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To. X

연극 키리에 후기

by 풍금이 있던 자리


[국립정동극장] 2026 연극 키리에_포스터 ©국립정동극장.jpg



일정 내에 프로젝트가 끝나리라는 심산으로 목요일에 연극 신청을 한 것은 오산이었다. 과거 오산으로 출퇴근하던 사정보다야 곱절은 낫다지만, 남양주 다산에서 출발해 시청역 저녁 공연을 가는 건 아무래도 부산스러운 일이다. 2번의 환승과 3번의 탑승 내도록 부리나케 달려야 했으니 원. 경의선에서 1호선으로 환승하는 회기역은 내리고 타는 사람이 많기도 하다, 그들을 비집고 내달리는 동안 어딘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만, 그보단 성가시단 생각이 썩 가깝다. 봄은 밤을 조금 늦추어 두었건만, 시청역 4번 출구로 토해지니 봄밤 어스름은 짙기도 하더라.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 맥도날드에서 빠르게 끼니를 때웠다. 혼자 먹는 사람이 많아 편하다. 직장 근처 식당을 잘 가지 않게 되던 건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대는 넥타이 부대 탓, 이건 아무리 그럴듯하게 써봤자 결국 외로움이야. 더구나 이곳은 우리 회사 근처, 프로젝트 때문에 6개월 만에 들른 차 자칫 회식하는 무리와 마주해선 곤란하다. “어, 너 상덕이 아니냐? 네가 여기 왜 있냐? 너 프로젝트 때문에, 거…. 어디더라?” “아, 예, 남양줍니다.” “그래, 거기 있어야 하잖아?” 거기다 연극을 끌어다 대는 게 나는 싫다, 비단 그게 이유의 자리에 가져다 댈 유일한 사실일지라도, “여언-극? 니 그런 것도 보냐?” 이런 대답에다가는 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 뒤이을 답변은 점입가경이다. “여자 친구 생겼냐? 아님 여사친이 같이 보자 하든? 오올- 이 새끼-” 내 답도 기다리지 않고 쏟아질 정해진 레퍼토리들, 정해진 질문과 그에 상응하는 답변들로만이 이뤄질 대화의 오고 감은 침묵보담 못 해. 남초 회사에서 혼자 연극 보러 다니는 사내의 사정이란, 대충 이렇게나 시시한 일이다. 그러니 연극을 보는 것도, 책 읽는 걸 좋아하는 것도, 심지어 이렇듯 아주 글까지 써대는 걸 그들은 모른다.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 마치 “그걸 하면 쌀이 나온답디까?”하고 물어오는 농부들의 눈망울 같다.


지난주에도 연극을 보러 명동 극단에 들렀다지만, 명동의 반대편인 이곳, 북창동과 무교동은 회사를 중심으로 동서로 벌어져 그 분위기부터 완연한 것이, 여행객들의 메카와 직장인들의 카타콤처럼 다르다. 20시인데도 직장인들의 교복인 쥐색 패딩 코트로 거리와 식당이 가득하다. 나는 햄버거를 15분 만에 대충 삼키고 빠르게 길을 나섰다. 담배를 피워야 하기 때문이다. 흡연자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담배 피울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매끈한 모공 같은 전면 유리창으로 잘 빠진 콧날처럼 오똑한 모양을 해둔 서울 시청, 저 가슴 떨리는 사내의 옆 얼굴을 똑바로 치어다 보는 이편 맥도날드 건물, 한편 그 우측에서 맥도날드를 사모하듯 바라보는 낡은 서울기원 건물은, 재미있는 삼각관계의 메타포. 곧 쓰러질 듯 남루한 그 건물 앞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와 시궁으로 뒤덮여 있어, 거리가 그 건물 모양새와 닮아 져 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 같은 그곳이야말로 흡연자들의 고향, 마치 비둘기의 낙원 같은 그곳으로부터 서울기원과 같은 방향으로, 즉 맥도날드를 바라보며 담배를 쪼개 폈다. 1, 2층 나란히 차창 앞으로 혼자 밥을 먹는 사람들이 보인다. 반상을 피듯 핸드폰을 거치한 사람이 태반이나, 한 둘 정도는 핸드폰도 없이 멍하니 바깥을 치어다보며, 습관적인 저작활동을 행한다. 담배는 상념을 부르고, 나는 저 얼굴이 조금 전까지의 내 얼굴이었을까 생각도 해본다마는 청승 부릴 시간이 없다.


오늘 연극이 있는 정동극장 세실은 덕수궁 정면 기준 우측 편에 있는 자그마한 공연장이다. 정동극장은 덕수궁 좌측 돌담길을 따라 쭉 들어가 그 끝에서 우측으로 꺾자마자, 번화한 세종대로와 단절된 것 같은 정적에 정동제일교회를 벗하여 오똑한 불을 밝혀두었다면, 세실에선 세종대로와 차량들과 버스와 경적소리가 훤히 다 보인다. 시청역 4번 출구 앞에서 길을 건넜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멀리 이순신 동상 너머로 주말 BTS 특설 공연을 위한 가설무대가 보인다. 다가오는 토요일 복귀 무대라던데, 얼만한 인파가 몰릴지 감도 안 온다. 우리 회사는 그로부터는 엄청 먼데, 건물 폐쇄 공지 메일이 떴다. 근처 빌딩들도 그 전날부터 모조리 출입 금지 조치를 하나보다. 멀리서 보는 저 빛이, 기분 좋은 해치의 핑크빛이 조금만 아름다웠다, 멀어서 그러하고, 멀기 때문에 그렇다.



** 초강력 스포 및 우울주의 **


[키리에] 2023 공연사진 1 ©국립정동극장.jpg


무대가 비어 있다. 텅 빈 무대 위로 나래이션이 흐른다. 신선한 시작. 나긋한 여인의 목소리, 음색은 따뜻하지만 말투는 어딘가 딱딱하다. 이 집의 건축가였다는 그녀는 젊은 나이 치열하게 일하다 과로로 죽었고, 갑자기 집이 되었다. 이른 나이에 인정받기 위해, 낯선 독일, 이국인들의 의심 섞인 눈초리를 이겨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동경을 사기 위해 영혼을 다 바쳐 집을 설계했는데, 그 영혼이 집에 근저당이 잡히다니 이런, 딱하기도 하지.


줄곧 흐르는 나래이션 한 켠으로 어느샌가부터 발소리가 끼어들더니, 설마, 이 시간에 객석에 들어서다니, 그것도 보무도 당당한 저런 성큼 걸음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는 순간 배우가 눈앞을 곧잘 스쳐 지나간다. 집의 영령이실 그녀가 무대 위에 올라, 텅 빈 그곳을 서성인다. 장장 25년을 이 빈집에서 홀로 이야기한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로워 미치지 않도록. 더 할 말도 없지만, 계속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언제까지고 그렇게, 언젠가 이 집에 사람이 들어설 때까지.


여자는 집이 되었다. 그건 이 집이 곧 자기 몸이자, 장기가 되었다는 뜻. 봄이 되면 벌레들이 집을 갉아 먹으며 파고든다, “간지러워”. 이따금 까닭 없이 차오르는 사무침에 눈물이 흐르면, 집에 물이 새듯 벽을 타고 눈물이 흐른다, “으, 곰팡이 싫어하는데.” 진중한 궁신거림과 맥 빠지는 농담이 넘나드는 것은, 장차 이 극의 주된 정서이자 전개 방식이 된다.


새로운 여인이 등장한다. 나이가 지긋한 저 여인, 엠마는 극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배우로서 평생을 단련한 듯 곧고 유려한 몸짓을 펼친다. 그녀는 독일의 무용단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인 배우였고, 에우리디케 역을 맡은 그녀는 하데스와 사랑에 빠졌다. 납치범 하데스와 사랑에 빠진 에우리디케의 세계선이라니, 스톡홀름 신드롬을 연상시키는 그들의 러브 스토리는 허나 뻔한 알레고리를 따르고, 2년의 뜨거운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 하자마자 남편은 근연화증 판정을 받는다. 두 사람이 받아 든 대본이 아무래도 ‘하데스 타운’은 아니었지 싶다.


무대 위에 자신의 곧고 당당한 육체를 전시하며,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확인받는 무용수로서 근연화증이 그 얼만한 심연일지를 나는 다 알지 못한다. 다만 남편은 점차 하데스에 걸맞도록, 상징이 아닌 사실로써 낮아지기 시작하고, 그녀를 향해 차오르는 질투는 해소될 길 없이 증오와 원망으로 떨어져 함께 빙글빙글 추락하기 시작한다. 차라리 버리고 떠나야 하는 순간, 분분한 낙화처럼, 서로를 위해 모질게 내쳐야 할 것을 그러나, 그녀는 멋진 그랑 쥬떼와 함께 이혼 서류를 내던지는 대신 자기 자신을 계단 위로 던진다. 그래야 춤을 못 출 테니까. 그래야 당신이, 당신의 지독한 시기와 한과 독이 서린 질투가 멈출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대야, 인간의 심연이 그리 단순하지 않잖아.


인간은 너무 약한 것 같아, 더구나 육신이 약해지면 마음은 터무니없이 무너져. 어쩌면 우린 육신의 건강함으로 마음의 나약함을 떠받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홀로 빛날 땐 질투가 되던 것이 자신으로 인해 무너져 기꺼이 어둠으로 떨어지면, 아 간사하게도, 그대는 그 못난 사내의 자기혐오의 대상이 돼. 죄책감, 그 외 다른 어떤 마땅한 것에 있어서든 마찬가지로,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아픈 사실을 안아 들 심장의 강인함을 전제해. 그러니 저 사내의 마음 안에 구원이, 용서를 청하는 겸허함의 자리가 있을거나. 그런 건 아주 범상하고도 대단한 인내력을 요하므로, 사실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할 시시한 보통의 인간, 그와 동시에 택해볼 대안이 없는 인간의 나약함은 지독한 어둠으로부터 기묘하게 왜곡되기 시작하고, 연민과 자책으로부터 비릿한 쾌감을 느끼며, 자신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볼모 삼아 핑계 같은 자기혐오를 일삼지.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다니. 두 사람은 뒤틀린 황천의 가을 연가를 찍고 있는 것 같다, 비극이 된 천년의 사랑. 과연 떠나감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가 보아, 어머니, 그대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어?


두 사람은 그렇게 머리에 하얀 서리가 앉도록 서로의 곁에 머문다. 남편은 엠마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마저 핑계 같아. 저 비겁한 마음, 비극의 주인공을 자처해서 그녀를 끊임없이 구속하려는 게 아닌가? 근연화증에 걸린 그대야, 그대가 진심이었더라면 열심히 몸을 움직여 계단으로 자신을 던졌어야지. 그녀가 그대를 위해 그러했던 것처럼. 그 마음이 진정 뒤늦은 일말의 사랑이자 죄책감이자 동정이, 즉 진심이었더라면 말야.


[키리에] 2023 공연사진 4 ©국립정동극장.jpg


엠마는 죽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제나 목숨은 생각보다 질기고, 죽고 싶단 말로는, 절규에 피 가래가 섞인들 외침만으로는 죽지 않아. 아- 잘 알지, 그걸로는 사람이 죽어지지 않아. 관객인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두 사람의 거짓 기도이고, 그렇게 엠마는 결정을 보류하며 인적이 드문 집을 찾아 떠난다. 그렇게 집의 영령이 맴도는 혼팅 하우스, 자살자들의 핫플레스인 검은 숲 기슭에 위치한 그 집에 당도한다.


검은 숲에서 죽은 자의 시체는 금방 사라져 버린다고 해, 마치 숲이 시체를 삼켜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래서 이곳은 자살자들이 찾아온다. 응당 그런 곳에 여인숙이 있다한들 장사가 얼마나 되려나. 아니지, 오히려 마지막을 임하였기에 아낌없는 지출을 꾀할 수도 있지 않으려나. “검은 숲 가기 전 마지막 여인숙!” 하하 실없는 생각이지. 어쨌든 집은 25년째 인수자가 없었고, 사람을 고대하던 집의 영령은 엠마를 보며 반색을 표한다. 심지어 아는 얼굴, 집은 엠마의 에우리디케를 기억한다. 당시 그녀의 연기에는 혹평이 가득했다. 너무 밝고 힘차고 명랑하다나. 그도 그럴 것이, 저승에 납치된 여인이 너무 발랄한 그랑 쥬떼를 그야말로 ‘갈겨’ 버린다면 관객된 입장으로선 심히 벙찔 법하다.


에우리디케에 걸맞지 않은 그녀의 심장은 역설적으로 그녀를 아직 살아 있게 했고, 이것은 좋음, 그러나 여전히 남편 곁에 머무르게 했어, 이것은 유감스러움. 그래서 삶은 역설이지, 명랑한 그녀의 심장. 감정은 이지가 아닌 심장의 권속, 필요로 인한 감정과 머리가 애쓰는 몸짓들에는 미세한 균열이 나 있어, 우린 그 이면의 진정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저 모습의 자연스러움이야말로 그녀의 심장과 에우리디케와,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혹평을 모조리 가리킨다.


조금 전까지 죽을 것만 같이 굴며, 염세의 바다 위에 몸을 뒤적이며 고통을 말하던 그녀는 오래 방치돼 곰팡이가 슨 집을 청소하며 이내 콧노래를 부른다. 한편, 마치 한 순간에 전환되는 막처럼 감정 전환이 너무 급작스러웠지만, 그래서 낯설었지만 저러한 전환이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실제의 일임을 안다. 충분히 설명하지도 설득하지도 않는 서사에 대한 내 습관 같은 반감이 떠오르자마자, 어머니 당신의 햇살 같은 얼굴이 떠올라 그 감정을 가슴 깊숙이 내리누른다.


이렇듯 소재 자체가 음험하고 을씨년한 까닭에, 연극은 명랑한 톤을 유지하려 한다. 마치 심도 깊은 바다를 잠영하는 듯이, 서사를 전개함에 따라 높아가는 음울함을 실없는 태도와 뜬금없는 농담을 통해 거듭 완화하려 애쓴다. 잠항과 부상을 번갈아 가며 심도를 맞추어대기라도 하는 양, 배우들의 코믹한 태도가 수시로 풀어대는 긴장감은 오히려 어이없는 감정인, 허탈함에 더불어 은연중 안도감을 자아낼 법하다. 깊이의 극한과 진지함을 기대하는, 아마 그 비중으로 가늠했을 제 1할에 미치지 못할 여느 관객께서는 이러한 극의 태도가 아쉽기도 할 테지만, 실지 극은 이 리뷰가 형상하는 음울함의 반의반도 미치지 못하므로 관극을 희망하시는 대부분의 관객분들께서는 안심하시기를.


엠마는 장난처럼, 희극처럼, 수상한 버섯으로 초콜릿을 만들며 손님을 기다린다. 이내 첫 손님으로 관수라는 사내가 하나 찾아왔다. 그는 소설가였다, 였나? 지금은 꽤 멀쩡해 보이는데, 그가 읊조리는 독백은 그도 만만찮은 사내였음을 가림 없이 전한다. 마치 엠마의 남편같이, 변변찮은 소설 하나 써내지 못한 소설가가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으며,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젖은 채 서로의 목을 졸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그녀, 선재는 성공적으로 관수를 떠났고, 그의 곁엔 강아지 한 마리만이 남았다.


[키리에] 2023 공연사진 6 ©국립정동극장.jpg


강아지의 눈빛은 주인만을 향한다. 헬리콥터 꼬리는 멈출 줄을 모르고, 사랑이 담뿍 담은 응시도 끊길 줄을 몰라, 시간을 망각하는 하염없음이란 오직 강아지만의 사랑이다. 지상에 이런 존재가, 이런 사랑이 다시 있을까. 그런 강아지에겐 ‘나’라는 사람이 전부이고 곧 세계이다. 내 상대적인 가치 따위와 상관없이, 마치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생각하게 만들게 코딩된 오리처럼, 나는 물과 사료와 약간의 관심과 쓰다듬만으로 너의 세계이자 신이자 전부가 된다. 그래서 난 그게 싫어. 이토록 오랫동안 무관심했는데도, 고향집 어귀에 들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 냄새를 기억하며 흔들리기 시작하는 너의 꼬리가 무거워. 염세와 학습된 좌절을 이기며 봄과 새싹처럼 돋아나는 그 꼬리가, 하루 온종일이라도 나를 쳐다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너의 응시가. 나는 자처한 적 없이 바란 적도 없이 너의 신이 된다.


완전한 무력함에 식음을 전폐한 그의 곁에 다가와 뺨을 핥은 강아지, 배가 고프면 곁에서 질릴 때까지 낑낑대며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 그러므로 말 그대로 강아지가 사내를 살렸다. 그리고 그 강아지는 이제 없지. 사내는 삶을 지탱하는 마지막 끈이 사라진 다음, 검은 숲을 찾아왔다. 완전한 어둠이 깔린 숲으로 들어서기 전, 숙소에서 하루 묵는다. 한편 돌아올 길을 전제하지 않았을 때, 내딛는 걸음걸음에는 망설임이 사라지는 법.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굳이 하룻밤 묵을 필요 없이 곧잘 검은 숲으로 들어가도 상관이 없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어쩌면 사람의 깊은 무의식은 마지막까지 죽음을 지연할 이유를 찾아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튿날 그는 짐을 챙기고 길을 떠난다. 엠마는 이곳이 죽음의 천국, 아니, 하데스의 입구임을 잘 알고 있지만 섣불리 만류하지 않는다. 아마 그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 대신 따뜻한 말에 감싼 초콜릿을 하나 건넨다. 환각버섯으로 만든 초콜릿을 성가신 쓰레기인 양 주머니에 챙겨둔 채 관수는 검은 숲에 들어섰다, 숲의 심장에 다다르고, 마치 “갈 땐 가더라도 담배 하나 정돈 괜찮잖아”라고 말하는 듯, 관수는 목을 매달 밧줄을 바닥에 던져둔 채 담배를 꺼내고, 그러다 담배 대신 손에 걸린 초콜릿을 호기심 삼아 먹고, 이내 환각의 세계로 빠져든다. 저기, 강아지가 달려온다. “너야, 정말 너야, 내가 널 못 알아볼 리 있겠어! 이런 미친 불법 초콜릿!!!”


둘은 서로를 안고 안기고, 미친 듯 뛰어놀며 개가 내가 되고 내가 개가 되고 그렇게 너영나영 어우러진다. 환각이란 연극에서 참 편리한 장치이다, 핍진성을 초월한 그 세계 안에는 무엇이든 제약 없이 등장시킬 수 있기 때문에. 둘은 함께 달리다가 배경은 천변에서 한강을 지나 마침내 그 위에 떠나간 선재를 불러오고, 주인공은 이러한 시공간적 전개가 이미 내포하고 있는, 그 전통도 유구한 깨달음에 도달한다. 선재가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을 자신의 바깥에서, 제3의 시선에서, 온갖 감정과 피해망상이 말끔히 씻긴 눈으로 다시, 다르게 바라본다는 것과 그것이 일게 하는 어떤 깨달음의 전형. “그래 그거였구나, 이해했어. 너는 나한테 살라고 말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환각은 빠르게 깨지기 시작하며 개는 늙어가고, 임종의 때에 그에게 “살아”라고 말한다. 꿈에서 깬 그는 숲의 초입에 도달하고, 그렇게 살았다. EP 3, 끝.


[크기변환][꾸미기][키리에] 2023 공연사진 7 ©국립정동극장.jpg


BGM - To. X, 태연


다음, EP 4. 목련과 분재라는 두 여자가 등장한다. 둘은 아주 대비되는 캐릭터로, 서로의 존재가 서로의 가려진 부분을 드러내는 거울의 알레고리를 따른다. 이러한 알레고리 작법에 의거해 EP 4의 결말을 먼저 말해두자면, 사람의 우울과 그것이 뿌리내리는 자괴의 감정이란, 자신의 여러 면모 중 어느 한 가지 부정적 면모에 너무 깊이 천착한 나머지, 그 외의 좋음을 간과해버린 결과일 수도 있다는 메세지를, 두 명의 상반된 인간이 서로를 구원하는 스토리를 통해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목련은 아주 쾌활하고 유쾌한 여인이다. 시종 웃음이 끊이지 않고, 사소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며, 어쩌면 과할 정도의 겸양이 몸에 배어있는 그녀는 멀리서 바라볼 때 우울과의 연관성을 알아볼 수 없다. 일종 조증 같기도, 어쩜 너무 커다랗고 온유한 사랑 속에 길러진 것 같은 그녀의 캐릭터성. 그러나 서사가 전개됨에 따라 조금씩 불길한 징조들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어쩜 저 밝은 웃음도, 깊숙이 가려진 것들 위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어둠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조리 가려진 것으로써 태어난 까닭에 매끈하고 유려한 것이 될 수 있던 것은 아닐지 의심케 한다.


목련은 잠꼬대가 심했고 울면서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절규한다. 자세한 전후 사정은 드러내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문제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암시한다. 그녀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사랑스러움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그녀를 더욱 싸구려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아를 버린 사람은 손쉬워져, 그리고 갈급하는 사랑의 온도와 색깔을 막론하지 않는 맹목성은 사랑이란 이름 하의 모든 쓰레기들을 그러모으지.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손쉬운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포착해, 그리고 길들이기 시작하곤 했다. 마치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난 까다롭고 힘든 아이라, 그런 피곤한 생각만 한대.” 그녀는 사소한 실수에도 벌벌 떨며, 땅을 기며, 두 손을 비빈다, 학대의 흔적, 그러면서도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는 존엄이라는 최소한의 선을 벗어던졌다. 외로움과 갈급함이 곧잘 맹렬한 사랑으로 연금되는, 딱한 치환의 과정은 허나 그리 가엾기만 하지 않아. 최근엔 결혼반지를 낀 손으로 얻어맞았고, 며칠 전엔 택배기사와 한바탕 몸을 뒤섞기도 했다지.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이, 아무런 죄책도 자각도 없이 그런 말들을 주워 삼키기 시작하면 그 심연의 깊이 앞에서 조금은 아연해진다. ‘미식 블로거에게 연락해 따로 만나 비싼 와인을 얻어 마시고 같이 자고, 그걸 반복하고, 그러다 잠만 자기 시작하고, 언젠가부터 그 사람들은 나를 때리기 시작해. 근데 그게 맞는 것 같았어. 내가 맞아도 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버림받으면 또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잠을 자자고 유혹했다. 언젠가부턴 잠만 자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연민했다, 허나 동정은 하지 않아.


J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와 나는 사람이 없는 술집에서 만났다, 그녀는 손목을 까서 5개로 그어진 선을 보여주었다. ‘자 이제 나를 소름 끼치게 생각하곤,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며 황급히 자리를 떠야지?’ 하는 염세적이고 오만한 눈빛을 던진다. 그러나 그런 허세는 두려움과 자그마함으로 비칠 뿐이야, 무던한 나의 응수에 놀라며 이내 위험한 미소를 짓기 시작하던 그녀의 눈, 탁자 밑에서 치마를 들어 올려 허벅지에 자해의 흔적이 있다고, 보려면 볼 수 있다고 유혹한다. 다행히 내 자존심은 턱없이 강했다. 그러자 너는 협박하기 시작했어. 네가 날 안지 않으면 집 앞의 바에서, 돈 많고 역겨운 4~50대 아저씨에게 오늘 나를 던질 거라고. 여전히 나는 그녀를 연민할 뿐, 동정하지 않았다. 관능적이고 파멸적인 길티 플레져가 나를 자극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틈을 보이면 집요하게 물어 들 것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런 채로 물었다, 무엇 때문이냐고, 너는 그것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고, 투명한 눈으로, 오직 낱말이 가리키는바 그것만을 질문했다. ‘그게 나를 가장 효과적으로 괴롭힐 수 있으니까, 나는 내가 역겹고 혐오스럽기 때문’이라고 J는 말했다.


나는 섹스에 자신을 내던지는 여인들의 심리적 인과를 아직 꿰뚫어 이해치 못해, 위험하고 발칙하지만 궁금해, 심리학자 같은 호기심, 모르는 것에 대한 수집 욕구. 적어도 나는 그걸 한눈에 불길하게 여기거나 퉁치어 욕보이지 않을 만큼은 지연하고 기다릴 줄을 아니 자격 요건쯤은 충분하리라 생각한다만, 그것의 탐구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섹스를 통해서 온전히 욕구 되기를 바라던 사람의 기억도, 섹스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 최고의 자해를 도모하던 사람의 기억도 있지만, 내가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우리 관계는 유지될 수 없었어. 내가 바랐던 것은 탐구와 이해와 소통, 공정함을 위해 가차 없이 내 손 패를 까자면, 공유된 비밀을 통해 우리가 더없이 친밀해지길 바랐을 뿐이지, 너와의 위험한 게임에 들어 함께 파멸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키리에] 2023 공연사진 3 ©국립정동극장.jpg


반면 분재는 그와 정반대의 사정을 따르는데, 실로 그 구도가 거울처럼 대비된다. 목련의 요란한 잠꼬대 탓에 잠들지 못한 분재는, 한밤중 벽을 바라보며 자기 뺨을 친다. 전형적인 자기혐오, 그녀는 죄의식을 느끼거나 자신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여길 때마다 자신을 극심히 몰아세우며 혹사해 왔다. 그녀의 독백에서는 꽤 많은 기억들이 비릿한 달콤함처럼 기억 속에 떠올라,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종교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희생의 개념을 잘못 배운 듯한 그녀는, 자신에게 희생이 아주 손쉽다고 말한다. 그저 내주기만 하는 것은 쉬워,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의 장기마저 누군가에게 기증했다고 전한다, 조금은 극단적인 설정. 하지만 그런 설정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야, 그녀의 문제적 본질, 그녀가 뜨거운 자기혐오를 통해 끝없이 고해하게 만드는 것은 희생과 이타의 순수성 문제이다. ‘내가 나 자신을 퍼주려 할수록, 사람들은 내게로 다가와 품을 파고들고, 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과 말들을 건네. 나한테 흐느끼고 고해하고, 나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평가하지 않아,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말을 건네, 지치지 않고, 끊임이 없이. 그러면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남김없이 내게 주었어. 하지만 그건 선물이 아니라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것, 뭐랄까, 내 두 팔과 다리에 완전히 매달리는 것 같으니까. 그 모습은 너무 역겨웠어, 그리고 그 감정은 곧잘 자기혐오가 돼, 나는 내 뺨을 쳤어.’


Y와 M과 두 명의 K가 기억난다, 어디서도 이해받을 수 없던 당시의 우리들,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못한 당시 우리들이. 그때 내 고독이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너희를 듣고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외로움이라는 필요에 따른 것이기에 나의 것은 희생이 아니라 인내였고, 순수성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나는 내 뺨을 때리지 않았다만 그 안아냄이 버거웠다는 것과, 그 터무니없는 노력, 결말이 정해진 관계의 끝에 외로움보다 깊은 외로움이 자리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러니 내가 정확히 공감하는 것은 분재의 자기혐오가 아니라, 분재가 느낀 그들, 버려진 자들에의 역겨움과 역설적인 외로움의 깊이이다.


이해받을 수 없던 우리, 음울한 내가 음울한 너희를 들었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드문 존재인 동시에, 내 안에 결코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오기와 타는 불꽃 같은 생명력이 있음을 알아주었다. 부나방처럼 이끌리던 너희를 기억한다, 하지만 불완전한 것인들 유대감은 너무도 달콤했고 그렇게 외로운 우리의 동행은 시작됐으며, 나는 그것이 영원하길 바랐다. 그것이 영원일 수 있도록 내가 강인하기를, 너희가 내 심장에 매달리는 무게만큼, 그토록 강인하기를 바랐고 심장의 영역을 넓히려 애썼다. 치밀어오르는 반감과 억하심을 삼켰고, 직관적으로 이해되긴커녕 버거운 몸짓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려 들었어. 하지만 우리의 끝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겨우 한 명의 사람으로서 너희를 흘림 없이 담아낼 수는 없는 거였어. 매달려 오는 그 마음들은 아귀와 같아,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것들로는 다 채워낼 수 없었으니까.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만취해 길에 퍼질러 누운 몸뚱어리처럼 무겁고 끈적이고 흐느적거리곤 해. 그러므로 두 사람, 정확히는 버티는 사람의 인내가 다할 때까지만 유지될 수 있는, 누군가의 인내와 희생으로만이 영위되는 불완전한 동행이었음을 나는 열렬히 기억해. 그리고 너희는 끝없이 나를 시험했지, 시험의 끝엔 더 가혹한 시험이, 다름 아닌 너희의 불안이 바람 위에 놓인 풍등처럼 자신을 몰아댔고, 그 불안과 의심의 습관은 지독한 동시에 달콤한 가시 둥지 같은 것이기에, 스스로 매듭짓지 않는 한 결코 그치지 않는 것임을 알아.


이런 것으로써 분재를 이해한다. ‘너희가 버거워, 실은 내 마음 땅에 떨어져 너무 힘겨울 때, 너희를 조금 밀치어 나 자신을 쉬게 하려 하는 순간 너흰 날 원망했어. 왜 날 미워하는 거야. 그렇게 해주었는데, 모든 걸 다 주었는데, 그렇게 오래도록 참고 인내하고 오직 주기만 했는데? 사실 나는 사랑받고 싶었어, 나도!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 주기만 하면 얼마쯤은 되받을 수 있을 줄 알았어. 조금은 말야. 그래서 성직자가 되고,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원하는 걸 다 들어주고, 심지어 골수와 장기도 줬는데, 왜 나를 사랑하지 않지? 왜 나는 주기만 할뿐 받지 못하는 거야.’


외로운 내가 이해될 곳을 갈급하였듯이, 내가 너희의 드물고도 유일한 쉴 곳으로 인식되는 순간, 너희는 조절하지 못해, 그럼 집착이 되고, 관계는 비틀렸다. 그래서 나는 내 욕망, 충족되지도 해소되지도 않아 오래 쌓인 욕망을 스스로 매듭짓고 있어, 아직까지도, 쌓여온 나날만큼 아마 더. 사랑받기 위해 그저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 나와 분재와 한 명의 K와, 그 외 우리 같은 사람들, 외로움의 속삭임이 마음의 관대함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범하는 커다란 실수는 아마, ‘이기심’의 간과가 아니었을까. 자기 자신을 위해 타인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수용의 범위를 터무니없이 넓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어. 너를 위하는 것이 곧 나를, 내 외로움을 위하는 일이 되어버린 이상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동시에, 분별하기 어려운 감정의 도가니탕이 되어버림을 잘 안다만,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엄정한 분별이었음을 생각한다.


두 사람 사이에 설정되는 ‘선’, 어디까지를 나는 용인하고, 어디부터는 용인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 받아들임을 위해 그 선을 내 몸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그어버리는 것은 아량이나 관대함이 아니라 기실 외로움이요, 상대에겐 일종 비굴함이자 손쉬움으로 비칠 수 있으며, 그만큼 자신의 값어치를 낮추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이제는 고려할 수 있게 됐다, 산술적으로. 한편 위태로운 상대는 응석처럼 우리의 선을 물리기를 강짜로 요구해 올 테지만, 그건 함정이야.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그 요구가 무엇을 불러일으키는지도 알지 못하며, 그 결과인 파멸은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어. “나 아님 누가 그런 세상 안아주겠어?” 하하, 마음 약해지지 말아,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 말야.


어디까지가 진정 너를 위함이고, 어디부터는 실상 나를 위함인지. 너의 요구 중 어떤 것이 나의 기꺼움이자 기쁨이고, 어떤 것이 부담이자 부채가 되는 것인지. 반론의 눈길, 주저와 망설임 속 완고하게 저항하는 익숙한 눈빛들이 선하네. 허나 자기 의지를 과신하지 말아, 보상 심리란 건 의지로 버텨낼 수 있을지언정 불식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너의 요구 중 나에 반하는 것과, 나의 요구 중 너에 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 우리 관계 속 “나”의 위치를 우리는 분명히 해두어야만 했다. 두 사람 사이의 선,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화와 배분이야말로 관계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 성숙한 두 사람이었더라면 기어이 말로 꺼내어 펼쳐 들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자리하게 되는 이런 것들을, 우리는 협상하듯이 조율해야 했음을 생각한다. 그 협상의 결과, 어디까지 나는 받아들일 수 있기에 받아들일 것이고, 어디부터는 받아들일 수 있음에도 그러지 말아야 하며, 이것은 너와 나를 동시에 위하는 행위임을 서로 동의하는 것, 우리가 서로 충족되어야만 동행은 지속될 수 있다는 냉정한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해. 그러니 어려움이지. 이것이 분재가 간과한 사실.


관계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완급조절과 기술적인 배려가 소외되면 두 사람에겐 시한부가 선고돼. 미친 사랑의 헌앙으로도 그 억지스럽고 일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버텨낼 수 있었을까, 사랑으로도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인내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을까. 너희를 우정 했을 뿐 애욕 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 질문에의 답을 알 수 없다만, 그래서 너희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았나.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 이제는 시시해져 버린 이것들을 추억한다. 오히려 그것이 시시해졌기에, 나는 즐거이 추억할 수 있게 됐다, 그래 이건 하나의 해프닝, 썰이 되어 떨어진 거야. 이와 관련된 기막힌 썰들이 더 많다만, 맥락상 불필요한 TMI가 될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해두자. EP 4 끝.


[키리에] 2023 공연사진 2 ©국립정동극장.jpg


엠마는 두 여인, 목련과 분재에게 초콜릿을 쥐여준 다음 장을 봐달라고 한다. 저녁 식사에 쓸 재료가 없다는 핑계, 노골적으로 딴 궁리가 있는 낌새다. 두 사람은 장 보러 가는 길 가운데 있는 검은 숲에 들어서 불법 초콜릿을 먹고, 환각에 빠져 유체 이탈을 경험하고, 서로의 바깥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화해한다, 아마 그들은 살았을 것이다. 한편 그 둘을 내보낸 엠마는 자살을 기도한다. 그녀도 누군가가 있는 곳에서는 죽을 수 없었던 모양, 자살을 결심한 다음에야 그녀는 남편의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당신을 죽여주겠다고 말하며 목을 조른다.


그리고 자신도 자살을 시도, 허나 언제나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집이 된 그녀는 엠마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무너지기로 한다. 집은 그녀의 몸이자 장기, 심장이 폭주하듯 온몸의 고동을 울리고, 최대치로 진동한다. “25년의 고독이 폭발하듯 진동한다———!!!!” 허허허허, 이건 좀 맥락 이탈 같았지만 어쨌든, 집이 무너진 자리에 무언가 들썩이고 엠마는 살았다. 그리고 암전. 객석에선 소리죽인 훌쩍임이 들려왔다. 나는 차갑게 내리깔린 눈빛으로 어둠을, 그 어둠 위에 펼쳐지는 기억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재가 무대에서 직접 전자담배를 뻑뻑 피워댄 탓에 담배가 몹시 말렸다. 덕수궁 돌담길 구석으로 가서 담배를 원 없이 피웠고, 생각이 피어오른다. 저들이 자기 서사의 꼬여버린 매듭을 짓기 위해 서로의 존재보다, 연대보다, 공감보다 먼저 환각버섯이, 즉 웃음이 먼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 사정도 마찬가지야. 웃어야지,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웃는 거야. “살아라”는 말보다 “웃어라”는 말이 더 힘겹게 다가올 너희를 생각해. 그러니까 웃으라고, 온 세상이 함께 축복할 수 있도록 말야. 눈물을 닮은 것들은 갈급할수록 외로워져, 너는 눈물을 흘릴수록 혼자 울게 될 테니까, 번진 화장을 한 채 뻗은 팔 끝으론 누구도 붙잡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들이 환각버섯을 먹고 환영 속에 춤추듯 나도 잔뜩 머금은 니코틴의 현기증 속에서 춤을 추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주차장의 구석에서. 내 20대의 X들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픈 기분, 너희도 지금, 이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웃고 있나. 이젠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진심을 다해서. 너희도 내 진심의 무게를 기억할 테지,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까.


비정하게 들리겠지만, 실상 다정한 의도로써 나는 차가운 것들을 말해 왔어. 그러니 우린 차라리 춤을 추자. 개인의 비극은 스스로 매듭지어져야 해. 이 연극이 그러했듯, 사소한 우리네 비극은 그 끝이 매듭지어진 다음에야 회고록처럼 입을 비집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그 끝에 마침내 누군가 너희를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를, 그 품에서 쉬고, 그것이 오래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To.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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