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천천히 돌아보면, 그 시작은 언제나 말보다 이미지에 더 가까웠습니다. 어떤 표정, 어떤 분위기, 어떤 장면이 마음에 먼저 스며들고, 그 이미지에 이끌려 ‘나는 이런 사람인가 보다’라고 자리 잡습니다. 이때 만들어지는 ‘나’는 사실 엄밀한 의미의 주체라기보다, 이미지로 조립된 초기의 자아에 더 가깝습니다. 라캉이 상상계라고 부른 세계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논리보다 감정이 먼저이고, 설명보다 인상이 오래 남는 자리. 우리는 그 세계를 지나며 스스로를 느끼기 시작하고, 그 과정을 통과하며 비로소 주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합니다.
아이가 거울을 보며 “저게 나야” 하고 느끼는 순간은 이 과정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아이는 아직 미완의 존재이지만, 거울 속 모습은 이미 완성된 전체처럼 보입니다. 그 ‘통일된 나’라는 환상은 정확하지 않지만, 초기에 형성되는 자아의 기초가 됩니다. 성인이 된 뒤에도 사진 속 자신을 볼 때 느껴지는 묘한 어색함은, 이 이미지 기반의 자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작은 흔적일 뿐입니다.
일상에서 말하는 ‘나’는 대체로 정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라캉이 말한 주체는 그 ‘나’를 떠받치는 더 깊은 자리에서 움직입니다. ‘나’가 완성된 사진이라면, 주체는 그 사진을 찍기 전의 빛, 그림자, 떨림, 기울기 같은 것입니다. 이미지의 세계에서 자아가 먼저 틀을 잡지만, 그 틀 안쪽에서 주체는 말을 기다리고, 의미를 찾고, 언어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갈 순간을 기다립니다. 즉, 내가 지금 어떤 이미지와 감정 속에서 구축되고 있는가—그 흐름 자체가 주체의 미세한 움직임입니다.
상상계 안에서의 ‘나’, 곧 자아는 단일한 존재가 아닙니다. 첫째, 거울 속에서 보았던 완전한 나의 환상이 있고, 둘째, 타인의 눈빛과 반응 속에서 급하게 만들어지는 나가 있으며, 셋째, 어린 시절의 상처나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빚어낸 깊은 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러 자아를 오가며 일상을 살아가고, 그러는 사이 주체는 조용히 그 밑에서 방향을 잡기 시작합니다.
저 역시 제 안의 주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보여주는 장면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저는 큰 사고를 쳤고, 사람들의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 외할머니가 통곡하시며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착한 내 손자를, 나쁜 놈들이 망가뜨리려고… 내 손자는 잘못을 할 애가 아니다.”
그 말은 사실과 다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문장이 제 안에서 일으킨 변화는 사실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탓하고 있었지만, 외할머니의 눈 안에서 저는 ‘본래 착한 아이’였고, ‘결코 그런 아이가 아니었으며’, ‘흔들렸지만 다시 세워질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 이미지는 자아의 모양을 다시 만들었고, 그 자리를 통해 제 안의 주체는 더 깊고 단단한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논리도 설명도 아니고, 하나의 이미지가 한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힘—그 경험을 저는 그날 처음 배웠습니다.
신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항상 감시하고 책망하는 존재로 느낍니다. 마치 잘못을 찾아내는 감독관처럼요. 그런데 이런 하나님 이미지는 대부분 신학적 이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만난 권위적 인물—엄격한 아버지, 비난만 하던 보호자, 체면을 강요하던 교사, 혹은 위압적인 종교 지도자의 표정과 말투가 이미지로 이어져 형성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 이미지들은 자아의 층위에서 작동하지만, 그 아래 깊은 곳에서는 주체가 그 이미지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조용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받았는지는 평생의 신앙에 강력한 영향을 줍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어릴 때 자연스럽게 스며든 찬송, 부모가 사용하던 어투, 교회의 분위기가 하나님 이미지로 굳어지고, 그 이미지는 자아의 기초가 됩니다. 그 기초 위에서 주체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그 이미지가 너무 강하여 주체의 움직임을 가린 채 성장이 멈추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은혜롭다’고 느껴지고, 어떤 설교자는 ‘불편하다’고 느껴집니다. 내 안의 이미지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나’, 그리고 신앙 속의 ‘나’는 이렇게 오래된 이미지의 층위에서 출발합니다. 자아는 그 이미지로 틀을 잡고, 주체는 그 틀을 통과하며 말과 의미를 찾아갑니다. 이미지는 때로 우리를 흔들고, 때로 다시 세우며,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삶과 신앙을 지탱합니다. 신앙의 첫 문도 대부분 이미지에서 열리고, 그 문을 지나며 우리는 하나님을 조금씩 새롭게 배워갑니다. 이미지는 자아의 시작이었고, 동시에 주체의 길을 열어 두는 가장 오래된 힘입니다.
아담
옷을 입기 전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인지 몰랐다
빛은 그의 눈을 밝혔고
어둠은 그의 마음을 감쌌다
그러던 어느 날
입안에 낯선 맛이 번지던 찰나
무언가가 안쪽에서 미세하게 갈라졌다
처음으로 그는
자신을 바깥에서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떨며
그는 나무 사이로 숨었다
두 마음이 서로를 밀고 끌어당기며
그의 안에 첫 그림자가 생겨났다
우리는 모두
그날의 흔적을 품은 채
보이는 나와 숨고 싶은 나
사이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