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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sa S Feb 18. 202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짧은 휴가와 설연휴가 붙어 있던 일주일 동안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언젠가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구매한 뒤 오랫동안 내 책장에 꽂혀 있다가 마침내 나의 손에 들린 책이었다.



나의 취향에 맞을 거라는 추천인의 말에 참을성 있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약간은 지루했다. 도발적인 제목이 흥미를 끌었고, 의외의 주제에 놀랐고, 저자의 개인적 서사가 몰입력을 높여주었지만. 그리고 책의 전체적인 메시지가 충분히 훌륭하고 나 역시 동의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나에겐 새롭거나 참신한, 그러니까 내가 가진 무수한 질문들 중 어느 하나에 단서를 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아마 그것은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내게 이미 익숙한 수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페인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 전통 체크무늬 (남성용) 치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분야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사실 그 이유는 모두 비슷하다.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근거에 기반하지 않은 '상상의 산물'이자 '편의상의 분류'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부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신학이 아닌 종교학이다.) 종교학의 대가들조차 '종교'를 명쾌하게 정의 내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나는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 하나를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은 자신을 넘어선 세계 앞에서 적절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이해할 수도 적응할 수도 없는 죽음의 법칙 앞에서,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경이 앞에서, 언제나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식으로 얘기하면, "혼돈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그 혼돈을 설명해 줄 법칙을 누군가 부여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존재하지도 않는 '물고기'라는 범주를 설정하게 만드는 분류학이든, 자연의 생물들을 자의적인 우열의 층계에 따라 일렬로 줄지어줄 창조론이든 간에. 인간은 늘 그런 것을 갈망한다.


그리고 그것은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아간다. 주술, 종교, 과학에 대해 탐구한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와 제임스 프레이저는 "주술은 원시인의 과학"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주술과 종교를 한데 묶고 과학을 따로 떼어놓고 싶겠지만, 사실 인과관계와 통제력을 초월적 존재에게 내맡겨버린 종교와 달리, 주술과 과학은 그 메커니즘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주어진 현상 A에 인간이 힘을 가하면 인간은 자신이 원하던 A-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연금술이 화학의 아버지이듯 주술은 과학의 전신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과학은 현대인의 주술"인 것이다. 과학은 자연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법칙을 부여한 뒤 그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우리 욕망의 산물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펼쳐 보여준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저서 <황금가지> 한국어 번역판

인간은 자연에 (멋대로) 법칙을 부여하고, 그것을 통제하려 든다. 그 과정엔 늘 '구분짓기'가 함께한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무엇이 '우월'하고 '열등'한지.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는 우리가 '청결'하고 '불결'하다고 믿는 것들에도 얼마나 많은 상상의 질서가 덧씌워져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너무나도 많은 시대에 너무나도 많은 문화권에서 발견되어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는 '수용소'에 대해 혀를 내두르며 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 역사에도 너무나 뿌리깊게 박혀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아마 부산의 형제복지원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들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재정권은 서울시립부녀보호지도소에서, 대한청소년개척단이 보내진 서산 개척지에서, 그리고 다른 많은 '수용소'에서 비슷한 일을 자행했다. 비극적인 것은 그런 일이 독재정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95년 일어난 경기여자기술학원의 화재사건은 여전히 수용소는 사라지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기사는 “1998년에 여성 수용시설은 모두 폐쇄되었다”고 적고 있지만 이름과 명분이 바뀐 수용시설들은 여전히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의 과반수 이상은 그곳이 정확히 '수용소'였던 시점부터 그곳에 있던 이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우생학의 시대에는 더 이상 살지 않지만, 여전히 사람을 '적합'과 '부적합'으로 나누던 일들의 무게를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이름과 양상이 바뀌어도 그런 일들은 여전히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진다. 나와 너를 구분짓고 멋대로 판단하고 낙인찍는 일은 일상에서도 너무나 자주 벌어져서 때론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조차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서로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기준은 언제나 자의적인 것이며, '적합'하지 않고, 당신이 '적합'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당신의 존엄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 사람들은 늘 자신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적합/부적합의 울타리를 없애는 대신 '적합'의 이름표를 받아내는 데 몰두하는가. 그것은 이 세상에게, 스스로에게 던지는 내 오래된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질문이다.




내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지루하게 느낀 것은, 아마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미 내가 작년 한 해 동안, 혹은 지난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주목하고 탐구하고 질문하고 답했던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 거짓이고,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이며, 그 무엇도 영원을 약속할 수 없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건 그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다음은 제법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해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설득하는 건 제법 어려웠다.


다행히 나는 너무 늦지 않게 답을 찾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어쨌든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엔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 나는 일정한 물리적 공간과 시간이라고 불리는 무언가를 차지하고 살아있다. 나는 그 사실에만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더 이상 '훌륭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남기기 위해 애쓰거나 (어차피 그건 사라질 것이다) 모두를 '더 낫게' 하는 대단한 일을 하겠다는 (어차피 그 효과는 영원하지 못할 것이다) 거창한 포부를 품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살아있으므로, '지금'이라 불리는 모든 순간이, 내가 지나가고 나면 그 자리에 흔적으로 남을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가볍고 무해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를 바란다. 언젠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될 때까지.


그래서 나는 이 책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 책이 지루했다고 말하면서도 이 책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룰루 밀러가 말해준 자신의 새로운 삶이 다정하고 아름답게 반짝여서, 마침내 나는 이 책이 지루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 여름, 영화를 보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마침내 나는 이 세상이 지긋지긋하지만 그래도 내가 보고 있는 이 세계를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듯이.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런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더 많이 찾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참고하면 좋을 책

만들어진 전통 / 에릭 홉스봄 외 지음 ; 박지향, 장문석 [공]옮김 서울: 휴머니스트, 2004.

문화로 본 종교학 / 맬러리 나이 지음 ; 유기쁨 옮김 서울: 논형, 2013.

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 유발 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파주: 김영사, 2015.

순수와 위험 : 오염과 금기 개념의 분석 / 메리 더글라스 지음 ; 유제분, 이훈상 [공]옮김 서울: 현대미학사, 2005.

스페인사 / 레이몬드 카 외 지음 ; 김원중, 황보영조 [공]옮김. 서울: 까치글방, 2006.


참고하면 좋을 영화

새벽 두 시에 불을 붙여 / 유종석 감독. 2022. 극. 19분.

서산개척단 / 이조훈 감독. 2018. 다큐멘터리. 76분.


참고하면 좋을 기사

 호객했다고, 남자들과 싸웠다고 가둬…‘여성수용시설’ 인권침해 첫 확인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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