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거래 대상인가?” 세 가지 비극의 변주
노아의 방주는 오랫동안 동화책의 소재로 쓰였다.
코끼리, 기린, 토끼가 줄지어 올라가는 그림은 귀엽고 따뜻하다.
아이들 눈에는 마치 즐거운 동물원 나들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다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이 가득하다며 선언한다.
“내가 그들을 쓸어버리겠다.”
인간뿐 아니라 짐승, 새, 심지어 기어 다니는 것까지 포함되었다.
노아의 가족과 짐승 몇 쌍만 살아남았다.
아이들은 방주 그림을 색칠하며 웃지만,
그 그림 뒤에는 수많은 시체가 물에 잠겨 있다.
교회는 그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노아의 홍수는 단순한 구원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을 심판한 최초의 ‘집단학살’**이었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창세기 6장 한 문장이 인간의 운명을 바꾼다.
이전 세대의 인간은 900년을 살았으나,
홍수 직전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한다.
아무 설명도 없다.
전능자가 인간의 생명을 이렇게 쉽게 다룬다.
이유도, 맥락도 없다.
생명은 신의 실험 재료처럼 줄었다가 늘어나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명령한다.
아브라함은 순종한다.
아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 장작을 쌓고 칼을 든다.
천사가 급히 나타나 “멈춰라!” 외쳤기에 살인은 막을 수 있었다.
교회는 이 장면을 “믿음의 절정”이라 부른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건 아동학대이며 범죄 교사다.
오늘날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아버지는 신앙인이 아니라 정신병원이나 감옥에 갇혔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신앙의 표본이 되었지만,
그 순종의 대상이 사랑이 아닌 공포였다는 점은 말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단어 아래, 인간의 고통이 지워졌다.
욥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라.”
그 결과 욥에게 재앙이 닥친다.
가축이 몰살당하고, 종들이 죽고,
마지막엔 자녀 열 명이 한꺼번에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중에 욥에게 더 많은 가축과 새로운 자녀를 주셨다고 기록한다.
문제는 죽은 아이들이다.
그들은 ‘보상’으로 대체될 수 있는 존재였을까?
이 장면은 생명이 신의 실험 자료처럼 다뤄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의 시험은 믿음을 증명했지만,
그 증명은 피 위에 세워졌다.
노아, 아브라함, 욥.
세 이야기는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을 지녔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신은 언제나 목적을 위해 생명을 희생시켰다.
노아의 홍수에서는 인류 전체가 제거되었고,
아브라함의 사건에서는 아들이 제물로 바쳐질 뻔했다.
욥의 사건에서는 자녀들이 실제로 죽었다.
“신은 생명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아름답지만,
창세기의 장면들은 그 반대의 증언처럼 보인다.
신은 생명을 거래할 수 있었고,
인간은 그 거래의 대상일 뿐이었다.
교회는 여전히 이 이야기들을 ‘믿음의 본보기’로 가르친다.
아이들은 방주를 색칠하며 웃고,
어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찬양하며,
욥의 자녀들의 죽음조차 “하나님이 다시 주셨으니 괜찮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괜찮은가?
그 말은 슬픔을 덮는 위로인가,
아니면 폭력을 반복하는 변명인가?
신의 시험은 신비로 남지만,
그 시험 속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신비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노아, 아브라함, 욥 ―
세 가지 이야기가 들려주는 메시지는 냉정하다.
신은 목적을 위해 언제든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으며,
그 희생은 언제나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신의 이름 아래 흘러내린 피는
오랫동안 찬송으로 덮였고,
그 피 위에서 믿음의 교리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제 그 피의 의미를 다시 물을 때다.
거룩이 생명을 위로했는가,
아니면 생명을 이용했는가.
우리가 읽는 것은 구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신의 이름으로 쓰인 인간의 비극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