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차분하고 편안하다. 여행을 시작한 지 20여일 째 만에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다. 아빠도 나도 한국인 특유의 열심으로 대중교통으로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안식일까지 피해서 이동하다 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젠 한동안 에일랏에 머물 테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일기를 썼다.이스라엘 북부를 여행할 땐 그래도 이런저런 기록을 남길 수 있었는데 그 뒤로는 하도 숨가쁘게 다니느라 일기를 쓸 짬이 안 났다. 블루투스 키보드로 그간 다닌 여행지와 감상을 써서 간략히 남기고 사진도 정리하는데 채근하는 아빠. "얼른 홍해 가 보자. 엄청 예쁘다잖아."
어휴 가자 가!
홍해(Red sea)는 그 안에 주로 서식하는 빨간 산호초 덕분에 `빨간 바다'라는 이름이 붙었다지만, 산호초가 대거 밖으로 쓸려나오거나 하지 않는 이상 평소에는 여느 바다 못잖게 푸르다. 오늘은 수영할 생각이 없어서 만일을 대비해 수영복을 챙기기만 했는데 막상 바다 구경하러 나가 보니 으아아아 이건 들어가야 돼! 물이 너무 맑고 예쁘잖아! 해서 주섬주섬 꺼냈다.
햇빛에 비쳐 반짝반짝 빛나는 바다
새까만 건 대추야자다
홍해 물은 약간 동남아 바다처럼 비취색 빛깔을 낸다. 한국 바다처럼 탁한 물 색깔은 아니다. 그리고 겨울에 가도 한국의 여름 바다보다 약간 차가운 수준이라 놀기 나쁘지 않다.
다리가 닿는 깊이인데도 잠수하니 노란색 빛깔 물고기들이 다 보였다. 떼를 지어 이동하는 비취색 물고기 떼도 두 부류나 발견했다.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나중에는 계속 그 녀석들만 따라다니면서 관찰했다. 한참 놀다 해안가로 나와 바다를 바라보며 대추야자를 먹으면 퍽 평화로웠다.
1시간쯤 놀고 나니 몸이 너무 추워져서 수건으로 대강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샤워실이 없기 때문에 소금기 가득한 머리를 그대로 말리려니 좀 찝찝했다.
토스트와 핫도그
가까운 노점상에서 사 먹은 핫도그와 토스트는 허기 때문인지 굉장히 맛있게 느껴졌다. 아빠가 소금기 때문에 이리저리 뻗치는 머리를 어떻게든 해 보겠다며 화장실에 가시더니 머리를 쫙 밀어서 올빽으로 만드셨다. 보기에 별로였으나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시는 아빠를 존중해 드리기로 했다.
오후3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새로운 활동을 하기엔 애매하지만 집에 가기엔 또 일렀다. 이것 저것 검색하니 멀지 않은 곳에 조류공원이 있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택시를 타기로 했다.
자동차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25세켈을 주니 순식간에 조류공원 입구 앞까지 달려 우리를 내려주었다. 공원에 도착할 즈음이 4시여서 살짝 어스름이 지고 있었다.
공원은 새들을 가둬놓고 구경하는 동물원 방식이 아니라 커다란 서식지를 조성하고 관광객들이 거길 걸어다니며 새를 구경하는 생태체험 방식이었다. 새들은 그 곳을 서식지 삼아 살기도 하고 철이 지나면 다른 데로 날아가기도 한다. 유명한 가이드북에도 잘 소개되지 않은 곳인데 새들의 삶에 크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이 자연에서 노니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도록 공간을 꾸며놓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때 동물원과 동물 만지기 체험만 고집했던 한국도 최근에는 이런 공존형 체험공간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안에 이렇게 들어가서 보게끔 돼 있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돌며 걸으니 새들이 호수 위를 맴도는 모습과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해가 비치는 연못의 수면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연신 들이댔지만 나중엔 우리끼리 기념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두루미과의 큰 새가 호수를 걸어다니는 걸 발견하고 가까이서 보고 싶어 다가갔으나 그 녀석은 무심하게 앞을 주시하더니 곧 날아갔다. 해가 지기 직전까지 새들을 보다가 5시경 어둑어둑해질 때 쯤 공원을 나왔다.
숙소로 돌아와 볶음밥을 만들어 먹고 커피를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자기 전에 아빠랑 내일 뭘할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솔직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봐서 그런지 좀 지쳤고 새 것을 보고 싶은 에너지가 별로 없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내일은 정말 아무데도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이야기했다. 아빠는 하루를 그냥 날리는 것이 조금 아쉬운 듯 했지만 그래도 내가 피곤하다하니 그렇게 하자 하셨다.
뭐, 결론은 그 다음 날도 결국 밖으로 나갔다. 이 놈의 가성비주의!
"딸, 아빠가 생각해 봤는데 말야."
다음날 아침 8시였다. 아침잠을 헤매는데 아빠가 머리 맡에 앉으시더니 계속 말을 거셨다.
"딸이 그동안 숙소 예약하랴, 길 찾으랴 혼자 너무 고생해서 많이 지친 것 같아. 아빠가 미안해."
잠결에 들은 거라 왜 이러시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빠는 내가 어제 지친다고 한 것에 마음이 많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자꾸 택시 안 타고 버스 타고 다니고 한 것도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 돈 아끼지 말고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것들 많이 경험하고 가야지. 이제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쓰자."
이렇게반가운 말씀을.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그럼 스쿠버다이빙도 하고 수족관도 가?"
스쿠버다이빙은 1인당 10만원, 수족관은 3만원이었다. 둘이 합치면 26만원을 하루에 쓰는 셈이다. 이제까지 나는 둘 다 하고 싶었고 아빠는 하나만 하자는 주의였으나 이 기회에 밀어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가자. 둘 다 하자!"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 이불을 정리했다. 아빠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나가야 한다.
밥을 대충 챙겨먹고 휘적휘적 걸어서 로터리까지 나가보았으나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올 기미가 안 보였다. 찾아보니 40분 넘게 기다려야 한다기에 아침의 교훈을 살려 택시를 25셰켈(9천원) 주고 탔다. 평소 같았으면 기다렸겠지만 오늘 우리는 돈을 쓸 준비가 돼 있다구!
홍해 주변엔 여행 앱에 소개된 유명 다이빙센터가 줄지어 있었다. 강사에게 간단한 숨 쉬기 강습을 받고 다이빙 수트를 입으러 들어갔다. 스쿠버다이빙이 처음이라 긴장이 많이 됐다.
바다에 한 번 적셔진 다이빙 수트는 차가웠고 몸에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앗 추워 소리를 절로 내며 어찌저찌 옷을 다 입었는데 강사 왈 "반대로 입었네." 어디가 앞인지 말이나 해 주지. 결국 앗 추워를 다시 반복하며 다시 입었다.
심지어 수트를 돌려 입고 있는데 왠 남자 스탭이 문을 확 열고 들어와서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 묻는 것이다. 밖에서 물어보면 되지 문은 왜 연담. 칸막이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대참사였을 것이다. 탈의시설도 사람들 마인드도 정말 좋지 않았다. 역시 이스라엘이다.
밖으로 나오니 우리를 담당하기로 했다는다이버가 다가왔다. 다행히 문을 막 열어대던 문제의 스탭은 우리 담당이 아니었다. 다이버가 숨 쉬는 법을 알려주며 `걱정하지 마라', `정말 재미있을 거다' 라고 우리를 응원해 주었지만 너무 잘생겨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자세히 집중을 못했다.
산소탱크를 이용해서 입으로 숨쉬는 것을 연습하면서 조금씩 깊은 곳으로 들어가 홍해 바닷속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산호초 주변을 조금씩 돌았으나 나중에는 바다 아래까지 내려가서 물고기들을 관찰했다. 물고기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았고 주황색의 아주 작은 열대어 떼와 보라 형광색의 나폴레옹 물고기, 니모친구 파란색 물고기, 꼬리에 점이 있는 형광파랑 물고기까지 종류가 꽤 많았다.
물고기들은 사람을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유유히 손가락과 몸을 지나쳐서 헤엄쳐 갔다. 우리가 들어갔던 곳은 10m남짓으로 그렇게 깊지는 않아서 바닥까지 닿을 수 있었다. 바다를 헤엄치면서 총천연색의 물고기를 볼 수 있다는 게 꿈 같았다. 중간에 작은 동굴도 보고 말미잘 속에 숨은 물고기 떼도 봤다.
다이버는 내가 적응을 잘 한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톡톡 손가락으로 부르고는 저길 보라고 해수면을 가리켰다. 거기에 주둥이가 엄청 길고 작대기처럼 생긴, 엄청나게 특이한 투명색 물고기가 있었다. 너무 신기하게 생겨서 나도 모르게 헉, 했는데 그러다가 코에 물이 확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호흡을 조절하지 못해 숨이 턱 막히자 당황했고 코가 본능적으로 숨을 쉬려고 뭐든 빨아들이는데 그게 산소가 아니라 물이라서 다시 뱉어내고, 근데 산소가 필요하니까 다시 물을 들이키는 일이 반복됐다. 허우적대면서 위로 올라가는데 머리 위로 찰랑거리는 해수면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바다 밖으로 나와 컥컥 기침하자 다이버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괜찮다고, 처음 치고 잘했다고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물고기는 코넷피쉬라고 하는데 홍해에서 주로 발견되는 희귀종이라고 한다)
내가 너무 놀란 원인 이거다. 코넷피쉬. 사진 위키피디아 출처
코넷피쉬. 게티이미지 뱅크 출처
물 속의 25분은 꿈 같았다. 맑은 물 속의 물고기를 보는 건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로도 이틀 간은 눈만 감으면 그 파랗고 아름다운 바다와 물고기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다만 다이빙을 하고 나와서 도로 센터로 이동하는 길이 그리 좋지 않았다. 바다에서 막 나와 완전히 젖은 상태로 픽업차량이 올 때까지 십 분 가량을 밖에서 서 있어야 했고(이스라엘은 뭐든지 제때 하는 법이 없다) 내려서도 샤워실을 직원들이 계속 들락거려 씻는 게 편하지 않았다. 그래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나오니 추위가 많이 가시긴 했다. 개운한 마음으로 나와서 챙길 것들을 챙기고 커피를 두 잔 타서 나왔다. 점심으로 숙소에서 삶아 온 계란 두 개를 소금 쳐서 먹고 건살구도 입에 하나씩 물고 걸었다. 마침 아쿠아리움도 다이빙센터 앞에서 바로 버스가 가서 그것을 타고 이동했다.
홍해 아쿠아리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홍해 아래로 유리관을 뚫어 만든 '언더워터 파크'다. 수족관 안에 바다를 만들어서 그것을 보는 방식이 아니라 바다 안에 유리로 된 관찰관을 만들어서 바닷속을 들여다 보는 방식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바닷속 풍경이 아니라 진짜 물고기들이 사는 곳을 들여다 보는 것이어서 더 새롭고 신기했다.
다이빙해서 봤던 물고기들을 다시 여기서,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따뜻하고 편안하게 보는구나 생각했다. 그 때 봤던 물고기들을 발견하니 더욱 반갑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난 저거 직접 봤지롱.
물론 아쿠아리움 안에도 가둬놓은 물고기 어항이 있었다. 희귀한 물고기를 모아놓은 풀이나 상어 풀, 바다거북 풀 등이 있었다. 지금은 자연에 살던 물고기를 가둬다가 관찰하는 방식이 다소 폭력적이라 느껴져 더는 아쿠아리움을 가지 않지만 그 때는 마냥 좋았다.
특히 원형으로 만들어 둔 수족관에 상어들과 쥐가오리가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한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 곳에서 아빠는 동영상을 찍고 나는 동영상을 찍는 아빠를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보니 16번 버스는 40분 뒤에나 온다고 했다. 이미 돈을 많이 써서 이 정도는 기다렸다가 탈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오래 기다려서 탄 버스가 고작 우리를 로터리에 떨어뜨려서 또 다시 20분을 걸어와야 했다. 우리가 도심에 있는 호텔이 아니라 동네에 있는 집에 묵었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대문을 열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서 2층으로 갔다. 내일이면 에일랏을 떠난다는 게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아쉬웠다. 집에 도착해 토마토와 감자를 삶고 햄과 페퍼를 다져서 볶음요리를 해 먹고는 꼴까닥 곯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