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이름으로 인종 청소
여호수아의 이름은 흔히 “믿음의 용사”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그대로 읽으면,
믿음의 용사라기보다 전쟁 영웅,
아니, 신의 명령을 수행한 전사에 더 가깝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첫 번째 전투 대상은 여리고 성이었다.
성벽이 무너지는 장면은 기적의 드라마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벽이 무너진 뒤 벌어진 일은 축제가 아니라 학살이었다.
성 안의 남녀노소는 물론, 가축까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성경은 차갑게 기록한다.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여호수아는 전쟁마다 같은 구호를 외쳤다.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는 이 말을 용기와 신념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 그 말은 동정심을 버리라는 뜻이었다.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면 안 된다.
아이와 여인을 살려두면 안 된다.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순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되었다.
여호수아에게 ‘강함’은 인내가 아니었다.
그건 자비의 거부, 감정의 삭제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때로 인간성을 버릴 용기를 요구했다.
가나안 전쟁 중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가 있다.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여호수아가 외치자 태양이 멈추고 하늘이 정지한 듯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하늘이 멈춘 사이, 땅에서는 칼이 멈추지 않았다.
태양이 머문 시간 동안 더 많은 적이 몰살당했다.
전투는 기적으로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시간이 연장된 학살이었다.
여호수아의 전쟁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었다.
그건 철저히 인종 청소의 논리로 진행되었다.
“이방 민족은 씨를 말리라.”
아이와 여인을 살려두면, 그들의 문화와 종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래서 씨를 아예 없애야 했다.
이 명령은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절멸의 신학이었다.
그 논리는 훗날에도 반복된다.
십자군 전쟁,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나치의 홀로코스트까지 ―
‘씨를 말리라’는 말은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부활했다.
만약 오늘 이런 전쟁이 벌어졌다면 그 이름은 분명했다.
“전쟁범죄.”
“종족 청소.”
“반인도적 범죄.”
국제형사재판소가 있다면 여호수아는 기소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 일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록했고,
여호수아를 믿음의 영웅으로 칭송했다.
폭력은 거룩이 되었고, 학살은 승리로 불렸다.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동정심이 사라진 사회의 무서움을 보여준다.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명령은 결국 인간다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무너진 사회다.
동정심은 인간성을 지탱하는 마지막 끈이다.
그러나 구약의 명령은 그 끈을 잘라 버렸다.
그 순간, 신앙은 인간성을 넘어 잔혹의 신학으로 변했다.
거룩의 이름으로 포장된 학살. 동정심을 버리라는 명령.
그것이 바로 여호수아의 시대가 남긴 상처였다.
신은 강하고 담대하라 했지만, 그 강함은 사랑이 아니라 냉혹함이었다.
하늘은 잠시 멈췄고, 그 사이 땅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 피는 오랫동안 찬양의 언어로 덮였고, 거룩의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이제 묻자.
신이 명한 전쟁은 정말 정의였는가?
그리고, 동정심 없는 신앙을 과연 신앙이라 부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