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제1회 대학수학능력을 마치고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다른 녀석들은 시험 보느라 애썼다며, 외식을 하고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부럽진 않았습니다.
내 형편과 사람들이 지긋지긋했습니다.
그냥 거지같이 처량하고 구질구질한 내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처음 간 곳은 영어선생님 댁이었습니다.
“선생님, 저 가출했어요.”
“밥 먹자.”
선생님이 차려주신 저녁을, 아름다운 사모님과 다섯 살 큰 아들 동권이와 세 살 막내 동혁이와 먹었습니다.
늦게까지 거실에서 TV를 보고, 옷방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이른 새벽 죄송스런 마음에 쪽지를 써놓고 선생님댁에서 나왔습니다.
- 선생님, 너무 감사했습니다. 제 행동이 가출의 본질에 소홀한 듯합니다. 개학 후 뵙겠습니다.
*추신: 국이 짭니다.
학교로 향했습니다.
빈 교실에서 책을 읽다 보니 점심 무렵입니다.
문구점에서 카스테라를 하나 사오는데, 수위 아저씨께서 수레에 벽돌을 싣고 오십니다.
“아저씨, 제가 밀어드릴게요.”
벽돌을 나릅니다.
몇차례 오가니 허기를 잊습니다.
날이 흐려 그렇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땀을 씻고 났더니 시계는 네 시를 가리킵니다.
갈 곳을 고민하다가 태양이네 전화를 걸었습니다.
많이 친하지는 않았지만, 와서 묵으랍니다.
태양이 어머니께서 돈가스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태양이가 방을 비워줍니다.
“여기서 자. 나 코 심하게 곤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냅니다.
갓 발매한 윤상의 노래를 듣습니다.
라디오도 나오지 않던 초라한 AIWA가, 밤새 물레방아처럼 돌아갑니다.
이른 새벽 들려오던 ‘새벽’이 참 좋았습니다.
울적한 마음에 푸릇한 미래를 어렴풋이 떠올려 주었습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새벽 버스에 올랐습니다.
학교로 향했습니다.
2박 3일의 가출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막을 내렸습니다.
어깨를 토닥여준 정겹던 그 노래들에 감사합니다.
https://youtu.be/GjPfhpJYeQ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