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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릭 Jul 17. 2022

마음을 내준다는 것

Photo by Tolga Ulkan on Unsplash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삶을 결정한 계기는 모두 '얼렁뚱땅'이었는데, 세월이 지나고보니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또래보다 빨리 한 편이 됐다.


며칠 전에는 친구 아이가 침대 난간을 붙잡고 일어섰다는 동영상을 봤는데, 그날 1호는 잠잘 때 열린 방문 틈으로 보일 수 있는 위치에 엄마아빠가 앉아있으면 좋겠다며 "그래야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안심'이라는 한자어와 '-된다'라는 피동형을 동시에 사용한 아이의 문어적 표현에 새삼 놀랐는데, 순간 친구와 나의 시간 차를 깨달았달까. 그 격차만큼 나는 아이와 시절을 함께 했고, 아이는 자랐다. 밀가루 반죽처럼 보드랍고, 비누와 모유 냄새가 뒤섞인 아기 특유의 냄새는 이젠 그리움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마냥 아기 같던 2호의 성장은 '말대꾸'에서 실감한다. K-가부장들에게 아이의 말대꾸는 대개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K-장녀에게도 비슷한 감각을 환기시킨다만, 나는 말대꾸가 주관의 표현이라고 본다. 이왕이면 아이의 말대꾸도 존중해주고, 상황에 적절한 의사표현인지 아닌지도 설명해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매번 썩 성공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래도 순둥순둥하고, 늘 억울해보이던 녀석이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드러내는 모습은 또 한 번 세월의 흐름을 자각시켜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내줬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지켜줘야 하는 보호자이자 호흡을 맞춰야 하는 동반자로서, 때로는 엄격한 지도자로서 함께 살아왔다. 아이가 없는 삶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됐고, 아이의 부재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애 최대의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됐다. 마음을 내준다는 것, 귀한 존재가 생겼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애증'이 되어버린 직장이란 곳도 그러하다. 돌이켜보면 '증'보다 '애'란 단어가 앞선 이유는 결국 그곳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줬기 때문이다. '일하는 공동체'로서의 감각을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현듯 누군가와 이별해야 할 때, 더군다나 그 이별이 전혀 예상 못한 방식으로, 어쩌면 무례하게 다가왔을 때, 마음을 내줬던 시간들은 무엇이었을까 찬찬히 곱씹어보게 된다.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약간은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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