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둠 속의 과거에 고함

연극, 삼매경 후기

by 풍금이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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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연극 산책이다. 어느덧 3월의 중반, 날은 포근하지도 춥지도 않은 것이 딱 선선하였다고 적는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봄이 와 있는 줄도 몰랐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그간 나 무엇을 하였지. 회사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이제 라이브 목표 일을 얼마 남기지 않아 박차를 가하며 나를 몰아댔고, 최근 쓰느라 여념 없었던 글 몇 개…라기엔 분량이 좀 긴 글을 겨우내 끼적여왔으며, 그 외의 모든 일상 속은 쏟아지는 국내외 경제, 정치, 시황 뉴스를 대중 대중 더듬어 따라가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3가지 일에 정신이 팔려 캄캄했구나, 일종의 삼매경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청해 둔 연극이 오늘이라는 문자를 받고 습관처럼 패딩을 입은 채 길을 나섰다간, 날이 너무 적당해 어이가 없었다. 아침 새벽이 아닌 한낮의 기온은 정녕 봄이었다, 온 줄도 몰랐다니…


오늘 극, 삼매경 간판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 걸려 있다. 오랜만에 명동에 갈 일이 생겨 들뜬다.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맛집이 몇 개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거기서 길 하나만 건너면 우리 회사이기 때문이다. 연이은 프로젝트 때문에 수개월째 남양주로 출퇴근하느라 못 가본 그 밥집이 그리운 건지, 매번 스치기만 하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명동예술극장이 궁금한 건지, 반가운 내 마음이 어딘가 수상쩍었다.


명동에 사람 많다는 이야기는 굳이 묘사할 필요도 없지 싶다. 케리어를 끄는 이국인들을 비집어 가느라 오늘도 시간에 늦을 뻔했다. 중간중간에는 포교인들도 많았는데, 다들 익히 아시다시피 큼지막한 원색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 커다란 간판을 등에 지고 있는 사람하며, 천막을 치고 앉아 확성기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불신지옥” 현수막을 가볍게 젖히며, 천막 바로 뒤의 명동극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티켓 배부하는 사람들도 이미 마중 나와 있어, 바톤을 이어받듯 티켓을 건네받곤 3층으로 뛰어 올라간다.



창작극 삼매경은 함세덕의 ‘동승(1939)’을 원작으로 해 재창작한 작품으로, 극중극 형태를 띠고 있다. 동승이라는 작품 속 캐릭터와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가 마주 본 채, 각자의 서사는 서로 독립된 것으로부터 출발해 서서히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세계의 일부가 된다. 마치 ‘전염’되는 듯이 옮아가는 맥락, 그로부터 태어나는 초현실적인 서사는 분명 매력적이었으나, 극의 구성이 놀랍도록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 서사의 흐름을 놓치는 순간 몰입을 되찾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게 연극에서만이 맛볼 수 있는 쾌감이자 희열이라 생각된다.


또한 눈에 띄는 부분은 무대와 현실 사이의 기막힌 관계성인데, 주연을 맡은 ‘지춘성’ 배우는 실제 ‘동승(1939)’에서 동승 역을 맡았고 “영원한 동승”이라 칭송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바 있다. 이로써 극 속의 서사는 현실과 가상 사이에 아리송하게 위치한다. 즉, 동승 캐릭터와 그것을 연기한 배우 지춘성이 내뱉는 대사들이 정녕 창작자의 온전한 상상일지, 아니면 일정 배우의 내면 이야기인지를 우리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인데, 이로부터 깊은 호기심과 몰입감이 발원한다.



** 이하 스포 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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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깊은 숲속 암좌에서 시작된다. 엑스트라들이 입으로 산새들의 소리와 거친 밤바람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데, 아-, 벌써 정교하게 연습해 온 티가 물씬 났다. 아닌 게 아니라, 그건 우리 고향집에서 자장가 대신 듣고 자란 소리들이었기 때문이다. 푸다다닥 거리며, 마치 허벅지 두들기는 소리가 나는 꿩의 날갯짓이라든지, 밤이 깊도록 구국-국-국 하며 수상하고도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멧비둘기 소리라든지, 심야에 느닷없이 이는 광풍에 대밭이 스치우며, 마음 씁쓸하고 적요하게 만드는 어수선한 소리 같은 것들이 내 마음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덕분에 수월히, 나는 곧잘 내가 아는 몇 가지 암좌를 머릿속에 투영한다. 갓바위는 밤에도 너무 밝으니, 은혜사나 동화사 정도가 적당했다.


이따금 풍경소리가 들리는 그곳에서, 영원히 젊은 동승인 ‘도념’의 캐릭터와 그로부터 31년이 지나 늙어버린 배우 ‘지춘성’이 마주 본다. 배우가 읊조리는 후회 어린 사념에 어린 도념이 선문답을 한다. 그 목소리가 맑고 순수하면서, 소년답다기보단 ‘소년 만화’ 다운 담뿍 따뜻함이 묻어난다. “벌써 31년이라니, 세월이 참 유수 같아!” 성글성글하고 또박또박한 말투로 노인에게 이치를 따지어가며 말하는 어린 동자승. 이건 내면의 대담이다. 도념은 그가 맡았던 역할이자, 그의 마음속에서 31년째 자리하고 있는 뿌리 깊은 캐릭터. “난 한 번도 네가 되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이때까진 그의 마음속 동승이 가지는 지위란 기껏해야 그리움, 극을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한 아쉬움, 또는 지나가 버린 젊음에 대한 후회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막이 흐르고, 극중극으로 연극 ‘동승’이 교차 진행된다. 자신을 사찰에 버리고 간 얼굴도 모르는 어미를 그리워하며 적요한 사찰 속을 살아가는 도념은 봄이면 언덕에 올라 신도들을 바라보고, 나무 패는 초부는 이번엔 네 어미가 오실 것이라 호언장담을 늘여놓지만 도념은 그 이야기만 벌써 몇 년째, 공염불만 늘어나 조바심은 애탄다. "거짓말 마세요! 아저씨는 늘 거짓말만 하세요. 지난 봄엔 진달래가 피면 오신다더니, 진달래가 지고 나니까 원추리꽃이 피면 오신다고 그러고, 원추리꽃이 지고 나니까 또 도라지꽃이 피면 오신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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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막 전환, 이번엔 연극 ‘동승’을 연기하던 배우들의 연습실이다. 디테일의 악마에 사로잡힌 듯, 잔뜩 예민해진 연출가는 새벽이 깊도록 “다시, 다시!”를 외치며 배우들을 몰아댄다. 개중 유독 도념 역을 맡은 주인공만은 연출가의 눈에 차지 않는다. 배우는 도념을 충분히 이해치 못했고, 캐릭터 해석을 ‘공허감과 상실감’으로 오역했기 때문이다. 객석의 우리 눈에도 그것은 적절치 않은 해석, 어린 도념이 몸소 보여준 모습은 그보단 ‘그리움과 애달음’으로 다가온다. 무대에선 배우와 도념이 같이 서서, 같은 대사를 이어받아 읊조려가며 캐릭터와 배우 사이의 괴리감을 역력히 선보인다.


연출가는 도념을 따로 불러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한다. ‘왜 배우들이 연기에 몰입을 못 하는지 알아? 자아 때문이야, 자아. 그러니 부단히 나를 비우고 철저히 무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거야. 그럼에도 여러분의 자의식은 툭툭 치고 나오겠지. 그러니 연습실 올 땐 제발 좀 다 비우고 와. 할 거면 다 걸고 하란 말이야.’ 그러나 그게 가당한 소리일까. 도념의 캐릭터성을 공허로 오역하게 만드는 자신의 자아를 모두 비운다고 해서, 그가 이해치 못한 ‘그리움’이 그 빈자리를 채워 들까. 글쎄, 우린 그 결과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배우는 캐릭터를 이해해야 한다. 연기란 먼저 이해하고 깊이 느끼어, 통하게 된 것을 재구성하는 작업. 그러므로 배우는 적재적소에 꺼내어 쓸 수 있도록, 그 자신의 생애 동안 몸소 느낀 감정들을 수집하고 분석해 심장 깊숙이 갈무리해야 하는 서글픈 존재이다. 감정을 올곧이 누리지 못하고 언제나 그것을 메타적으로 인식하고 해부해야 하는 즉, 해리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생똥한 동자승에게 공허를 투사할 수밖에 없는 그의 어찌할 수 없는 몰이해를 스스로 탓하고 그저 쉬이 돌아설 수 있었더라면 좋으련만, 하필 그것이 포기할 수 없는, 타협도 양보도 불가한 열정이라면 어떻겠는가. 재능 없는 자에게 주어진, 터무니없이 신실한 열정의 저주. 나는 저 마음을 반쯤은 알 것 같았다.


이것은 기억, 그가 수도 없이 읽은 대사 속의 세계이자, 그를 몸소 재현해 내고자 수없이 애써왔던 현실. 한편 배우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는 과거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상인즉, 무대이다. 재구성된 기억 속에서 어린 도념은 대사의 세계, 전형의 세계를 일탈하기 시작한다. 배우의 내면이라는 무대에서, 배우 스스로가 연출가가 되는 것. 배우는 평생토록 도념을 이해치 못했고, 도념은 다른 배역을 위해 마련해 둔 소품용 칼을 들어, 사내의 뱃속 깊숙이 박아 넣는다. 그리고 이제부터 연극은 ‘동승’도 ‘현실’도 아닌 제3의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삼도천에서 눈 뜬 배우는 죽은 어머니와 마주한다. 이 어머니가 ‘배우’의 어머니인지, ‘도념’의 어머니인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어머니는 언제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고, 사내는 어머니의 정이란 것을 깊이 이해한다. 극락의 문에 다다른 삼도천의 배, 사내는 다시 돌아가고자 하고 어머니는 만류한다. 평생 고독 속에서, 후회라는 지옥 속에 살았잖느냐고. 마치 아킬레스건을 콱 물어버린 뱀의 아귀처럼, 자신을 놓아주지 않고 번뇌케 하는 신실한 열정과, 그 열정이 선사하는 지옥으로 돌아가지 말라 읍소하지만 사내는 다시 태어나도 자기는 배우를 하게 될 것이라고 운명처럼 말한다. ‘그 모든 것을 다시 겪더라도 감내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그러나, 사내는 답하지 못한다. 머뭇거린다. 이건 자기 운명을 껴안는 행위가 아니라, 차라리 업과 윤회의 개념에 가깝게 다가온다.


사내는 삼도천으로 뛰어들고 어머니의 양수 같은 따스한 물속을 지나, 마치 출산의 고통을 상징하는 양 두개골을 짓누르는 거대한 압박감을 겪으며 다시 태어난다. 당시 ‘도념’을 이해치 못한 것은 어머니의 상실을 겪지 못한 까닭이었음을 깨달은 듯한 사내, 마침 오랜 병상 생활을 지낸 생모가 돌아가시고 장면은 빠르게 연습실에서 장례식장으로 전환된다. 조문객들이 오고, 맞절을 하면서도 사내는 연기에 골몰한다. ‘이 감정이 바로 도념의 감정이겠지?’


영정 앞에 앉아 향을 피워두었지만, 그는 모친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보단 그 슬픔을 해부하고 궁리하고 갈무리한다,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그는 도념을 더 깊이 이해했음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웃음이 튀어나오려 한다. 이는 비단 사내만의 사연은 아니이다. 주변 모든 동료 배우의 사정 또한 마찬가지. 감정과 그 감정에 수반되는 행위가 발원하면, 자타의 것을 막론하여 그것을 분석하고 해체하고 수집하기를 반복한다. 감정의 순수성은 없다. 자신의 감정을 올곧이 누리지 못하고, 그것을 무엇인가의 수단이자 재료, 계단, 제물로 사용하게 만드는, 무엇보다 그런 탈현실적인 삶의 양식을 스스로 열렬히 구가하게 만드는 저 미친 열정의 신실함에 나는 수상한 기시감과 씁씁함을 느낀다.


한편 이 무대는 현실과 가상, 배우의 과거와 ‘동승’이 서로 간섭하고 전염돼, 잔뜩 이지러진 제3의 세계이다. ‘도념’이 조문을 오고 두 사람은 맞절을 한다. ‘도념’은 일찍이 건넸던 따스하고 희망찬 목소리로, 작가로부터 부여받은 천성 그대로 말해오지만, 사내는 진절머리를 느낀다. 그렇게 극은 전개부를 마치고 위기부를 향해 성큼 나아간다. 지금껏 두 사람은 ‘동승’의 세계, 사찰과 암좌와 봄꽃이 피는 세계에서만 마주해왔지만, 사내는 처음으로 ‘도념’을 자신의 세계 속으로, 깊은 마음의 구덩이인 심연으로 초대한다. 대사를 읽고 또 읽고 또 읽어가며, 이해하려 애도 써보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신에 분노와 혐오도 부려가며 파내리는 구덩이. 활자의 검은색이 눈동자 깊이 미치면, 누구라도 이 깊은 어둠 속에 도착하게 되나보다. 사내는 이를 심연 대신 공허라 부른다. 그러므로 이곳은 배우에겐 공허, 작가에겐 심연, 래퍼에겐 언더그라운드.



재능도, 영감도, 그렇다고 남의 것을 훔치는 몰양심이나 하다못해 타협하는 심보마저 타고나지 못한, 올곧은 바보로서의 창작자들이 도달하는 내면의 무덤. 둘은 그 어둠 속을 끝없이 걸어가고 문득 뒤돌아보면 자신이 걸어온 만큼 멀어진 빛무리, 한때 자신이 서 있었던 양지를 바라보며 저곳이 세상이고, 자신의 위치는 이토록 멀리, 한없이 까마득히 떨어져 버렸음을 자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하, 도념은 ‘소년 만화’다운 목소리로 그를 건져 올리려 애쓰지만, 심연으로부터 한 명의 사람을 건져 올리기에 낙관이란 것은 너무도 미약하다. 근거 없는 낙관과 희망은 그것이 얼마나 진실되든, 여태껏 그가 겪은 실패가 지니는 단단함과 무게감, 즉 기억을 타도할 수 없어 무력히 튕겨 나올 뿐. 이 구덩이는 너무 깊어서 끌어올릴 수 없어, 마침내 이상이 실현돼 우리를 구원하거나, 파내린 두 손으로 거꾸로 매워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파내는 것보다 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 삽질이건 마음의 문제이건 간에.


극은 이 사내의 삶 켜켜이 베어 있었을 고독은 전면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삼도천에서 재회한 어미가 이른바 ‘그 두터운 고독’이라는 대사 한 줄로 처리했을 뿐. 더 넣을 것도 뺄 것도 없을 만큼 극이 촘촘하고 빼곡했던 까닭에, 그것이 자리할 수 있는 서사의 빈 자리가 없었음을, 그러므로 나는 그 고독을 생각한다, 아니 떠올린다. 이상은 터무니없이 높되 현실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 ‘이게 아냐!’, 혜안만이 나날이 예리해져갈 뿐 그것을 빚어낼 두 손이 너무 굼뜨고 초라한 자, 열정적인 둔재 그에게 있어 뜨여버린 두 눈은 저주임을. 배우든 글쟁이든 소리꾼이든, 우린 겪고 느끼고 이해한 것만을 노래할 수 있으니 일종 동병상련이다.


자신의 심안이 바라보고 있는 이것, 이걸 정확히 재현할 수만 있다면… 마치 E SENS의 노래 가사처럼 “그것만 찾으면 가짜와 내가 구분될 수 있어”라고 외치는 달콤한 목소리는 사이렌의 음률. 아, 보이잖아, 저기 눈앞에 있잖아,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그것을 향해 달려왔다, 곧 닿을 것 같았던 신기루. 그리고 이따금 망막에 신기루가 걷히면, 사실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다소곳한 현실은 터무니없이 초라한 모습을 한 채로 성큼 다가오고, 실은 세계를 의미와 아름다움으로 오역하던 두 눈의 콩깍지가 떼어짐에 따라 드러나는 세계의 민낯, 단 한 순간에 송두리째 바뀌는 만물로부터 우리는 거리감과 아뜩함과 구토감을 느끼던 것이고, 미혹과 무관하게 그럼에도 변함없는 현실은 시간이 증발해 버렸다는 사실 뿐이며, 우리는 뒤를 돌아본다, 후회. 지금 이 글도 마찬가지야. 연극을 제대로 설명하고, 그 안에 느낀 바를 정확하게 옮겨 담으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하곤 하지. 다행히 나는 조금 귀찮은 것 같다만, 그건 다른 제물이 내게 마련되어 있는 덕분이다. 그러나 그 후회마저 요식행위임을 체념처럼 생각하는 까닭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질주하는 매혹의 선상으로 이끄는 우리의 진심, 그것을 원하고 느끼게 만드는 어떠한 원리, 심장 깊숙이 박혀 있는 기생충 같은 그것의 참된 힘을 몸소 기억하고, 그것은 버리련들 버려지지 않는 것인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도망칠 수 없는 나선 위에서 우린 갈증과 편집을 채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태우고 소진할 수밖에 없었음과, 자신을 까맣게 태워대는 자에게 고독은 필연임을 기억한다. 나는 그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차라리 도망칠 수 있도록 그 어떤 성공도 내게 찾아오지 않았음이 축복이었음을, 그러므로 거꾸로, 재능 없는 자에게 주어진 최초의 찬사와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운명의 기나긴 안배에 따른 저주임을 이해한다. 도망친 자리이자 객석에서 나는 저 사내를 바라본다. 육십이 넘도록 동승처럼 자그마하고, 아직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목소리를 한 늙은 소년을.



삼매경이란 낱말은 ‘석 三 자’에 ‘어두울 昧 자’를 쓰고 있다. 삼매는 세 가지에 어둡다는 것, 이때 3이란 숫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힌두의 삼 주신, 도교의 천지인 삼태극이 가리키듯 만물 일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다. 고로 삼매경은 우리의 정념이 어떤 것에 깊이 집중한 나머지, 그 외 만물에 완전히 어두울 정도로 깊은 몰입의 경지를 가리킨다. 이렇게만 늘여 놓고 보면 퍽 아름다운 경지를 이르는 듯하지만, 본 극을 통해 삼매경은 그 개념의 이면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불교 내 용례를 뒤져보아도 삼매란 가치중립적인 것일 따름으로, 삼매를 일으키는 바와 그 목적이 중한 것이지 삼매 자체가 올바름은 아니이다. 그러니까 삼매경은 어떤 가치를 내포하거나 함의하기는커녕, 지극히 어두운 몰입의 상태 그것만을 메마르게 가리킬 뿐이라는 것이다.


‘자식을 잃고 49재를 올리는 미망인이 제 어매를 닮았다는 말에 그녀에게 이끌리는 도념. 그녀가 항상 두르고 있는 새하얀 털목도리가 유독 인상 깊었던 도념. 사찰에서 홀로 지내는 도념이 신경 쓰여 입양을 희망하는 미망인. 그런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덫으로 토끼를 잡아 털목도리를 만들고자 하는 도념. 그러나 불상 뒤에 몰래 숨겨둔 피 묻은 토끼가죽을 발견한 주지 스님. 불살생의 계를 어긴 탓에 도념의 입양을 금지하는 주지 스님.’ 사내는 자신이 토씨 하나 빠짐없이 기억하는 이 정극의 서사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연극에의 탐닉 때문에 공허라는 암흑 속으로 들어섰고, 그 사위 어두운 곳에서 점차 더욱 깊은 삼매경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우린 이걸 집착이라고 갈증이라고 광기라고, 즉 삼매경의 이면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실패한 도념을 완성하려 애쓰는 대신, 자기 자신으로서 ‘동승’의 세계에 난입해 극을 마음대로 뒤틀고 휘젓는다. 이곳은 그의 상상, 상상은 관념이고, 가상이며, 하나의 무대이다.


그와 동시에 상상은 이상스러운 공간이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로만 재구성될 수 있고 여전히 인과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상의 무대에 난입하는 인물들은 여전히 그가 기억하는 인물들이지만, 대사와 정극의 세계가 아닌 그 자신의 인물 이해를 따른다. 느긋한 옛말을 구사하던 초부는 2020년대 시정잡배의 말투를 일삼고, 주지 스님은 육식을 즐기곤 배를 두들기는 파계승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미망인은 도념을 입양키 위해 주지에게 접대하는, 지독한 현실로 추락한 그의 상상, 아무런 보잘 것도 없는 그의 무대.


그는 토끼 덫으로 어린 도념을 유인해 죽이고, 그렇게 도념의 ‘지위’를 온전히 꿰찬다. 그 밖에도 자신을 방해하는 모든 인물들을 덫으로 유인해 죽이고, 그러므로 주지가 불상 뒤에서 발견한 것은 피 묻은 토끼 가죽이 아닌 그가 살해한 사람들의 수급이다, 인과율. 그러나 사내는 가죽 대신 수급을 두 손에 들었지만, 돌아오는 경악 어린 외침은 수상하다. “왜 너는 네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느냐.” 아마 평생을 도념에 몰입하고 그것을 완성코자 열망한, 한 명의 배우 된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마저 도념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또한 인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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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승으로 형상해두었던 주지승은 도념이 된 사내를 앉혀두고 훈계를 시작한다. 그 말은 어딘가, 일전 자신에게 연기 철학에 대해 일러주던 연출가 선배의 말을 닮았다. 완벽한 수미쌍관 구조. 다만 그 말들은 노트에 따로 적어두지 않아 온전히 옮기기가 어렵다. ‘네가 죽이려 드는 건 도념이란 캐릭터가 아니라 네 전부이자 자신. 우리를 죽이는 것은 집착과 후회, 발뒤꿈치를 물어버린 뱀과 같은 열정. 연기는 자기 자신을, 즉 자아를 비우는 것.’ 대략 이런 말들을 참하게 늘여뜨린 것 같다.


이 대목에서 극의 창작자이자 연출가인 이철희의 안목과 일관성에 대한 집착이 일견 엿보인다. 하필 노트는 챙겼으되 펜은 두고 왔고, 내 기억력은 일천해 그가 극 전반에 배치해 둔 메타포를 모두 꺼내어 분석하지 못하는 것이 심히 괴롭다. 작품에 고르게 흩뿌려둔 연기와 배우에 대한 은유들은, 결론에 다다를 제 그 용례가 인간 일반으로 자연스레 넓어져 있었고, 그 덕분에 주제 의식을 멋없이 길게 늘어뜨려 설명해 댈 필요도 없었다.


하물며 동어반복은 말해 무엇할까. 그것은 미학에 반하는 일이지만, 그걸 참아내는 건 별개의 문제임을 안다. 실지 글쟁이로서의 내가 가장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이 부분일 것이다. 본론까지는 적절히 호흡을 안배해 차근차근 서사를 이끌어 왔다 하더라도, 결론부에 이르러 급격히 호흡이 몰리며 와다다다 쏟아내는 작품들에의 기억과 눈앞의 작품이 교차한다. 메타적인 연극이고, 입체적인 구조의 연극이며, 연극이라는 은유로 보편 주제를 가리키고자 한 대담한 작품이다. 응당 결론에 몰리게 될 문장들이 많았지만, 다 덜어내고 일관된 호흡으로 씬이 매듭지어졌다. 그건 연출가가 몸소 “더 할 말이 많아 아쉽지만, 여기까지”하고 매듭을 묶는 것처럼 다가왔다.


심지어 그것을 수미쌍관식으로 전개해 구조의 형식미와 일관성을 득한 것에 있어서는 순수하게 경탄했다. 그러면서 나 또한 메타적으로 극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저 배우도, 이 연극의 대본도 둔재의 역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실상 저들은 재능이 넘치는구나’ 하고. 허나 그런 우스갯소리와 무관하게 객석에 앉은 나는 압도적인 작품, 수준을 알게 하는 작품을 만나 더없이 흡족한 웃음을 짓는다.


내 느낀 감동을 겨우 ‘압도적인 작품’ 단 6글자 안에 다 담을 수 없듯이, 이 극의 연출가도, 저 노배우도 결론부 단 몇 마디의 문장만으로 급격하게 깨달으며, 와하하 웃곤 평안에 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건 나같이 재능 없는 글쟁이도 마찬가지로 좋아하지 않는 것, 정확하지도 핍진하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런 탁월함을 일궈낼 재능과 두 손이 없을지언정, 우리의 입맛은 까다롭고 눈만은 쓸모없이 밝다. 그렇게 적당히 매듭지어진 것을 대하여 마치 만찬을 음미하듯 행할 수 없다. 완벽을 꾀하다 실패해 차라리 어리숙한 취급과 마음껏 조롱을 받을지언정,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요구한다, 끝없이, 정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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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가 읊는 결론부가 끝나고, 사내는 도념을 향한 자신의 집착이, 갈증과 광기가 피워올린 상상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깨닫고 종을 울린다. 종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천정에선 차례대로 먼지가 떨어져 흩날린다. 이 상상 극장의 폐쇄를 상징. 흥을 깨는 말이다만, 그가 그려낸 작품은 정말이지 졸작이었다. 그는 배우이지 연출가로서의 자신을 수련하지 않았을 따름에 그 또한 인과율이다. 그리고 이 은유마저도 비단 배우로서의 인간만을 가리키진 않을 것이다.


상상이 부서진 다음, 사내는 다시 대본을 들고 빈 무대에서 동승의 대본리딩을 시작한다. 차분하지만, 적절하게 도녕의 대사를 읽는다. "거짓말 마세요! 아저씨는 늘 거짓말만 하세요. 지난 봄엔 진달래가 피면 오신다더니, 진달래가 지고 나니까 원추리꽃이 피면 오신다고 그러고, 원추리꽃이 지고 나니까 또 도라지꽃이 피면 오신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아주 미묘한 변화, 잔뜩 힘을 내 가리키려 애쓰지 않고도 캐릭터의 내적 변화를 있는 그대로 선보이는 것은 정말이지 노배우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교의 완숙함이다.


깔끔한 리딩을 마치고, 연극 삼매경 속의 ‘배우’이자 동승 속 ‘도녕’이자 지창환일 저 사내는 객석을 향해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여전히 주제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흐름을 견지한 채, 춤을 추듯 연극 안과 현실을 제 멋대로 넘나드는 대사들. “이까짓 것? 니들은 이까짓 것에 한 번이라도 뜨거워져 봤어?” 자신의 실패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것을 해야만 했던, 하게 만들었던 자기의 과거와 세상을 향해 외친다. “모쪼록 그저 연극밖에 몰랐던 아둔한 작은 배우가 이 극장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어, 언젠가 긴긴밤 잠이 안 오실 때, 오늘 보신 장면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깨무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피날레, “안녕, 안녕!!! 나의 아름다운, 미완성!!!”, 암전.


삼매경을 일으키는 것은 항거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매료이지만, 그 매력이 한편 우리에게 터무니없이 부푼 꿈을 안기는 것 같다. 그러니 세상만사에 어두워지는 것은 반드시 바람직한 결말로 우릴 이끄는 것이라기보다는 한 치 앞도 알아볼 수 없는 미지를 향해 끌려가듯 나아가는 것이고, 하물며 그 열렬한 몰입의 제재가 정녕 깨달음이었다 한들, 그것은 그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상의 일환일 뿐 그 어두운 터널 끝에 도달한다 하여 곧잘 해탈에 이르는 것은 바히 못되지 싶다. 마치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고 하여, 곧잘 독서의 달인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터널 끝엔 한 가지 결말만이 존재하고 그 결말은 생각보다 단초롬한 것이지 싶다. 한 가지 수학 受學을 마쳤다는 것, 한 가지 연기가 끝났다는 것, 이토록 멋진 책이 하나 끝났고 내가 그것을 읽었다는 것, 그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작품 중 한 가지만큼을 더 알게 되었다는 것과, 곧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잊혀지기 시작하리라는 것.


그러므로 우린 그 황홀한 매료에 이끌려 가는 동시에, 한편으론 그것이 우리에게 부추기는 갈급함을 매듭지어야 하지 않나. 어둠 속에서 질주하는 동시에, 되돌아갈 길을 염두에 두어야만이? 매료가 집착을 일으킨다 하여 그것을 불식시키란 것은 애초 이치에 맞지 않는 택도 없는 소리이라, 될 값이었다면 미치지도 그 끝에 이르지도 못하는 것이므로. 그런 말들에 함의된 이해가 터무니없이 납작하며, 우리에게 하찮으라 명하는 일, ‘그대들은 이까짓 것에 한 번이라도 뜨거워져 보았나?’


그러므로 그것을 온전히 살면서도, 끝내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린 온갖 방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나. 너무 커다란 집착과 그를 통한 자기 파멸을 벗어나기 위해, 가변으로 빠져나갈 길을 이어두어야만 하지 않나. 배우는 이 문제에 관해 받아들임을 논한다, 이를 두고 저 사내는 “아름다운 미완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젊어, 완성과 미완성의 개념으로써, 순응과 받아들임으로써 저것을 다루기엔 한창 이른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즐거웠노라”고 삼매경의 어둠 속, 과거에 고한다. 집착, 몰입, 사랑, 증오, 광기, 애증에 대하여. 이 글을 쓰느라 떠나보낸 26년 3월 중순 어느 토요일의 저녁과 일요일의 한나절도, 그 전에 이 정도로나마 조잡하게 쓰기 위해 더 먼저 쓰여야 했던 8년과 1천 시간의 습작들도, 결국 완결 내지 못한 글의 추억과 씁씁함과 그것을 위해 하루 18시간씩 써대며 말 그대로 머리털을 쥐어뜯던 집착마저도. 그 덕분에 나는 이 알 수 없는 곳에 도착했고, 나는 도착한 현실에 슬며시 자리해 있는 의미들을 찾아내 그 시간 앞에 천도재를 바친다. 이 소기 의미란 것들은 애초에 내 목표한 바 아니고, 내가 이것들을 목표로 하여 이리로 나아오지 않았음이며, 그러므로 일견 무의미할 것이나, 그러므로 바히 놀라움이라고 답한다. 나는 정녕 뜨거웠고, 그 모든 과거에 고해 “의미 있었노라”고 답한다. 연극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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