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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장이다, 가장이다

한겨레 연재 칼럼(2012년 1월)

by 어풀

2012년 1월, MBC ‘나는 가수다’가 인기있을 때 썼던 글입니다.

당시 한겨레에 직장인 뒷담화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마감을 앞둔 일요일 저녁, 동네 슈퍼에서 라면을 사오며 집 앞 벤치에서 담배를 물었습니다.

싸늘한 바람이 실린 쌉쌀한 연기가, 그 무렵 제 삶과 많이 닮아 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현듯 새내기 중년 직장인들의 헛헛함을 그리고 싶어졌고, 무언가에 홀린 듯 써내려갔습니다.

매번 며칠을 고민해도 제자리걸음하던 칼럼이었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아 초고를 마쳤습니다.


코미디에서 발라드로 장르가 달라지자 담당 편집자께서 난감해 하셨지만, 마감이 턱밑이라 그대로 신문에 실렸습니다.

미안했습니다.

그래도 왠지 꼭 그 마음을, 이 땅의 가장들과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다음주, 뜻밖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문예지 La revue des deux Mondes[두 세계의 매거진(혹은 시사)]에 제 글이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한겨레 편집자께서 전해주셨습니다.

동시통역사였던 모 교수께서 신문에 실린 글을 읽으시고, 해당 잡지의 한국특집에 추천하셨다네요.

설렜습니다.

저도 못 가본 프랑스에 제 글이 먼저 가는 겁니다.

그것도 유서 깊은 문예지의 초청을 받아서.^^

글이 실릴 예정이었던 한국특집호



하지만 잡지에 실리지는 않았습니다.

막바지에 지면 이슈가 생겨서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쉽지만 즐거웠습니다.

어쩌면 제가 글을 잘 쓸 수도 있겠단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연재를 마친 이후로도 꾸역꾸역 끄적대다 보니, 다른 시리즈도 집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30회 글을 내며 출간제안도 받았지만, 상황을 이유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즐겁고 고통스런 글쓰기가 이어지며, 다시 출간 이야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그 시절 충동적으로 마음을 담았던 글이 준 나비효과였나 봅니다.^^;;



[나는 과장이다, 가장이다]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몸짱이나 초콜릿 복근에는 관심이 없다. 걱정거리 업고 사는 중년아저씨에게 매력적인 외모는 관심사가 아니다. 하루하루 회사 잘 다니며, 마누라 마마께 꼬박꼬박 월급 드리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지난가을부터 체력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어떤 피로도 하루 숙면으로 떨어냈는데, 이젠 독한 술 한번에 사흘 동안 채소인간이다.


나만의 몸이 아니다. 내가 아프면 집안이 휘청댄다. 은행과 공동구매한 아파트 대출이자를 갚아야 한다. 열심히 냈는데, 이상하게 은행 지분만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아이의 다섯 군데 학원비도 벌어와야 한다. 가장은 코피를 쏟더라도 아이는 뒤처지면 안 된다. 체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달에 4만원짜리 구립 헬스클럽에 등록했다.


팍팍한 삶이다. 아침밥 얻어먹어본 지 5년도 넘었다. 아이를 잘 돌보려면 아내는 자야 한단다. 이른 아침, 아무도 배웅 않는 현관을 나서 교통지옥을 뚫고 전쟁터로 향한다. 오늘도 팀장의 갈굼과 후배의 개김에 버티는 나는, 과장이란 이름의 외줄타기 광대. 허기가 밀려오면, 20분을 기다려 10분 만에 김치찌개를 욱여넣는다.


식곤증과 싸우며 미팅과 보고를 준비하다 보면 금세 해가 진다.


성공해야 한다. 자식놈 대학 갈 때 등록금 지원받고, 불안한 노후도 준비하려면 임원이라는 별을 달아야 한다. 야근은 생활이다. 눈치 보다가 어설프게 퇴근하느니 팀장 퇴근할 때까지 빡세게 일하는 게 속 편하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 회사가 밥도 사주잖아! 빽빽 울리는 전화벨소리도, 웅성대는 동료들이 없어서 일도 더 잘되잖아. 저녁 술자리는 필수다. 동료들과 마시며 아군을 늘리고, 고객과도 끈끈해져 실적을 올려야 한다. 외국어에, 재무에, 기획력도 공부해야 한다. 오늘도 아이의 자는 얼굴만 쓰다듬는다.


아이 웃음이 그리워 이런저런 핑계 대고 일찍 온 날, 밥 안 먹고 왔다고 타박하는 아내, 텔레비전에 숙제에 바쁜 아이. 덩그러니 홀로 앉은 식탁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고단함이 그렇게 머문다. 동네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문다. 전화기를 뒤적이다가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문자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부모님께 송구스럽다. 이렇게 살라고 정성으로 키워주신 게 아닐 텐데. 용돈 한번 변변하게 못 드리는 신세가 한심스러워 애꿎은 담배에 화를 푼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가 동화책을 들고 온다. 요정과 괴물의 신기한 이야기에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빛과 해맑은 웃음을 선물한다. 이내 피로가 사라지고 마음이 푸근해진다. 술 적당히 마시라는 아내의 잔소리도 정겹다. 그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어떻게 모든 게 다 내 뜻대로 되겠어.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나는 가장이다. 나는 과장이다.


- OO기업 과장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127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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