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수완 좋은 매니저? 월급이나 매니줘요!]

by 어풀

여름휴가 첫 날.

느지막이 아침을 뜹니다.

TV를 켰는데 드라마 ‘미생’이 나옵니다.


영업 3팀이 내부 부조리를 해결하자, 사장이 찾아옵니다.

오상식 과장에게 사장이 과장 몇 년째냐고 묻습니다.

7년차라는 대답에 사장이 말합니다.


“많이 늦었군.”


회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개 과장 재급기간은 4~5년입니다.


2013년 진급자격기간 채우기 직전년도.

직장생활 20년 중, 일을 가장 열심히 했던 기간이었습니다.

성과도 아주 좋았기에, 조기진급할까봐 걱정했었습니다.

경력직 굴러온 돌이, 박힌 돌들 눈총에 저격당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고과폭탄을 맞았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답은 ‘태도’였습니다.

경우 없어서, 성과와 무관하게 자숙의 기회를 준 거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조목조목 반박했지만, 꼬투리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과장기간은 10년이었습니다.

고과로 진급이 한번 밀리면, 회복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듬해부터 점수 좋은 후배들과 경쟁하면서 자연도태됩니다... 매년.

언제부턴가 본명이 ‘과장’인 듯 느껴졌습니다.

10년차에 접어들 때, 진급여부를 묻는 웃으며 선배들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9,990년만 더하면, 진짜 만년과장 돼요.^^”


그해말 과장이 끝났습니다.


차장 진급한 지 2년이 돼가는데, 아직 과장으로 불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냥 빙긋 웃고 맙니다.

이젠 지난 일입니다.


“젊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과장(課長)은 본래 ‘부서의 리더(chief of team)’를 의미했습니다.

90년대에 팀제가 보편화되며, 직책과 무관한 직급이 되었습니다.

부장(部長)은 여러 개 과를 총괄하는 부문장(head of department)이었습니다.


차장(次長)은 ‘차석 리더, 팀리더에 버금가는 직원(deputy head of department)’을 뜻했습니다.

과장과 마찬가지로 직급의 의미로 고착됐습니다.

독특하게도 검찰에선 부장보다 차장이 높습니다.

지방검찰청에서 검사장 다음이니, 본래 의미에 충실합니다.

동훈이 형은 검사장이고, 진웅이 형은 차장검사입니다.


과장의 영어단어는 manager입니다.

이태리어 매니쟈레(maneggiare)에서 왔습니다.

‘반죽하다’, ‘처리하다’는 뜻입니다.

maneggiare는 손을 가리키는 라틴어 manus가 변형되었습니다.

일솜씨를 의미하는 한자어 ‘수완(手腕)’에도 손이 들어가는군요.


이전 회사에 다닐 때, 임원과 팀장을 제외한 전직원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한 적이 있습니다.

20년차 부장도 매니저, 2개월차 신입사원도 매니저.


매니저는 서구에선 부장급 이상입니다.

아무에게나 그 이름을 준다고 존중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병장이랑 이등병 모두 병장이라고 부르면, 이등병이 듬직해 보이는 게 아니라 병장이 우스워 보입니다.


사내 익명게시판에 냉소적인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월급이나 ‘매니줘’요.

사장 친위대 직원들이 누군지 찾아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이직한 건 아닙니다.

진짜라니까요!


아, 미쳤나 봅니다.

무슨 글을 쓰든 어원풀이로 귀결되네요.

언젠가 어원집착증이란 병이 소개되면, 그 환자는 저일지도 모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어원은 축복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