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럽게도 노보텔을 금방 찾았다. 사거리에서 봤을 때 노보텔 이름이크게 적힌 건물이 보여 그리로 계속 걸었는데 다행히 길을 잃지 않고 곧바로 도착했다. 로비로 들어서니 휘파람을 불던 남자들은 더는 없고 친절한 호텔 직원들만 있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와이파이를 빌려 미스터지에게 왓츠앱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내 연락에 1시간 넘게 답하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옆에 있던 아랍인 호텔리어에게 부탁해 미스터지의 휴대폰으로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나는 불안과 초조를 넘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미스터지가 연락을 해 온 건 그로부터 30분이 더 지나서였다. 그는 내게 왓츠앱 답장을 보냈다. "연락이 늦었어요 쏘리! 내 사촌이 데리러 갈 거예요."
나는 사촌이고 오촌이고 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젠 됐다고 생각해 호텔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친절한 호텔리어가 일행을 만날 때까지 로비에 있어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윽고 미스터지의 사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더니 수줍게 "하이" 하고 인사를 했다. 나는 배가 너무 고팠으므로 그를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스터지의 사촌은 자기 이름은 아흐무드라며 반갑다고 했다. 내가 예스 예스 하고 차는 어딨니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데 그가 우리 숙소의 반대 방향으로 앞장을 섰다. 호텔 주차장이 비싸서 먼 데다 댔나? 의아했지만 그가 날 픽업하러 왔다고 하니 일단 따라갔다.
아흐무드는 걸으면서 계속 이것저것을 나에게 물어봤다. 아이스크림 좋아하느냐, 나는 홀어머니랑 함께 산다, 네가 마음에 든다 등등. 대강 그의 이야기를 받아주면서 언제쯤 주차장이 나오나 했는데 20분 넘게 걸어도 주차장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우리는 나일강을 건너 다운타운까지 와 있었다.
"다 왔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웬아이스크림 가게였다. 나는 이런 델 오자고 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자니 아흐무드가 신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오더니 내게 쥐어주었다.
"고마워, 근데 차는 대체 어딨는 거야?"
그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차는 없어. 걸어서 갈거야, 너희 집으로!"
나는 그때서야 모든 상황이 한 번에 이해되었다. 이 녀석은 지금 나랑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홀어머니랑 살고 있고 자기는 옛날에 권투를 했다는 류의 시덥잖은 얘기를 계속 하면서 아이스크림가게로 걸어간 것이다.
나는 격분했다. 집으로 가겠다고, 나는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고 화를 냈다. 그는 당황하더니 "왜 그래, 너희 집은 엄청 가까워"라고 말했다. 내가 그새 지리를 잊은 것인가? 내가 묵는 숙소는 노보텔 반대 방향으로 한참 가야 하는데.
일단 그를 다시 따라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집으로 데려다 줘야 해, 나 지금 너무 지치고 화가 나."
그에게 말하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너희 집 내가 잘 안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미스터지에게 주소를 받아뒀느냐고 하니 알고 있다고 한다. 하여 20여분을 더 걸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다시 노보텔. 내가 1시간 전에 나온 그 노보텔 로비였다.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물었다. "너 사는 데 노보텔 아니야?"
다시 노보텔로
나는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택시를 타겠다고 아흐무드를 제치고 밖으로 나오니 그가 뒤따라 오면서 미안하다, 미스터에게 다시 전화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고 사거리를 향해 나가는 중이었다. 아흐무드가 미스터지와 뭐라고 아랍어로 통화를 하더니 나를 다시 불렀다.
"내가 잘못 알았어. 이번에는 진짜 맞아. 내가 주소 받았어."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미스터지에게 너무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나한텐 다른 방법이 없었고 누가 운전하는지도 모르는 택시를 타는 것보단 이 남자를 따라가는 게 더 안전한 게 사실이었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며 만약 이번에도 아니면 나는 미스터지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며 나를 지하철역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묵은 숙소는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있었다. 그가 오지 않았어도 지하철을 탈 줄 알았다면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나는 지하철을 탈 줄 몰랐으므로 그의 같잖은 에스코트를 받으며 지하철을 타야만 했다. 이집트의 지하철은 성별이 엄격하게 구분돼 있었으므로 나는 그와 헤어져 여성 전용 칸으로 이동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 두 정거장 뒤에 내렸을 때 아흐무드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흐무드는 나를 반기며 숙소로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도심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늘 미스터지가 차로 태워다 주었으므로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가는 길은 잘 몰랐다. 이번에도 아흐무드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아흐무드는 그 순간에도 남자친구 없냐, 여름에 같이 놀러 가자, 너랑 같이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와 같은 말을 끝없이 해 댔다. 헤어지기 직전엔 영 아쉬웠는지 "가정이 필요하지 않니, 남자친구가 필요하지 않니?"라고까지 물었다. 자기는 결혼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 어머니랑 같이 살면 된다며. 메트로에서 내려 숙소까지 걷는 20분이 너무나 길었다.
아흐무드에 따르면 미스터지는 단지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를 픽업하는 일을 사촌에게 떠넘기고서 제대로 상황설명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사흘치 가이드비용을 미리 낸 나로서는 억울하고 화가 났다. 추측컨대 그는 냅다 사촌에게 전화 걸어서 노보텔 근처지 좀 걸어갔다와라 아시안 여자애 한 명 거기서 기다린다고 얘기하고 끊었을 것이다.
너무 화가 치밀어서 미스터지에게 전화로 막 퍼부어대고 싶었으나 내 휴대폰으론 전화가 불가능했다. 나는 그에게 항의의 왓츠앱을 열 다섯 개 정도 보내고 아흐무드를 쫓아냈다.
진짜 짜증나는 건 아까 나 혼자 걷고 있었을 때는 그렇게 휘파람을 불어대고 농담을 하던 남자들이 아흐무드랑 걸을 때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지나갔다는 것이다. 조금 전 상황과 너무나 달라 황당할 정도였다. 그래, 지금은 옆에 `보호자'가 있다 이거지. 아까 홀로 있던 나를 그렇게 우습게 본 게 단지 옆에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오후9시가 다 돼 가고 있었고 배가 너무 고팠다. 원래는 좋은 식당에 가서 맛 좋은 식사를 할 예정이었지만 그럴 때를 넘겨버렸다. 호텔 옆에 불이 켜진 식당에 무작정 들어가 치킨과 빵, 샐러드, 음료수를 시켜 정신없이 먹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카이로에서의 마지막 저녁이 볼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