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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란 Nov 17. 2019

도착하지 않은 사람과 남은 이야기

옥과

올해 여름 나는 목 백일홍이 만발한 담양에서 글을 썼다. 내가 두 달 동안 머물렀던 방은 담양군 중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외진 마을에 있었다.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마을에는 가게가 없어서 과일이며 간식을 사려면 하루에 여섯 차례씩 오가는 버스를 타고 창평 읍내까지 나가야 했다.

어느 날 나는 옆방에서 글을 쓰는 이 선생님의 승용차를 얻어 타고 곡성 쪽으로 가서 관음사에 들렀다가 옥과 읍내에서 장을 보았다. 로컬 푸드가 진열된 식료품 매장에서 삶은 옥수수와 토마토를 사고 밖으로 나와 잠깐 걷다가 차를 타고 방으로 돌아왔다. 옥과는 아늑하고 조용했다. 한적하지만 쓸쓸하지 않은 소읍이 퍽 인상적이었다. 

며칠 뒤 다시 차를 얻어 타고 성륜사에 갔다가 옥과 읍내에 들러 자두와 커피를 샀다. 하늘은 맑고 해가 기울지 않은 시간이었다. 식료품 매장을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읍내를 걷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가자면서 이 선생님이 앞장을 섰다.

낮은 건물들이 띄엄띄엄 서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자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나왔다. 여름방학 기간인데 고등학교 교문을 들고나는 학생들이 보였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남학생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이 선생님과 나를 지나쳐 갔다.

이 선생님은 장을 볼 때 늘 옥과로 온다고 했다. 거리로 따지면 창평 쪽이 가깝지만 옥과에 와서 과일을 사고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고 성당 뜰을 거닐다가 방으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나는 옥과에 끌리는 이 선생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시외버스터미널과 학교와 도서관과 성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소읍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옥과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 어떤 이야기는 문득 시작되고 어떤 이야기는 천천히 오랫동안 품어야 쓸 수 있었다. 옥과는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대도시에서 자랐고 높은 빌딩과 아파트,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동네를 전전하며 살고 있었다. 사람들로 숨이 막히는 도시가 견디기 어려워지면 나는 노트북과 옷가지를 싸들고 한두 달 시골로 도망치곤 했다. 가족과 지인들, 일터가 도시에 있는 나는 한적한 곳에서 잠시 숨어 있다가 어김없이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무더위 때문에 당분간 휴업한다는 팻말이 걸린 공중목욕탕을 지나고 불빛이 환한 도서관을 지나서 성당으로 가는 길목으로 들어서자 이 선생님은 담벼락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걸 보세요. 옥과 성당과 썩 어울리는 표지석이에요.”

골목 담벼락에 세워져 있는 성당 표지석 앞에 서서 이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길쭉하고 편편한 돌에 옥과 성당이라고 글자가 새겨진 표지석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는 이 선생님 옆으로 다가갔다.

골목 한쪽 귀퉁이에 서 있는 표지석을 본 순간 나는 옥과 성당도 단아하고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이 선생님은 불자도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나는 이 선생님 덕분에 성륜사의 배롱나무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고 옥과 성당의 아담하고 정겨운 표지석을 볼 수 있었다.

옥과 성당은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성당 바깥뜰을 천천히 거닐었다. 뜰에는 소나무 몇 그루와 성모 마리아 상이 서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베트남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고 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노트북을 켜고 옥과라고 제목을 지은 한글파일을 만들어놓았다. 어떤 소설은 불쑥 제목이 떠올라서 쓰기 시작하고 어떤 소설은 완성한 뒤에도 제목을 짓지 못해서 끙끙거리기도 했다. 오래전에 쓴 단편소설 <파프리카>는 마트에서 노랗고 빨갛고 보랏빛 파프리카를 사와 씻고 썰어서 먹다가 문득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사물과 장소는 소설의 모티프가 되었다. 창작 동기가 되었다. 하루 종일, 몇날 며칠 동안 소설을 쓰라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고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옥과 읍내를 거닐고 성당의 표지석을 보고 성당 뜰을 거닐고 돌아온 뒤로 나는 내내 옥과를 생각했다.


내가 머무는 방은 에어컨이 없어서 8월 초순경이 되자 한낮에는 물론이고 저녁에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이 선생님은 아침 식사를 하면 차를 몰고 옥과로 갔다.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배가 고프면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성당 뜰을 거닐다가 다시 도서관으로 가서 저녁이 될 때까지 읽고 쓰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틀어박힌 채 옥과를 생각하다가 답답해지면 나는 편백나무와 팽나무가 서 있는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 한쪽에 상추와 깻잎, 풋고추, 오이, 단호박이 심긴 텃밭 주위로 백일홍이 피어 있었다. 나는 밀짚모자를 쓰고 대문 너머로 텅 비어 있는 신작로 쪽을 바라보았다. 창평으로 오가는 버스가 하루에 여섯 차례씩 정류장에 멈췄다가 출발했지만 옥과로 가는 버스는 없었다.

버스가 오지 않아도 나는 옥과에 갈 수 있었다. 햇빛이 쨍쨍한 한낮이든 어두운 밤이든 나는 머릿속으로 난 길을 걸어 아늑하고 조용한 소읍으로 향했다. 목욕탕과 도서관이 있는 거리를 걷고 베트남 쌀국수를 파는 식당과 양품점이 있는 길을 걷다가 골목 담벼락에 서 있는 표지석을 지나 소나무가 서 있는 뜰을 걷다가 성당으로 갔다. 

어느 날 나는 옥과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도심으로 가는 버스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매표소를 지나쳐서 이제 막 터미널에 도착한 시외버스 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캐리어를 들고 버스에서 내린 여자가 나를 지나쳐서 걸어갔다. 나는 여자를 뒤따라갔다. 배롱나무와 석류나무의 줄기가 담장 너머로 뻗어 있는 작은 집 마당을 기웃거렸다. 활짝 열어놓은 대문 안쪽으로 토방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나는 마루를 지나고 방으로 들어섰다. 대발을 늘어뜨린 창가에 여자가 서 있었다. 

소설이 시작되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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