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죽음으로 증명된 ‘유일신’
출애굽기는 오랫동안 해방의 서사로 칭송받아 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교회학교 연극의 단골 소재였고,
“내 백성을 보내라!”라는 구호는 인권운동의 상징처럼 쓰였다.
그러나 본문을 차분히 읽다 보면 낯선 구절이 반복된다.
“내가 파라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리라.”
파라오가 고집을 부린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다.
즉, 재앙은 파라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각본이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재앙은 점점 강도가 높아지며 애굽 땅을 휩쓸었다.
나일강이 피로 변했을 때,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라 부패 냄새가 진동했다.
개구리 떼가 부엌 냄비 속까지 들어왔고,
파리 떼는 얼굴조차 가릴 수 없을 만큼 들끓었다.
가축들에게 악질이 퍼지고,
사람들의 피부엔 종기가 돋았다.
우박은 농작물을 쓸어버렸고,
메뚜기는 남은 것을 모조리 삼켰다.
흑암은 3일간 태양을 가렸다.
성경은 이 모든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차원이 달랐다.
“그 밤에 애굽 온 땅에 처음 난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죽었더라.”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얼굴이 있다.
왕궁의 왕자, 농부의 아들, 노예의 갓난아이,
그리고 가축의 첫 새끼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집집마다 울음이 터졌다.
출애굽기는 기록한다.
“온 애굽에 전무후무한 통곡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재앙의 목적을 직접 밝힌다.
“내 이름을 온 땅에 알리기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은 해방의 도구이자, 동시에 신의 홍보 캠페인이었다.
파라오의 고집은 하나님의 연출 덕분에 계속 이어졌고,
그 사이 재앙은 점점 심각해졌다.
마지막에는 어린아이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이것은 구원인가, 아니면 연출된 비극인가.
만약 이 사건이 오늘 국제형사재판소에 접수된다면
그 죄목은 분명할 것이다.
‘전쟁범죄’ 혹은 ‘반인도적 범죄.’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을 영광이라 부르고,
한 나라 전체를 상대로 한 재앙을 정의라 포장한다면,
그것은 신적 정의라기보다 폭력의 미학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을 지킨다.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은 장자의 죽음을 면했고,
그 사건은 해방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러나 애굽의 집마다 장례가 열릴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축제가 벌어졌다.
피를 바른 문은 구원의 표징이었지만,
그 구원은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졌다.
장례의 곡성과 승리의 노래가 한밤에 뒤섞였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여전히 어린이 성경책에서 읽는다.
아이들은 모세 인형을 들고 “홍해가 갈라졌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이건 해방의 드라마인가, 아니면 폭력의 드라마인가?
이스라엘의 자유는 누군가의 아픔 위에 세워졌고,
하나님의 영광은 무고한 아이들의 죽음을 대가로 삼았다.
그 사실을 모른 척하는 순간,
신앙은 위로가 아니라 망각이 된다.
열 가지 재앙은 구원의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속살은 폭력의 서사였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아이들의 목숨까지 희생시킨 신.
구약성경은 이를 거룩하게 기록했지만,
오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찬양의 언어로 덮인 학살이다.
신의 영광이 인간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가.
그 물음 앞에서, 출애굽기는 더 이상 단순한 해방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신의 정의와 인간의 양심이 충돌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