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아침 사무실 풍경은 엇비슷합니다.
책상 위엔 헛개수나 컨디션, 모닝케어 같은 숙취해소 드래곤볼들이 놓여 있고, 밤새 전사했던 사무전사들은 시들어버린 제정신에 시동을 걸려고 눈을 부릅뜹니다.
몇해 전부터 환약도 인기입니다.
혜리가 광고하는 상쾌환과 컨디션 환도 좋습니다.
한의사 이경제 원장님이 만드신 술타민의 은혜도 종종 입곤 합니다.
그래도 최고의 숙취해소제는 절제입니다.
무리하면 약효도 반감하니까요.
특히 토할 때까지 마신 다음날에는.
코로나가 지배하는 2020년 2월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됐습니다.
지갑과 체력이 메마르지 않아 시원하지만, 송년회 핑계로 만나던 벗들이 그리워 섭섭함도 느낍니다
예나 지금이나, 술을 참 좋아합니다.
대학생 시절엔 술자리가 매일을 마치는 일과였습니다.
토할 때까지 마시는 날도 많았습니다.
2000년 여름, 이러다가 큰 병 나겠단 위기감이 엄습했습니다.
술을 끊고 동네 헬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돈 주고 하는 운동이라 정성을 다했습니다.
학교엔 안 가도 헬스장엔 출근할 정도였습니다.
한 달 만에 근육이 꽤 붙고 혈색도 좋아졌습니다.
"Do you have a lighter?"
"오브 코우즈!"
같은 헬스장에 다니던 그레이슨과 처음 만났습니다.
180이 넘는 키에 미끈하게 잘생긴 미국 청년 그레이슨은,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제 첫 흑인친구였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운동하고, 귀갓길에 담배를 함께 물었습니다.
"헤이, 렛츠 고 투 드링크!"
푹푹 찌던 8월 어느 저녁, 헬스장 에어컨이 고장나 운동하다가 짜증이 났습니다.
두 달 가까이 외면했던 생맥주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Sounds sweet! I hate sweat!"
그레이슨이 친구 하나 부르겠답니다.
그렇게 아일랜드에서 온 백인청년 거윈을 만났습니다.
이 친구는 특이하게도 영어로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한국에 온 지 몇해 지나서, 우리말을 제법 잘했습니다.
20대 중반 삼색 젊은이들이 싸구려 호프집으로 향했습니다.
검은 태양이 내리쬐는 밤, 눈송이처럼 차가운 맥주가 폭포수처럼 식도에서 몸을 던집니다.
안주로 시킨 치킨엔 눈길도 가지 않을 만큼 시원하고 짜릿합니다.
"Koreans love only white people too much. They even like me cause I look like Brad Pitt!"
술이 적당히 오르자 그레이슨이 푸념을 시작합니다.
그레이슨은 흑인이 말이 더럽게 많다는 걸 일깨워 준 소중한 친구입니다.
"No, You do not look like Brad Pitt. You are the clon of Tom Cruise!"
거윈도 평범한 녀석은 아니었습니다.
아일랜드 애들이 깡 좋고 술 세다는 말만 믿고, 소주를 시킨 게 화근이었을까요?
몰아마신 술에 다들 떡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거윈, 그레이슨이 뭐라는 거야?"
"지가 브래드 피트 닮았대. 그래서 톰 크루즈나 하라고 했어."
"푸히힛, 컥컥!"
웃다가 갑자기 사래가 들려 기침을 했더니, 술이 얹혔습니다.
급하게 양쪽 아랫턱과 혀밑에 침이 흥건하게 괴기 시작합니다.
구토의 사인입니다.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우욱, 웩!"
"괜찮아, 대두? 급하게 마시더라니. 오바이트해도 더 마실 거지?"
등을 두드려 주는 거윈.
말도 정신세계도 거의 한국인 같습니다.
"아우, 시큼한 냄새 나! 나도 토할래! 쿠웨엑~!"
아이구 머리야~
아일랜드산 거윈이 구운 피자는, 내가 부친 김치전보다 색깔이 밝았습니다.
“대두, 한국사람들 토하면 왜 다 레드야? 내 건 브라운인데. 이유가 뭘까?”
“와, 추리력! 이 아일랜드산 셜록홈즈 같은 지니어스 휴먼비잉!”
“대두도 천재 같아 보여, 머리 커서. 그나저나 그레이슨은 토하면 무슨 색깔일까?”
호기심에 버무려진 눈동자 네 개가 씨익 웃으며 마주쳤습니다.
우리는 그레이슨에게 ‘천재 미남 브래드 크루즈’라고 찬사를 보내며 맥주를 먹였습니다.
그레이슨이 토하러 튀어나가기까지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따라갔습니다.
“거윈, 레드야. 인종이랑 피자색깔이랑 관계 없나봐?”
“그런가? Hey, 브래드 크루즈. What was your dinner?”
“I ate 김치볶음밥, 투 그릇, 우욱.”
그레이슨의 2차 분출을 지켜보며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건 그릇의 모양이 아니라, 담긴 내용이란 걸요.
피자(pizza)는 고대 로마인들의 ‘피체아(picea)’가 뿌리입니다.
피체아는 그들이 먹던 빵 ‘플라첸타(placenta)’의 그을린 아랫부분이나 빵 자체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이 ‘picea’가 ‘piza’를 거쳐 ‘pizza’가 됐다고 합니다.
한편으론 비잔틴 제국의 납작빵 피타(pitta)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I said if you're thinkin' of being my brother
It don't matter if you're black or wh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