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면증 진단 후기
처방 약의 약효 중에서 눈에 띈 것은 도파민 수용체를 억제하는 기전인데, 약효가 돌기 시작한 몸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듯한 고양감이라든지 자신감이 아니다. 무엇에든 군말하지 않을 듯한 육신의 다소곳함이야말로 내겐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 기쁨과 허탈함, 마찬가지 놀라운 심경을 정확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하다. 누군가에겐 터무니없을 정도로 우습게 다가오겠지만, 나는 자가 실험을 위해 연체된 고지서를 바라보며 몸에게 명령을 내렸다. 몸은 아무런 반향 감정 없이 그것을 수행했다. 집 안 청소를 조금 해볼까? 성질이 고약한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부드러이 물어보았고, 몸을 의자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마치 귀가해 재빨리 의자에 앉으려던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은 더 들뜬 채로, 동시에 이것이 착각이거나 일시적일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는 조심스러운 사람의 그것처럼, 빨래 정리와 설거지를 시켜보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몸은 그것을 이행했다. 그토록 많은 반감과 저항을 일삼던 몸의 자아가, 고요한 침묵 너머로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요란하게 묘사한들 내가 되찾은 것은 여전히 터무니없을 정도로 소박한 것이다. 밥을 먹고, 곧바로 설거지를 하는 정도의 삶.
- [에세이] 긴 잠의 끝에서 1 中
어떻게 하면 당시 나의 상태를 그것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도 온전히, 내지는 충분히 전할 수 있을는지 오래도록 고심했지만, 나로선 그 활로를 찾기가 어려운 듯하다. 자기 연민이나 인정욕이 지나친 나머지 이러한 표현의 작업에 수반되어야 할 균형을 잃어버렸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다. 나로선 지금 이 순간 알게 된, ‘새로운 인생’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것이 내 진정 보상이니 말이다. 말인즉 이 행복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이 내 진정 소망, 혹은 욕심인 바인데, 그를 충분히 그려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뿌리 내 자라난 응달을 가리켜야 할 테나, 그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께서는 그저 이 자가 하는 말에 대해 조금 더 유한 인내심을 발휘해 주기를, 여러분의 이해에 기대기로 한다.
지난번에 재수 이야기까지 했지. 뒤따를 대학 시절은 돌이키는 어느 때마다 아쉽고 아름다운 안타까움으로 생각한다. 예민, 우울, 불안, 지난하고 소리 없는 감정의 기복을 앓느라 자신을 억누르거나 그 실패를 통렬히 탓하지 않을 수 있고, 적당한 근면함과 산뜻한 체력에서 비롯되는 명랑함을 안고서 그 시절에 걸맞은 영혼의 가벼움으로써 되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아직도 다 못 보냈다.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로써 긴장 어린 주름과 휘청이는 흔들림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는 저 모습들이란 나의 오랜 동경이다. 보통의 모습들. 잔뜩 진 주름을 거듭 펴 매끈한 유연함을 부러 애쓰는 것보다, 수면 아래의 발놀림에도 불구 흔들리지 않도록 어려운 고고함을 꾀하는 것보다, 그저 흔들리도록 두어볼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함. 내 생각에 그건 잘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의 기쁨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가벼움인가. 허나 그 소박한 행복을 알아보기 위해선, 필요한 인간의 묘사들이 퍽 넓고 깊은 듯하다.
부계와 모계 어느 쪽도, 삼촌과 사촌, 일가친척 전체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술을 못 하는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소주 3잔, 아버지는 아예 맥주 한 잔만으로도 젊은 알바생들에게 터무니없는 용돈을 줄 지경으로 취하곤 했다. 정작 내 용돈은 얼마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퉁명스레 여기면서, 나는 술의 위력과 술 앞에 놓인 우리 일가의 무기력함을 생각했다. 허나 당시 10대와 20대를 유별하는 가장 크고 명확한 척도는 알코올의 유무였고, 작금은 퍽 달라졌다지만 2013년도는 학과 단체 생활과 잇따른 음주가무로 구성된, 야만과 낭만의 대학 문화가 유지되고 있는 거의 마지막 시기였다. 군대를 다녀오니 그 문화는 한 여름 꿈처럼 아련히 사라져 있었다.
입학 전 새내기 배움터부터 개강, 수강 신청, OT, 과장 선출, 국문인의 밤, 그 외 온갖 학과 행사하며, 그뿐이랴 MT는 달에 2번은 족히 갔을 것이다. 그 사이 군데군데에는 누군가의 생일을 빌미로 하여 과방에 모여 술에 콜라와 과자와 녹차와 라면과 커피를 섞은 생일주를 제조하는 풍경이 있고, 처음 경험하는 타지에서의 자취 생활이 주는 외로움, 아직 고독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 20대의 공허함이 서로의 밤을 부르고 있었다. 즉, 술을 못 받는 체질인데도 연짝으로 술을 마셨단 말을 퍽 낭만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MT는 항상 즐거운 분위기였다. 여느 학번이건 분위기를 주도하는 유쾌한 인물이 몇 명씩 있게 마련이라, 그들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농담이 오가기 시작하고 모두가 이끌리듯 그리로 가까이 다가간다. 무례하지 않게 수위를 조절하되, 짓궂고도 익살맞은 목소리로 다른 이들을 놀리다 보면, 놀리는 사람도 놀림 받는 사람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도 어느샌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가닥을 잡는 즈음, 조별 대항으로 게임을 해 순위별로 소주병을 배분한 뒤 서로가 보는 앞에서 의리주로 다 해치우게 한다든지, 유행하는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을 따라서 '몸으로 말해요'나 '스피드 퀴즈'로 상품을 나눠주기도 했다.
술기운이란 보통 사람을 들뜨고 흥겹게 하기에, 과의 오락부장들은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하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지핀다, 충분히 달아올라 저절로 타오를 수 있을 때까지. 각종 게임과 벌칙주로 밤이 10시를 넘어간 즈음이면 다들 흥건히 취해들 있고, 쉰 명 남짓한 사람들의 취기와 체온으로 방이 훗훗하게 데워지고 난 다음에야 여태껏 레크리에이션을 맡은 친구들도 자기 몫을 다했노라 여기며 편하게 술자리에 끼게 된다.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수고했어'라는 덕담도 오간다. 이때부턴 두 개의 커다란 원으로 다 함께 둘러앉아 술을 마셨다.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그 흥겨운 분위기 속에 한 번도 새벽 1시를 넘겨본 기억은 없었다. 같이 어울리고 싶어 전날 일찍 자본들 자정이 넘을 때쯤 어느 구석에서 나는 졸고 있고 동기와 선배들은 나를 얼른 침실로 들여보낸다. 나는 남고 싶었지만, 그들로선 큰 원으로 둘러앉은 한가운데에, 도드라지게 졸고 있는 나를 가만 놔두기도 어려웠을 테다. 가장 빨리 잠에 들어 가장 늦게 일어나면, 이미 누군가는 다른 이들을 위해 북엇국을 끓여두었고 또 다른 이들은 자기 할 몫을 찾아 뒷정리하고 있었다. 아직 술과 잠에 절어 있던 나는 얼른 일손을 도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자주 사람들의 눈총을 사곤 했다. 우이동 계곡의 찬 새벽 공기를 맡으며 귀가하는 길, 그들은 간밤에 있었던 즐거운 사건들로 떠들썩했고, 취중에 몰래 나눈 긴요한 이야기들의 흔적도 드문드문 알아볼 수 있었다. 언제나 간밤의 이야기가 나는 궁금했다. 잔뜩 흥취에 오른 채 밤이 새는 줄도, 지칠 줄도 모르고 나누어진 이야기들이. 허나 이제와 되돌아볼 적에 비단 밤늦게까지 어울리지 못했다는 사실, 그들과의 추억 자체는 지금의 내게 중요한 것도, 이적지 미련할 그 무엇도 아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희구해도 되지 않던 것, 겪어보지 못한 그것, 내가 궁금해하고 또 미련해하는 것은 저들의 젊음이었다. 젊은 육체와 그를 닮은, 혹은 그 안에 담길 수가 있었던 젊고 싱그러운 정신. 그러므로 내 미련은 아직도 나를 멤돌고 있는 것이다.
스무 살의 젊은 육체들은 톡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을 쏟아낼 수 있던 도파민 공장 같았고 그 모습은 지척에서도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건 한 번도 몸소 느껴본 적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젊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거죽에 낀 나이테는 닮아 있었지만, 그 안에서 숨 쉬는 영혼의 시간 선이 서로 맞지 않았다는 것.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이해할 수 없던 것은, 그들 안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쾌감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설마하니 내게 한 줌 웃음이 없었으랴, 한 줌의 행복도 다정함도 사랑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지속됨이다.
내 안에선 굼뜨고 어렵사리 솟아나 채 반나절이 가지 않던 것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까지도 지속할 수가 있던 그들의 모습을, 그 사랑스러움을 오래도록 동경했다. 어떻게 저리 손쉬운 행복을 누리고, 또 그것이 유구할 수 있었던가, 흐르는 강물처럼. 유쾌함, 천진난만함, 무심한 자유로움에 더불어 무궁히 피어나는 웃음. 그런 사람들의 품 넓은 사이로 적당한 바람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적당한 인내, 적당한 배려, 적당한 무심함과, 마찬가지 적당한 관심, 그로부터 정다움이 피어나고, 나아가 그 정다움이 차츰 애정, 또는 신뢰로 변모해 가는 것을 나는 동경했다. 동경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함, 그것을 가지고 싶었다. 배우지 않고도 이미 몸소 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별다른 계기가 없는 한 그것이 탐구의 도마 위에 오르기 어려운 그 원리와 꼭 같이, 정반대 편으로부터 나는 그것을 탐구한다. 나의 20대는 저것, 온전한 젊음에의 탐구를 위해 바친 시간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꼭 재미있는 역설처럼 들리지 않는가? 젊은 늙음, 나는 부분적으로나마 젊은 벤저민 옹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다.
탐구의 과정은 이미 망각의 풍화를 거치며 희미해졌다지만, 새겨진 몸의 감각을 아직도 기억한다. 백주대낮부터 퀭하니 꺼진 눈밑덩, 볕이 성가셔 잔뜩 찌푸린 얼굴과 눈동자의 절반을 잡아 삼킨 눈꺼풀. 정오가 지나면 혼이 빠지는 듯, 등허리는 버티기보단 허물어지기를 원했으며, 의식 또한 까무러치기를 바랐다. 질긴 졸음과 간헐적인 현기증은, 쉼 없이 날아드는 연둣빛 봄바람같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것. 그때 이것은 식곤증과 춘곤증쯤으로 퉁치어 생각됐다.
이렇듯 시도 때도 없는, 아니 분절 없는 육체의 피로란 충분히 번거로움으로 여겨질 만하다. 그러므로 누군가 ‘왜 일찍이 네 상태를 자각하지 못했냐’라고 의문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흥미로운 것은 이 불편이 자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내 별것 없는 경험을 통해 드러내고 싶은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불편’을 특정한 내적 상태를 스스로 문제시하는 일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두자. 내적인 상태, 즉 피로감이라든지, 우울감이라든지, 명랑함, 쾌활함, 자신감, 기쁨, 슬픔, 활력, 건강 등을 스스로 문제시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것 같다. 이미지에의 비교, 혹은 감각에의 비교. 즉, 자신이 원하는 상에 빗대어 자기 이미지를 못마땅히 여기거나, 또는 자기 감각이 기억하는 정상 상태에 빗대어 그것의 문제적 다름을 인식하는 것.
전자는 차치하자. 적어도 피로라는 주제는 그 카테고리 안에 포함되지 않은 듯하다. 후자의 문제에 있어 주요한 것은 정상 상태와 그에 빗댄 비정상 상태를 각각 그 나름으로는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편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선 그것을 감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안을 감각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포착해야 하겠는데, 이 포착이란 상태의 변화를 추적하는 일이다. 내적인 상태가 하나로부터 다른 것으로 변화될 때,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감각, 혹은 이전으로부터 상실된 감각을 포착함으로써 두 가지 감각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모호하기 그지없는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태어남과 동시에 내적인 감정과 감각에 대한 절대 좌표계를 갖지 못했으며, 기나긴 상호작용과 사회적 학습을 통해 각자 자신만의 상대 좌표계를 그려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감정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인식 - 감각 - 포착은 상태의 변화를 추적하는 일이다. 아직 기쁨만을 몸소 느끼어 아는 어린아이에게, 그 기쁨은 아직 다른 상태와 구별되지 않으므로 그것을 특정하여 인식할 수 없다, 느낄 뿐이다. 기쁨이 우리가 익히 알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상실 혹은 슬픔이라는 상대적 경험이 필요하고, 이 상대성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구별한다. 그러므로 구별을 위해서는 상태의 분명한 변화가 필요하다. 마치 감정선이 기쁨에서 슬픔으로 전이될 때, 우리가 그 감각의 변화를 공간적으로 비유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양지에서 음지로, 초원에서 습지로 변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듯이.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내적인 감각의 인식은 이러한 변화와 그 변화된 것들 사이의 비교를 통해서 드러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비교군이 없으면 느낄 뿐, 구별되어 인식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어쩜 인식이란, 특히 이렇게 모호한 내적인 감각에 대한 인식이란 구획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인식이 없을 때에도 여전히 문제의식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들어서 아는 것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학습을 통한 가설로서의 문제의식은, 진지하고 분명한 것으로서 다루어지기는 어렵지 싶다. 사람들이 우울감과 우울증을 쉽게 혼동하는 것과 같다.
잠깐 여담을 하고 넘어가자면 나는 우울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지금껏 그러한 자기 확신에 찬 의문들에 투박하게 부정해 왔으며, 사람은 자기 생각을 거부당했을 때 그것의 해명을 요구하게 마련이므로, 개인적으로 정리해 온 바 우울증은 우울감의 지속이 아니라 우울감의 만성적인 편향 상태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내적 비교군이 희미한 상태로 정의한다. 편향성은 감정 상태가 자연스러운 인과에서 벗어났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인생이 극단적이지 않고서야 우리가 외적인 자극으로부터 가지게 되는 감정은 다채로운 분포를 지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단 우울증뿐 아니라, 어떠한 감정 상태가 만성적으로 편향될 수 있다면 우린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편향된 감각 바로 그것이 그 사람으로부터 의문 거리, 자각의 씨앗을 앗아버린다는 것이 나의 요지다.
그와 반대로, 그러니까 편향이 아니라 명확한 이유와 원인이 있을 때 특정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 이유와 원인이 제거되지 않고서야 그것이 지속되는 것마저도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우울한 상황에서 우울감을 느끼는 것은 이상과 관련된 아무런 징후도 가리키지 못한다, 그것이 일정 이상 지속되었노라고 아무리 강하게 피력하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비교군이 될 만한 정반대의 상황에서 무엇을 느끼는지가 주요할 터, 지금껏 관찰해 온 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비관적인 상황에서든 유쾌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감정 폭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재미있게도 그 이유를 자신의 성정이 무던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유쾌한 상황에서 자신이 마땅히 느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적 비교군이 없거나 희미하기 때문이다. 감정과 감각은, 우리가 말하고 가리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묘하고 미세하게 구분된다. 아직은 이 미묘함을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기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간접적으로 가리킬 수밖에 없겠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 그러므로 육체의 만성적인 피로는 인식되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 것은 문제의식으로 확대되지 않는다. 성가시긴 하지만 문제가 되지 못한 것, 문제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성가신 불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의식으로부터 먼 곳, 교외의 이름 없는 들판에 비석 없이 묻힌다. 잊힌다는 것. 마치 출퇴근 지옥철에서의 일상, 정시 출근을 위해 거리에 비해 훨씬 일찍 출발해야 하는 사정이라거나, 퇴근 후의 여가를 위해 조금이라도 탑승 확률을 높이기 위해 전략을 짜는 일 같이. 가장 가까이 있는 환승역 통로의 탑승구 번호를 알아둔다든지, 그리하여 두 정거장만 참으면 이 칸에서 사람이 다 내릴 것이라는 심산으로 어떻게든 엉덩이를 밀어 넣어 타는 동시에 무거운 침묵을 깨고 간신히 울려 퍼지는 주변인들의 소심한 핀잔 정도는 부러 외면하기로 한다든지, 자기 경험의 통계를 따라 사람이 가장 적게 몰리는 탑승구 번호를 가늠하고, 그럼에도 거듭되는 실패를 통해 요일별 변수를 다양히 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야근하는 일. 또, 직장인 수에 비해 너무 작은 상권과 터무니없이 짧은 점심시간이라든지, 그러므로 시간 내에 밥을 먹기 위해서는 항상 막내가 먼저 달려가 줄을 서야 하고, 눈치 싸움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인적이 뜸한 밥집을 언제나 찾아두어야 하는 것과 같이. 흔히 벌어지는 성가심들, 이 모든 것이 문제로 인식되던가?
이렇듯 자각되지 않는 육체적 피로 보다 곤란하고 긴박한 문제는 잘 가누어지지 않던 감정선의 문제이다. 감정의 문제 자체는 비교적 쉬이 자각하게 마련인데, 개인적인 이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게 사회적인 이슈로 비화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성격 문제의 일환으로서 자꾸 피드백이 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감정 문제로부터 수면의 질이라는 원인을 스스로 도출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한 것이 가설로라도 대두될 수 있었겠는가. 다 지나온 지금에 와서야 나는 두 항 사이에 숨겨진 인과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약을 먹은 후의 변화를 포착하고, 새로운 감각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과거의 인식을 정정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내 인성에 문제가 있던 게 아니라 늘, 눈 뜬 새벽 속을 사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그토록 예민하고 불안하고 염세적인 마련이구나, 하고.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 까닭이란, 내 감정 문제가 일종의 삼체문제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면증이 원인의 전부였다고 하기엔 미심쩍음을 느낀다. 질문을 다르게 하자면, 기면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모두 나와 같은 문제를 겪었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직 그것에 답할 수 없고 심지어 미심쩍게 느껴진다. 부정적인 천성과 우울증과 기면증은, 마치 태양 옆을 도는 두 개의 행성 같은 관계. 기면증이 감정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물론 우울증으로 인한 수면 부족은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그것을 태양의 자리에 놓아본들, 나머지 두 개 변수는 서로의 중력에 영향받으며 불규칙한 타원 궤도를 그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기면증은 배아나 출산 직후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상수로 놓아두자.
우울증은 기면증 특유의 도파민 수용체 장애의 결과일 수도 있으며, 이 경우 우울증은 높은 확률로 일어난다. 기면증을 대략 만성 피로 특유의 예민함과 염세라고 해두고, 우울증은 끝도 없는 우울감이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 조합만으로 감정 문제를 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겠다. 기면증과 우울증 두 가지 모두 진단을 통해 드러난 주요 변수이지만, 여전히 무엇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가설이 서지 않는다. 나는 이것의 인과를 모조리 추적해, 기면증과 심리 문제를 하나로 이어서 설명 하고도 싶었지만, 이런 사정으로 그건 여의치 않게 됐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 되어버렸으므로 과거의 서사를 추적하는 일은 그만두도록 하자. 이것의 외연을 최대한 묘사하는 선에서 나는 만족해야겠다. 이제 나의 감정 문제와 기면증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술하기 위해, 내키지 않지만 내 감정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다.
내 감정선의 문제는 다음의 케이스 정도로 효율적으로 요약될 법한데, 아마 그대도 살면서 한 번쯤은, 스치듯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딘가 비루하고도 볼품없는 행색 위에 아주 서슬 퍼런 가시가 촘촘히 나 있는 듯한 사람을. 불안, 초조함, 강박, 두려움, 트라우마, 패배 의식, 소심함, 이런 비루한 외투를 두르고 있는 한편, 이 모든 약함으로부터 태어나면서도 그 약함의 정반대 편을 향해 발작하듯이 매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반항적이고도 반동적인 감정. 말하자면 피해망상, 억하심정과 검게 곪은 인정욕구, 나아가 분노와 적의를 가시처럼 몸에 휘두르고 있는 사람을. 이해를 돕기 위해 더욱 가차 없이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하자면, 그 위세나 행색이 보잘것없어 우리 마음속에 일말의 진심 어린 존중, 즉 경외와 경애는커녕(진심으로서라는 지적은 중요하다. 우리는 학습된 예의나 자기 존중으로서 타인에 대한 존중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한 애호와 호감도 가질 수 없던 반면, 어딘가 께름칙하고 심지어 위험하게 여겨지는 사람의 이미지를 그대는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풍기는 어떤 소름 돋는 인상, 프랑켄슈타인을. 그리고 이러한 인상의 개념만을 기억해두더라도 나머지 사안은 각자 스스로 떠올려 감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전달하려는 바는 내가 그대를 가리켜 말함으로써 소통의 장애물에 가로막혀버렸을 것이다. 이러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을 독자들께서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자명한데, 왜냐하면 이러한 진술 자체가 사람 간의 우열 의식이 함의되어 있다기보다는, 그런 해석의 실마리이자 뉘앙스를 내포하고, 그것이 이렇듯 구체적으로 진술된 이상 그대는 은밀하고도 발칙한, 하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이 의식을 피할 수 없도록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제의 우리에게 그러한 의식이 발현될 때 그와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위험과 거부감을 함께 느낌으로써 차라리 그 사람을 피해버리게 되듯,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열된 문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허나 나는 그 사람을 깊이 이해하기에, 그건 다른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하나였기에, 그러므로 나의 말은 평가나 판단이 아닌 자기 해석이며,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냉정한 분석임을 분명히 해둔다. 일단 이 정도만으로도 내가 이하 언급할 성격 문제에 대해 그대들은 반쯤 거부하는 심경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어렴풋 이해하고, 여남은 이야기도 얼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를 돌이켜보면, 내 안에 가득 차 있던 소름 끼치는 어둠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걸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며 바뀐 것은 그것을 대하는 방식의 노련함이지, 그 감정 자체가 아니었음이다. 응당 성격과 감정에도 그 바탕이 되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니, 사람이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로부터 받은 씨앗이 있고, 그 씨앗이 틔워올린 싹은 장차 커다란 나무의 뿌리와 밑동이 될 터. 그렇다고 하여 갖고 태어난 천성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마찬가지 정반대로는 그 천성이 어디로 휘발되는 것도 아닐 테다.
한편 내가 천성을 강조하면 사람들 사이에 쉬이 긴장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익히 보아왔다만, 이는 여러분이 동의하는 ‘사람은 바꿔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오랜 격언이 가리키는 바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저 이러한 문장 표현의 낯섦만이 장애물임을 감안하길. 내 문제적 감정의 밑바탕은 어버이를 오래 관찰함에 따라 점차 명확해지는 무언가이다. 이제는 유명해져 익숙한 문장일 텐데, 우리가 혐오하는 부모의 모습은 장차 자기 자신에게도 발견된다든지,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거절과 거부의 심경이 격렬할수록 이때의 발견이 커다란 자기혐오로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정도로 충분히 설명될 것 같다.
아버지를 비롯해 부계에서 널리 확인되는 병적인 광포함과 모계에서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던 소심한 우유부단함과 완고한 고집스러움의 환장 콜라보. 바탕이 되는 두 가지 천성이 내 성격을 어떤 경로로 이끌었는지, 거기 우울증은 어떻게 끼어들었고, 기면증은 어떻게 작용했는지, 내 성격의 지도는 나조차도 어렴풋이만 짐작할 뿐이다. 허나 삼체문제라고 언급했듯, 이 여로를 규명하려 들면 글이 감당할 수 없이 무거워질 터이니, 그것의 외양만을 나열하는 편이 좋겠다. 지금은 많이 옅어졌으나 여전히,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내 안에 뿌리내려 있을 감정의 원형들을 음미하듯 찬찬히 굽어본다.
타인의 연민과 동정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그 속내를 폭로하고 싶어 하는 심보. 사람의 내면에 천착하고, 적나라한 진실을 토로케 하고자 집착하는 불안의 습관. 날카로이 벼려진 의심, 그 위로 해부되는 위선에의 경멸, 그러나 이타심을 볼 때면 어김없이 돋아나던 결핍, 그 모순됨. 우월한 이들의 뒷모습에 뿌리던 질시, 고통받는 내가 세상의 진리를 통달했다는 착각, 그리고 그런 나와 닮은 사람들을 향해서만 피어나던 검푸른 곰팡이 같은 연대. 도움을 청하기엔 일찍이 좌절로 학습된 공포에 의해 굳어버린 뒷목, 무력함을 고결함으로 왜곡하던 자만.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와, 나를 무시하는 것에 대한 과도한 증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
한편, 그런 자신을 목도하고 경악하고, 그럼에도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했다는 자각과 거기서 자라나는 자괴.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타인의 평화, 그에 빗대어 알게 되는 열패감.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기에 겪는 외로움, 어느 누구의 친밀함에도 가닿지 못하리라는 무력감과 소속되지 못한 고립감, 그것으로 빚어내는 초조함과 불안. 그러나 불안이 자아낸 각오는 다음 아침이 오면 잠에 휩쓸려 사라진다. 의식에 새겨진 문구는, 육체가 꺼지고 다시 켜지는 동안 휘발되고야 마는 기억. 각오가 쓸려나간 움푹한 빈 자리에 조금씩 고여 드는 것은 축축한 염세뿐.
대략 정리하자면, 바깥을 향해 뻗어나가려는 증오와 안으로 수렴하는 혐오. 바깥을 향해 분출되고자 하는 육체의 의지는 언제든 저 자신을 놓아버릴 준비가, 나를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레스의 전차마이다. 그의 충혈된 눈은 전장의 광기를 담은 붉은색과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반면 수렴하고 억압하는 슬픔은 그 말을 타고 있는 기수의 몫. 의식은 내릴 수 없는 말 위에 무용한 고삐를 쥔 채, 말이 가려는 대로 휩쓸려가며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무력한 기수, 또는 나의 어머니.
분출과 억압, 혹은 상승과 하강. 정반대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두 가지 감정은, 마치 수라도의 존재들이 투쟁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투쟁심을 더욱 키우고 그 탓에 죽어도 되살아나 끝도 없이 투쟁하게 되듯, 서로 얽히고설키며 자가증식처럼 끝없이 팽창하는 듯하다. 뛰쳐나간 분노가 자책으로, 자책이 억하를, 억하가 또 다른 분노로 이어지며 완벽한 순환 고리를 이루는 건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그것들의 고향이자 전장인 내 내면은 곧 터져 오를 것처럼 부글부글 뒤흔들리는 고독(蠱毒)의 도가니 같았으니 그 나름으로는 격렬한 에너지로 가득했고, 다 지나온 관점에 따라서는 다채로웠다고 하겠다. 다만 그때 그것을 바라보던 이편 나의 의식은, 들썩이는 도가니를 간신히 안아 들고 난처한 표정으로 뚜껑을 내리닫는 자. 20대 초반의 채 벼려지지 않은 의식에겐 난처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이쯤에서 기면증과 내 삐딱한 감정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는데, 이미 그걸 나는 삼체문제로 언급한 바 있다. 기면증 환자가 다 나와 같지 않을 것이나, 감히 예상컨대 우리가 공유하는 감정의 주요한 장애가 있으리라 믿는다. 늘 새벽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성정과 관계없이 예민함을, 그리고 도파민이 차오르지 않는 무기력함을, 나아가 자기 의지대로 조종되지 않는 자신으로부터 무력함을 느끼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론을 말해두자면 이건, 내가 일찍이 나의 상태를 알았더라면 좀 더 나았으리라는, 확신에 찬 회상. 타고난 천성대로 반드시 사람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듯, 단,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함의한다. 바로 이 통제의 어려움이 내가 가리키고 싶었던 바이며, 그것은 진단 이후에 내게로 주어지듯 다가온, 지금의 삶이 증명한다.
하여 당시 내 의식과 육체의 비유는 판도라의 상자. 다만 판도라에게 상자는 자기 존재가 아닌 바깥의 것이므로 내 경우도 엄밀히 말해 상자를 육체로, 판도라를 의식으로 두어야 옳을 것이다. 나아가 판도라는 호기심 때문에 단 한 번의 실수로 항아리를 열었고 그것으로 그녀의 죄악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뒤집어보면 그녀가 겪은바 호기심과 두려움의 줄다리기라는 실존적인 고뇌는 단 한 번뿐이었으므로… 그것에 비하자면 나와 내 상자의 고뇌는 사안의 진중함이야 두말할 필요 없이 하찮겠으나 비극성은 더 짙다 하겠다. 상자가 열리면, 한 번에 한 명씩의 사람을 잃어버렸다. 그러면 다음의 사람을 찾아 나서고, 시험은 반복된다. 더 잃을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그럴 리가, 세상에 사람은 많고, 사람을 갈구하는 본능은 마르지 않는 바다처럼 하냥이 없으므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헌데 이러한 고뇌가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 그대들도 다들 일정 자신을 참고 살지 않았겠는가. 고로 누구에게나 자신이란 존재는 상자와 판도라, 육체와 의식으로 이원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데, 진정 그것을 심각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도의 차이이다. 나의 문제란 그 누구도 공감할 수 없을 기상천외한 일이 아니라, 정도의 문제였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정도의 차이에 대한 이유, 또는 변명을 기면증에 끌어다 데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염려가 글을 내 생각보다 길게 하고, 결국 2편 안으로 끊어보겠다는 초기 의도는 언제나처럼 무시된다. 그러나, 그러나 내 지금 진실로 우려하는 것은 내 말의 진실성이 아니이다. 혹 내가 스스로를 곡해하고 미화하는가, 그릇된 정보를 생산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나는 염려하지 아니 한다. 고뇌도 투쟁도 더없이 충분했으므로 이상 나 스스로에게 증명할 것도 그럴 필요도 없으며, 오직, 전해질 것인가만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렇게 길은 길어지고...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