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에 스며있는 대왕의 효심

대왕이 하늘 향해 울부짖다 땅으로 토해낸 思父哭

by 숲속의 고목나무

非壯麗 無以重威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정조실록 38권)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성곽은 장엄했고 사대문은 광대하여 이곳은 누구도 범접키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이 웅장한 수원화성 안에도 비좁고 남루한 암문暗門이 몇 있으니 이들은 마치 몸을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숨죽이며 은신하고 있는 듯하다. 암문은 성곽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비좁은 출입구, 오늘도 누군가가 비 내리는 성곽 아래의 풀숲을 헤치고 조심스레 그곳을 드나들고 있는 것 같다. 광기 어린 눈을 희번득이면서.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번뜩이던 그날 밤, 이선李愃이 죽다.


나는 서른넷에 아들을 봤다. 아무리 곱씹어도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아비이니 옛날로 치면 내 아이는 철저하게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셈이다. 그래도 그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이는 내가 노비의 신분이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식을 얻은 하찮은 필부의 기쁨이 이럴진대 하물며 임금이, 그것도 마흔둘에 아들을 얻었다면, 또한 그 아들이 왕실의 법통을 이을 세자의 지위라면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이선李愃은 그런 축복 속에 태어난 자식이었다. 임금 영조가 마흔둘에 본 아들이니.


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1762년 윤 5월 13일, 창덕궁 문정전 앞으로 불려나온 세자는 자결을 명한 아버지에게 살려주십사고 애원하고 있었다. 애원하는 이는 세자만이 아니었다. 열한 살 먹은 세자의 아들도 함께 울부짖었다. 임금인 아비는 스스로 죽어라 하고, 세자였던 아들은 살고자 애원하며, 어린 세손은 제발 자기 아비를 살려 달라 울부짖고 있으니 그때 그곳은 궐이 아니라 무간지옥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아버지이자 세손의 할아버지였던 영조는 이들의 애원을 뒤로 한 채 아들을 뒤주 속에 가뒀다. 틈만 나면 궁궐의 담을 타넘고 탈출하여 기행을 일삼는 세자에게 아예 운신을 못하도록 하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로부터 8일 후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천둥 번개가 번뜩이던 그날 밤, 벌써 일주일이나 뒤주에 갇혀 운신을 못하던 이선李愃은 숨을 거두었다. 임오년의 일이었다. 그렇게 무참하게 죽은 세자는 후일 사도思悼로 불리었고 그날 애끓게 울부짖었던 그의 아들은 정조대왕이 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두고 역사는 구구하다. 혹자들은 ‘나경언의 고변’ 때문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노론벽파의 수장이자 사도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의 배척 때문이라 하며, 또 어떤 무리들은 뭉뚱그려 권력암투의 결과라고 했다. 기록은 한 술 더 떴다.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가 사직 보존을 위해 남편 영조에게 아들을 죽일 것을 요청했다니 이든 저든 그 참혹함을 가늠키 어려운 것은 매일반이다.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했을까. 그녀도 죽은 아들의 삼 년 상이 끝나던 그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무참하게 죽은 아비에 대한 그리움과 효심이 이 웅장한 성곽을 축성하게 된 근본이라니 놀랍고 숙연하다.

%EC%9E%A5%EC%95%88%EC%84%B1.jpg 문은 광대하여 위엄이 서려 있다.

城도 門도 가능한 한 크고 높고 넓게 만들어라, 그러나 暗門은 낮고 비좁게 만들어라!


총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라고 했던가. 정조와 다산의 만남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이리라. 그는 아비가 죽은 해에 태어난 신하이기에 더욱더 애착이 갔을 것이다. 정약용은 임오년 생이었다. 정조는 그에게 축성을 명하며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여기는 내 아버지 사도의 영혼이 머무시는 곳이다. 내 아비는 좁디좁은 뒤주에 갇혀 돌아가셨으니 그 얼마나 고통스러우셨겠느냐. 그분께서 이제라도 맘껏 운신하실 수 있도록 城도 門도 가능한 한 크고 높고 넓게 만들어라! 또한 그분은 밤마다 눈을 피해 그 높은 대궐의 담을 넘어 민가로 암행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겠느냐. 이제라도 힘들이지 않고 맘껏 암행하실 수 있도록 적당한 곳을 골라 암문을 만들어라. 오직 그분만 알고 오직 그분만 다니실 수 있도록 암문은 가능한 한 좁고 낮게 만들어 있는 듯 없는 듯하게 하여라!”


장엄한 수원화성 안에는 인적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비좁은 암문이 다섯 있다. 東暗門 西暗門 西南暗門 南暗門 北暗門이 그것이다.

%EC%95%94%EB%AC%B8.jpg 암문은 낮고 비좁아 슬퍼 보인다.

수원화성은 대왕이 하늘 향해 울부짖다 땅으로 토해낸 思父哭


나의 억측임을 안다. 그러나 나는 왠지 이 웅장한 수원화성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나큰 슬픔이 묻어 있는 듯하여 마음이 아리다. 겨우 밥 먹고 사는 나 같은 필부도 낳고 길러준 아버지가 고마워 날이 갈수록 그리운데, 나라님이 되어 부르는 사부곡에 어찌 피눈물이 섞여 있지 않겠는가. 돌아가신 아비도 그리운데 죽임을 당한 아비에 대한 그리움이야, 누운 채 돌아가신 아버지도 애석한데 뒤주에 갇힌 채 죽어간 아비의 불쌍함이야 어떻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수원화성은 대왕이 속울음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다 땅으로 토해낸 사부곡이었다. 그래서 수원화성에는 큰 것에도 작은 것에도 모두 슬픔이 묻어 있다. 오늘 이곳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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