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수천 년 전 죽은 이들의 문장을 만지는 일에 빠져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를 펼치고, 한자 한 자에 담긴 서사를 쫓는 것이 내 일상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 나는 그 위대한 고전들을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고전 속 영웅들의 연대기보다 훨씬 더 긴급하고 중요한, 단 한 사람만을 위한 3분짜리 역사서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곧 세 돌을 맞는 내 딸, 소윤이의 성장 동영상이다.
아이가 곧 세 돌을 맞이한다. 어린이집에서 생일파티를 해주는데, 어린이집에서 생일을 처음 맞이하는 아이는 부모가 만들어온 ‘태몽동영상’을 틀어준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태몽이 없다. 그래서 태몽 대신 성장동영상 식으로 만들기로 했다.
아니 근데 태몽이고 성장이고 그보다 더 문제는 나는 이런 동영상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큭… 이걸 어찌 만들지? 다른 부모들은 어쩜 그렇게 잘 만들었지? 인스타에 그 짧은 릴스같은 영상 만드는 사람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AI의 도움으로 영상 스크립트를 짰다. 정말 편리한 세상이다. 임신과 출산, 소윤이의 성장 과정과 성향에 대해 몇 마디 해줬더니 그걸로 3분짜리 대본이 순식간에 나오다니! 심지어 시간 구획까지 알려준다. 00:00~00:30에는 어떤 분위기이며, 이런 영상이나 사진을 넣으라는 식이다. 참 편리하긴 하지만, 동시에 내가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이런 걸 내가 끙끙대며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글쓰기 AI는 ‘챗GPT’나 ‘제미나이’보다는 ‘클로드’를 사용했더니 훨씬 깔끔하면서도 응축된 스토리를 잘 만들어주었다.
대본을 보니 소윤이 사진 외에 그림 이미지가 몇 장 필요했다. 어떤 그림을 써야 할지 몰라 클로드에게 물었더니, 이런 이런 느낌의 이미지가 필요할 거라고 알려주면서 그림생성 AI에 쓸 프롬프트까지 만들어주었다. 그걸 그대로 붙여넣었더니 꽤 훌륭한 그림이 바로 생성되었다.
그다음 대본에 적힌 대로 — 이 장면엔 웃는 사진, 저 장면엔 가족이 함께 있는 사진 하는 식으로 — 소윤이의 영상과 사진을 골랐다.
이게 가장 오래 걸리는 과정이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사진과 영상이 이미 수만 장인데 그중에서 고르기란… 정말 머리 아프다. 게다가 아기 때부터 다시 쭉 사진을 보다 보면 그때의 감정들이 떠올라 갑자기 눈이 촉촉해지기도 한다.
자! 드디어 대본에 맞는 영상과 사진을 모두 선정하였다. 이제 진짜 동영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진짜 난관에 봉착했다.
많은 이들이 추천한 ‘캡컷’이라는 앱을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모바일로는 도저히 못 만들 것 같아서 노트북을 켰다. 유튜브에서 “캡컷 사용법”이라 검색하여, 기초 사용법부터 배우며 동영상 만들기에 도전했다. 웬걸! 캡컷 이거 정말 잘 만들었네! 나 같은 문외한도 몇 번 클릭 클릭했더니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금방 깨달을 정도였다. 아, 이런 게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라는 건가? 캡컷으로 동영상 만들기는 생각보다 재밌었다.
1) 먼저 영상과 사진들을 내가 원하는 순서대로 붙이고,
2)그 위에 클로드가 써준 대본대로 자막을 써서 입힌다. 귀여운 스티커나 효과도 넣어주고.
3) 이제 음악을 넣어줄 차례였다. 음악은 저작권 문제가 있어, 캡컷 앱에 저장된 음원들에서 미리 들어보며 골랐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미리 다 뽑아놨었는데 쓸 수 없어서 아쉬웠다.
4) 그 위에 내 목소리로 내레이션 녹음을 해야 했다. 처음에 노트북으로 녹음을 했는데, 노트북 팬 소리가 무슨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처럼 같이 녹음되었다. 다행히 캡컷은 PC와 모바일이 연동되어서, 모바일로 다시 녹음했다.
짜잔! 나름 3일 정도 내 모든 자유시간을 쏟아부어 만들긴 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동영상이 완성되었다. 엄청 뿌듯하다. 소윤이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초등학생도 유튜브를 만드는 시대에, 나는 이제야 ‘캡컷’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고, 동영상도 처음 들어봤으니 시대에 뒤처진 것만 같다.
동영상을 완성하고 나서 뿌듯했으나, 그것은 이제야 간신히 세상 돌아가는 속도에 한 번 따라가 봤다는 안도감이었다. 내가 대학생 때 매일 PPT를 만들었듯이, 요즘 대학생들은 이런 동영상을 매일 만들겠구나 싶었다. 해보지 않으면 몰랐을 것을 해봤다.
아날로그 같은 내 일상으로 돌아왔다. 평소처럼 괜찮은 인문학 수업이 있나 훑어보다가 AI 관련 수업들에 눈길이 갔다. 동영상 만들기 전에는 ‘AI’가 들어간 수업은 쳐다도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불현듯 나 저런 수업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친다. 저런 수업을 들으면 요즘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퍼진다. 지금은 피부로 느끼기는커녕,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은 내 주변에 맴돌다가 나에게 닿지 못하고 금세 떠나가 버리는 것 같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도 꼭 변해야만 하는 걸까? 이런 생각들조차 게으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