸체이자 그에 걸맞은 주인으로 거듭난다. 도저히 감내치 못할 값이라면 차라리 떠나는 편이 더 좋다. 그건 패배가 아닌 받아들임이다.


사람이 힘겹다고, 자기 양어깨에 매달리듯 기댄 사람들이 너무 많다며, 가끔 그 기대에 버겁다고 너는 말한다. 말했듯 그들은 우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너는 그들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아닌, ‘해야만 하는’ 말들을 전하고 그것에 능하다. 그들의 섬약함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을 행하게끔, 부드럽게 강요한다. 그게 마트 바닥에 누워 떼쓰는 어린아이와 얼마나 다른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푸닥거리는 그 모습과? 하지만 그들을 쉽게 저버릴 수 없는 망설임조차 이해하기에 나는 웃는다, 단, 그것은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조용한 경고와도 같다. 왜 그래야만 하느냐고 어느 그대는 속으로도 묻지 말라. 내 앞에 앉아 있던 그녀는 이것을 이해했다.


좋아하던 여자에게 바보같이 차였다. 그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마치 모태 솔로 연애 프로그램에 나온 우스꽝스러운 한 사내를 닮지 않았는가, 하고 그대들은 웃는다. 사랑하던 남자가 멀어져갔다. 그래, 어쩔 도리가 있었을까, 답은 정해져 있고 남은 건 우리 선택뿐이다, 우리들은 조용히 웃는다. 사랑을 잃어버렸다. 그 또한 순리가 아니었던가, 우리들은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웃는다. 우리는 위안하지도 동정하지도 않고 오직 이해할 뿐, 그러므로 모든 것에 있어 너무 재빠르게 우리의 동의를 내비치지도 않는다. 아직 닿지 못한 그대의 이야기들은, 신중한 탄식을 기하며 충분히 소화되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한 신중함이야말로, 장차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를 서로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 성큼 들여놓았다.



즐거운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지. 그러므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의문할 뿐 유감하지도 그 고뇌의 깊은 소굴에 오래 머물려 하지도 않는다. 일과 사랑과 사람, 모든 것은 변하고 우리는 오늘 지금만을 바라보며, 끝없는 선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망설임이란 의문하는 순간의 일일 뿐인 것이다. 허나 망설임도 좋다, 스스로 선택할 만큼 강해지기 위해 거쳐 가야 하는 과정 속의 일이라면. 미련하게 집착해도 좋다, 얼마든지 부정하고 자괴하고 그러고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라도 그것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과감히 떨치고 나아가는 것도 좋다, 차라리 후회를 씹으며 고독할지라도 그게 우리가 선택한 것의 결과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든 행하고 그 결과를 마주하기를 나는 원한다.


그 모습이야 얼마든지 추해도 좋겠고, 얼마든지 가차 없어도 좋겠다. 모쪼록 지나버린 시간은 연기처럼 한 켠 훑어버리고, 새로이 걸어가는 길 위의 놓일 걸음걸음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어쩜 그대들은 이걸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이토록 재빠르게 성숙해져 버린 여인들이라니, 이렇게나 멋진 인간들이라니. 그러니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배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선배가 후배를 대하는 듯이, 어른이 아이를 대하듯이, 조심스럽게, 섬세하게, 깨질 유리처럼 대할 필요 자체가. 이미 그대들은 너무도 성숙해져 있던 것이다. 나는 그대들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언제나 우리가 만나는 명분은 글이었지만, 글은 활자보다 먼저 삶이고 생각이다. 그대들의 의문은 조금 해소되었을까. 나는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펼쳐 보였고, 그것은 나의 글과 닮았다. 내 전부를 담지 못할망정, 내가 아닌 것을 담아두지 않았다. 사람들은 삶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뇌까리면서도, 아직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정답이 없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오직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을 찾아내야 하며,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그것을 세계로부터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 어떠한 방해와 부정과 타도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또 마구 부서지며 완성되는 조각같이. 내 삶을 통해 그려내고픈 이야기는 이것이었고, 모쪼록 나의 이야기는 그대들에 이르러 조금씩 더 완성되었다.


그래, 글은 활자보다 먼저 삶이고 생각이다. 그것은 이런 글이 될 수도, 전혀 다른 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활자는 중요치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더욱 담대하게 말하자. 그런 언젠가 우리 발밑에, 자기 의지의 언어로 된 산이 놓일 것이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될 만큼 담대해질 그때에, 글은 더 이상 골칫거리마저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린 이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허나 훗날 또 다른 산의 능선에서 다시 만나, 지금 우리들의 고뇌가 무르익어 새 열매를 맺은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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