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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Mar 05. 2022

부아가 치밀어서 투표했다

대한민국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30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꽤나 쉽게 부아가 치미는 삶이다.


# 일


관리자도 아니고, 막내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 속에서 책임도, 권한도 없지만 책임과 권한을 어느 정도 도맡아야 하는 어중간한 지위를 갖고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늘 고래 사이에 등 낀 새우 신세다. 가끔 "딸아 무수리처럼 일하지 말라"던 전직 기자의 글이 떠오르곤 한다. 방안에 먼지가 잔뜩 쌓이고, 쓰레기통도 터질 것 같은데 아무도 치우지 않는다. 보다 못해 청소기를 돌리는 사람은 결국 나다. 억울하다. 하지만 또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빗자루라도 들고 나선다. 억울하다. 밥벌이의 지겨움과 아등바등한 시간이 길어지니 이런 상황이 일상이 됐다.


# 아이


아이와 키운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져야 하는 대상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유치원 등하원부터 도시락, 원복 빨래, 자질구레한 공지와 행사들... 우리집은 아빠의 육아분담비율이 굉장히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의 특성상 그 안에서의 소통은 상당 부분 엄마의 몫이다. 그렇다고 잘 해내는 것도 아니고, 겨우겨우 해치울 뿐인데 늘 허덕이다보면 급격히 저하된 에너지와 급격히 늘어난 짜증의 화살이 애꿎은 아이에게 향할 때가 있다. 늘 즉시 후회한다. 그나마 '아직은' 아이들이 "엄마가 제일 좋다"고 할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 다시 일, 아이, 그리고 여성

직장맘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미생> 선 차장.


두 개의 상황은 매일 매순간 무조건 맞물린다. 나도 일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양립불가능한 일까지는 아니지만 두마리 토끼를 잡는 데에는 굉장히 많은 자기 희생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는 그럴만큼 욕망의 불꽃을 파르르 불태우는 사람도 아니다. 결국 한 쪽을 덜어내고, 또 반대편을 덜어내고 그렇게 저울의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매일 '반쪽짜리 사람'으로 버티다가 하루를 마치는 게 버겁다.


이러니 여성의 고용률 그래프가 M자 모양을 벗어나지 못하고, 특히 경제활동과 돌봄을 병행해야 하는 3040 여성이 가장 깊숙한 협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여성 선배'들은 사라져갔다. 버티고 버티다가 뚝 부러져버렸다. 그 흔적마저 나중에는 사라져버렸다. 현 정부가 '30%는 채우겠다'고 약속했던 장관급 여성 비율이 무너진 것은 유별난 사례가 아니다.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던 슬픈 숫자였다.


장관이니 임원 같은 고위직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당장 팀장급이나 주요 부서 관리자들을 살펴봐도 그렇다. 과거만큼 가뭄에 콩나듯한 수준은 아니라고들 하는데, 글쎄. 소속 업계의 특성상 고개를 들어보면 여전히 가뭄에 콩나는 상황 같다. 헌신을 강요하는 이들만 가득찬 일상을 오롯이 혼자서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운좋게 또 다른 여성의 노동으로 돌봄을 메우는 이들은 '직장'이라는 것의 끝에 삐죽 나온 동아줄을 움켜잡고 있지만, 그들은 운이 좋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니 어떻게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있는가. '때려쳐'라는 말은 쉬워도, 때려칠 수 없는 삶을 버텨내는 수밖에 없는데. 래서 포기하면 또 누군가 비슷하게 허덕이다가 포기하고, 또 포기해서, 또 우리는 M자의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할 텐데. 어떻게 이것이 구조적 성차별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이것이 개인수준의 문제란 말인가. 어떻게 이러면서 '아이 낳고 살만한 세상이라 느꼈으면'이라는 선거캠페인을 내세우는가.


경기도민이 춘천에서 투표할 줄이야...


그래서 투표했다. 생전 갈 일 없을 것 같은 강원도 춘천시 소양동 주민센터를 지나가는 길에 사전투표로.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로 부아에 부아를 더하는 사람보다는 부아가 치미는 날들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비호감 대선'이니 '뽑을 사람이 없다'라는 말들이 난무하는 선거판이지만, 사실 그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언론은 그 말을 그대로 중계할 게 아니라 그 말이 가린 또다른 절반의 진실을 제대로 짚어줘야 하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욕지거리를 하면서라도 개중에 나은 무엇인가를 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음에, 또 다음에도 실패할 것이다. 그렇게 부아가 치미는 날들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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