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혜란은 강 선생님이 돌보는 두 마리 개와 세 마리 고양이 생각을 하면서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며칠 전 출판사 회식 자리에서, 비가 올 것 같아 마당에 널어둔 빨래를 걷고 개와 고양이 집 지붕에 비닐을 덮어두고 나왔는데 정작 자신이 쓸 우산은 빠뜨렸다면서 강 선생님은 멋쩍게 웃었다. 춘천 강 선생님 댁 개와 고양이는 모두 길에 버려졌거나 병들었거나 주인이 키우기를 단념해서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 것들이었다. 언젠가 강 선생님은 혜란에게 늙고 병들어서 눈이 먼 채 서재에서 기거한다는 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주일 일정으로 파리 국제도서전에 참가하기 위해 춘천 집을 나설 때 강 선생님은 눈 먼 개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골목이 끝나는 자리에 횡단보도로 따라 불빛이 밝혀져 있는 베이커리 간판을 바라보면서 혜란은 어둠에 떠밀리 듯 성큼성큼 걸었다. 늙고 병든 개 이야기를 할 때 고희로 접어든 강 선생님의 맑고 선량해 보이는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 개는 강 선생님이 귀국하기 전 날 죽었다고 했다. 죽은 개를 집 근처 산에 묻어준 사람은 교직에서 은퇴하고 농사를 지으며 노년을 보내고 있는 강 선생님의 남편이었다. 개는 강 선생님이 늘 앉아서 책을 읽고 원고를 썼던 책상 밑에서 죽어 있었다고 했다. 볼 수 없는 개는 강 선생님이 떠난 뒤 내내 책상 밑에 웅크리고 있다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강 선생님이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죽은 개 이야기했을 때 혜란은 어린 시절 살았던 집 마당에서 키웠던 닭이 떠올랐다. 혜란의 집에서 키웠던 유일한 동물이었던 닭은 두 살 터울 남동생 찬이 초등학교 앞에서 사온 병아리가 자라서 중닭이 되고 어미 닭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찬이가 병아리를 사왔을 때 혜란의 식구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죽을 거라고 짐작했다. 찬은 마당 한쪽에 박스를 가져다 병아리 집을 마련해주고 모이며 물을 챙기고 정성들여 병아리를 돌보았다. 햇빛이 환한 마당에서 병아리는 삐악삐악 울면서 똥을 쌌고 대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종종거리며 문가로 내달렸다. 찬이는 행여 병아리가 집 밖으로 나가서 길을 잃을까봐 걱정했고 식구들의 발에 채일까 전전긍긍했다.
병아리는 며칠이 아니라 몇 주가 지나도록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여러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귀여움을 받고 응석을 피우기는커녕 천덕꾸러기로 자랐던 찬이처럼 생명력이 강한 병아리였다. 식구들과 눈을 맞추지 않고 밥상에 둘러앉으면 허겁지겁 밥을 삼키고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던 찬이는 틈만 나면 병아리에게 달려갔다. 병아리가 중닭으로 커가는 동안 찬이는 식구들 중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다. 찬이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 보였다. 불안하거나 화가 나면 고개를 외로 틀고 어깻죽지를 물어뜯는 기이한 행동도 눈에 띄게 줄었다.
할머니는 찬이가 달라진 것보다 병아리가 중닭으로 자랐다는 사실에 더 놀라워했다. 닭이 처음 알을 낳았던 날 찬이는 그것을 손에 들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마당에 서 있었다. 할머니가 달걀프라이를 해먹게 내놓으라고 하자 찬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닭이 알을 낳을 때마다 찬이는 그것을 닭장 한쪽에 가만히 넣어놓았다. 찬이는 어미 닭이 알을 품을 거라고 믿었는지 좀처럼 닭장 앞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혜란 역시 무정란이 병아리로 부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찬이는 달걀의 개수를 헤아렸다. 달걀의 수는 좀처럼 늘지 않았지만 찬이는 몰래 가져간 사람이 누구인지 따져 묻지 않았다. 알을 품지 않는 닭을 볼 때마다 혜란은 찬이처럼 조바심이 났고 할머니가 가져가서 모두 먹어버리기 전에 병아리가 나오기를 바랐다.
“집에서 키운 거라 고기가 맛있을 거여. 언제 날 잡아서 닭죽을 쒀 먹어야겠다.” 어느 날 마당을 오가는 닭을 살피듯 쳐다보면서 할머니가 말했을 때 찬이는 겁먹은 얼굴로 불안하게 몸을 떨었다.
골목길을 절반쯤 걸어 나왔을 때 혜란은 등 뒤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우뚝 멈춰 섰다. “같이 가야지.” 걸음을 멈추었지만 혜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따듯하고 상냥했다. 혜란은 어둠을 밀어내면서 서둘러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다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
남자는 다정하게 나무라면서 혜란을 따라오고 있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을 누르면서 바삐 걷고 있는 혜란 앞으로 희고 작은 푸들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그렇지. 거기서 기다려.”
어둠 속에서 다가온 남자가 푸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혜란은 개와 남자를 흘깃 한 번 쳐다본 뒤 불빛이 보이는 횡단보도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과 불안은 잠시 잠깐이었다.
찬이의 닭은 어느 날 아침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새벽에 대문을 열어놓은 사람은 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