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붕붕~ 아주 작은 자동차
꼬마 자동차가 나왔다~
붕붕붕~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꼬마 자동차~
불끈 힘이 솟을 붕붕이는 없지만, 교정은 꽃향기로 가득했습니다.
1995년 5월, 중간고사가 끝난 캠퍼스는 슬슬 축제준비로 들썩입니다.
“이번 축제 필살 메뉴는 레몬소주다. 해볼 사람?”
우리과 학생회실, 총무 성수 형의 야심찬 제안에 사람들의 눈길이 내게로 모입니다.
군대 가려고 휴학했던 기간, 심심해서 나온 건데!
“아, 대두가 아르바이트 하면서 칵테일소주 만들어 봤다고 했지. 재료 아끼지 말고 섹시하게 만들어 봐.”
젠장, 지긋지긋했던 호프집 노비시절을 되새김질 해야 하다니.
호프집은 시간당 2천원이라도 줬지~
축제기간 사흘 동안 이벤트가 풍성합니다.
아이스크림 빨리 먹기, 리본돼지 잡기, 호수에서 보트 타기, 응원단 공연, 락밴드 공연...
하지만 내 새끼줄엔 레몬향만 가득합니다.
레몬소주 재료 장보기, 레몬소주 제조, 레몬소주 서빙, 레몬소주 추가 제조, 레몬소주 토사물 치우기로 바쁘고 바쁩니다.
알코올 함량 25%짜리 두꺼비 소주 두 병을 양푼에 붓고, 칠성사이다를 콸콸콸~!
쥬스맛 가루를 팍팍 넣고 국자로 1분 동안 휘적대면, 무늬만 과일소주가 완성됩니다.
축제 첫날 오전, 성수형이 한잔 마시고 묻습니다.
“오오, 기가 막힌데. 비법이 뭐야?”
예상했던 칭찬에, 살짝 으쓱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보통 레몬소주엔 쥬스가루에 사이다만 넣어요.”
“그럼, 우리는?”
“오렌지 쥬스요. 그리고...”
“뜸 들이지 말고~”
“이온음료요. 달달하고 깔끔해서 맛이 더 좋아져요. 그런데.”
“그런데?”
“종종 마신 애들 맛탱이가 변질돼요. 툭하면 싸우고, 울다가, 토해요.”
“몸에 흡수가 잘 돼서 그런 거야?”
“달달해서 더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아요. 어쨌든 토해요.”
“뭐랑 섞는데?”
“게토레이랑 포카리 스웨트요. 게토레이는 구토레이 되고, 포카리는 뿅가리 돼요.”
“괜찮아, 맛있으면 장땡이지. 매상도 두둑해지고. 많이 만들어 둬.”
그렇게 첫날 수많은 학우들이 교립묘지에 잠들었고, 이튿날 오후 다시 레몬빛 독약을 제조합니다.
“형, 군대 가기 전 마지막 축젠데, 좀 놀다 와도 돼요?”
“그래. 대신 레몬소주는 넉넉히 만들어 둬.”
40분 동안 줄서서 호수에서 보트를 탑니다.
동기 정은이가 장혜진의 ‘키 작은 하늘’을 부릅니다.
시원스런 목소리 너머, 해가 기울어 갑니다.
곧 여름이 오고 가을에 들어서면, 나는 군대에 갑니다.
고삐리 때 꿈꿨던 가슴 벅찬 로맨스는, 돈 없고, 머리 크고, 성격 모난 애한텐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저무는 해 너머로, 푸른 시절도 시들 것만 같습니다.
오늘 난 좀 마셔야겠습니다.
후문 앞 2층 호프집 전람회엔, 승우와 상일이가 생맥주를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모두 핸드폰은커녕 삐삐도 없었는데, 녀석들을 찾긴 참 쉬웠습니다.
어차피 연애도 못하는 벗님들, 머물 곳이 뻔했으니까요.
5월의 석양은 유독 길고 따스합니다.
하지만 검푸른 어둠이 드리워지면, 바람은 이내 싸늘해집니다.
이 시절이 가면 곧 26개월 동안 노예로 살 거란 암울함이, 500cc 맥줏잔을 연달아 비워갑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김정은의 ‘프로포즈’와 이예린의 ‘포플러 나무 아래’가 괜스레 더 애틋합니다.
로맨스는 개뿔!
“여기 500 하나 더요!”
어느새 술집을 나서 학교 안 과주점으로 향합니다.
곳곳에서 시끌벅적 축제를 즐기는 이들이 부럽습니다.
같은 공간에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뭔가 억울하고 서럽습니다.
한 잔 한 잔 더 들이킵니다.
겨울을 앞두고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뱃속에 이 술을 모두 저장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갈증은 단잠을 깨우는 데 즉효약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단과대 뒷뜰 큰 나무 아래입니다.
바람에 새벽 내음이 스며 있습니다.
뭔가 어색합니다.
남방만 입고 잠들었으니 추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누군가 점퍼를 덮어줬습니다.
헉, 점퍼 안에 다른 사람도 함께 있습니다.
함께 부둥켜 안고 있어, 화들짝 몸을 뺍니다.
앗,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남자가 아닙니다.
모든 걸 아는 듯, 그 사람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봅니다.
긴 머리에 하얀 얼굴, 길고 서늘한 눈매, 처녀귀신 스타일 미인입니다.
“저, 저기요. 죄송합니다만, 누구신가요?”
“기억 안 나세요? 그쪽이 레몬소주 만들어 준다고 저 데려오셨잖아요?”
아이고, 머리야.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요?
“예? 제가요? 실례지만 어느 과 다니시는데요?”
“저 이 학교 안 다녀요. 친구 만나러 왔어요.”
“친구분은 어디 계시는데요?”
“먼저 집에 갔어요. 그쪽 때문에 전 여기 있는 거구요.”
빼박 술주정입니다.
경찰서에 끌려가거나, 건장한 사내들에게 스테인리스 도시락 모서리로 옆통수를 쥐어박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저...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
“그쪽 아니라 제가 그쪽 옆에 온 거에요.”
“예? 왜요?”
“그렇게 두면 입 돌아갈 것 같아서요.”
천사다!
아니면 또라이다!
“제가 아르바이트 때문에 지금 가봐야 합니다. 죄송한데 집 전화번호 적어드리고 갈게요. 연락 주시면 신세 갚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돼요. 이거 제 번호에요.”
건네받은 쪽지에 수성펜으로 삐삐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글씨체도 매혹적입니다.
처녀귀신체?
머쓱하게 주머니에 넣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연락드릴게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면 아쉬울 듯합니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후회스러울 것만 같습니다.
“저기요. 제가 만들어드린 레몬소주는 어땠나요?”
어이 없단 표정으로 대답하는 그 사람.
“레몬소주 못 마셨어요. 게토레이랑 포카리스웨트 페트병 가져와서 병째로 마시다가 토하셨어요. 그리고 잠든 거에요.”
“네... 죄송합니다. 정말 실례했습니다”
내 주제에 인연은 무슨~
“다음에 만들어 줘요. ‘기억의 습작’도 다시 불러주고요.”
그 사람이 싱긋 웃습니다.
갑자기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설렘이 가슴 속에서 일렁입니다.
천사다!!!
이런 대단한 행운이!!!
그런데 내가 노래도 불렀나?
나 혹시 다중인격인가?
검은 어둠에 어느덧 푸른 빛이 스미기 시작합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하늘을 달리는 듯 사뿐합니다.
게토레이는 1960년대에 플로리다 대학 의대의 로버트 케이드 박사가 만들었습니다.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켜주기 위해, 땀으로 손실된 영양성분을 보충하는 이온음료를 개발했습니다.
플로리다대학 풋볼팀의 이름이 Gators, 악어떼였습니다.
악어들의 음료가 바로 Gator + Ade = Gatorade가 탄생한 겁니다.
그런데 파워레이드처럼 게토레이드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요?
CJ가 우리말 상표명을 ‘게토레이’라고 등록했기 때문입니다.
포카리스웨트(Pocari Sweat)는 일본어와 영어의 혼합어 브랜드입니댜.
일본어 ‘ぽかり’는 ‘뿅’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묘사한 의태어입니다.
영어사전에서 포카리 어원 찾아봤자 속상하고 허망할 뿐입니다.
뿅하고 땀과 피로가 사라져야 하는데, 정신과 기억만 실종돼 버렸습니다.
세탁기 속에서 날아가버린 쪽지 위의 숫자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