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판보다 먼저 떨어진 칼날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지 40일이 지났다.
백성은 불안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멀었고, 지도자 모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하늘은 침묵했고, 광야의 밤은 길었다.
백성은 아론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
아론은 백성들의 귀고리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그 앞에서 춤추며 노래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광야의 공포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신상으로 바뀌었다.
믿음은 사라지고, 불안이 형체를 얻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며
손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백성이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고 있었다.
모세는 분노했다.
그는 돌판을 산 아래에 내던져 깨뜨렸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불태워 가루로 만든 뒤,
물에 뿌려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그다음이었다.
모세는 레위 지파를 불러 명령했다.
“각 사람이 자기의 칼을 차고, 진 이편에서 저편으로 왕래하며
그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이라.”
그날 죽은 사람이 삼천 명이었다.
놀라운 건, 이때 십계명은 아직 공식 반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이 선포되기도 전에, 칼이 먼저 노래했다.
“살인하지 말라.”
그 계명은 아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3천 명이 죽었다.
돌판보다 먼저 떨어진 건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모세의 분노와 레위인의 칼날이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단순한 징계로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오늘 너희가 각기 자기의 아들과 형제를 쳤으니,
여호와께 헌신하였느니라.”
그날 이후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지파가 되었다.
학살은 거룩한 의식으로 둔갑했고,
폭력은 헌신의 상징이 되었다.
우상 숭배자를 제거함으로써 공동체는 정결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정결은 피로 얻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반역자 처형이 아니라,
집단학살의 원형이었다.
만약 오늘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 이름은 분명했을 것이다.
‘종교적 광신에 의한 학살.’
혹은 ‘내전’, ‘인종 청소.’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 헌신한 자들이라.”
피로 세워진 정체성이 거룩으로 포장되었다.
폭력은 신의 이름을 얻었고,
살인은 의식이 되었다.
금송아지 사건은 한 번의 실수로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 후로도
우상을 만들 때마다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심판은 언제나 피를 요구했다.
금송아지는 단순한 금속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의 불안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었다.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하나님은 다시 칼을 들게 했다.
눈에 보이는 신을 원한 인간의 불안,
그리고 그 불안을 피로 진정시키는 종교의 광기.
그것이 금송아지의 진짜 얼굴이었다.
금송아지, 모세의 분노, 레위인의 칼날,
그리고 삼천 명의 피.
이 사건은 구약의 폭력사를 상징한다.
십계명보다 먼저 울린 칼,
율법보다 먼저 흘린 피.
금송아지 사건은 종교적 폭력이
어떻게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장면이다.
돌판은 깨졌지만,
그 돌보다 단단한 건 인간의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지금도,
‘신의 이름으로’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