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년 전의 인물 중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가 유일하다. 사실은 그보다 그의 생일을 먼저 알았다. 어릴 적에는 푸지게 노는 날인 ‘크리스마스’만 강렬했고 ‘예수’는 단지 연관검색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의 생일은 조금씩 숙연해져 갔고 그는 점점 더 위대해져 갔다. 자신을 던져 세상을 구원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예수보다 천년 후에 살았던 한 사람과,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도 예수처럼 자신을 버려 세상을 구하려 한 사람이다. 다만 예수가 구하려 했던 세상과 그가 구하려 한 세상의 크기가 달랐을 뿐이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이야기다.
팔공산 자락에는 지묘동이 있고 그 안에 신숭겸 사당이 있다. 그는 이곳 어디에선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졌다.
지묘동智妙洞
기묘한 이름의 이 동네는 대구 팔공산의 남녘 자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을 가로질러 맑은 동화천이 흐르고 뒤로는 왕산王山이 소담스럽게 솟아 있는 작은 동네다. 한눈에 보기에도 순해 보이는 지금의 마을 풍경과는 달리, 칼과 창과 화살에 찔린 병사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 골짜기를 붉게 물들였던 때가 있었다. 신묘한 지혜가 발현되었다는 동네, 즉 지묘동의 옛 이야기는 그때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1,100여 년 전 그러니까 927년 음력 11월, 이 골짜기에서 적들에게 포위된 왕건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는 지금의 개성인 송악에서 사흘 밤낮을 달려왔다. 신라 왕비를 범하기까지 한 후백제의 견훤을 때려잡기 위해서였다. 서라벌이 함락되고 경애왕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병 오천을 일으켜 한달음에 내려왔지만, 동태를 미리 파악한 견훤의 매복에 걸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이미 영천 은해사 부근에서 1차 기습공격을 당해 상당수의 병사를 잃었다. 그런데다 지금은 진지 바로 뒤에 있는 산 위로 올라가는 것 말고는 모든 퇴로가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이었다. 대열의 선봉에는 ‘고려국 대왕 왕건’이라는 검붉은 깃발이 엄동의 세찬 골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애나 어른이나 사람이나 나라나, 싸움은 ‘성질나서’ 시작되는 것이다. 견훤은 927년 정월초하룻날에 자신의 전략요충지인 예천의 용비산성을 뺏기고 잔뜩 성질이 나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연합군이 후백제를 협공한 이른바 용주전투에서의 패배다. 가뜩이나 작년에는 승부를 내지 못한 조물성 전투에서 화친 조건으로 고려에 보낸 사위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어버린 터였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백제에서 신라 수도로 연결되는 최단 코스의 요충지인 합천 대야성마저 왕건에게 뺏겨 버렸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견훤이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한 몸이나 다름없는 고려의 옆구리를 찌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왕건 또한 성질이 나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성질’ 때문에 시작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제일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은 ‘성질’이었다. 그동안의 경과로 보아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견훤은 그랬다. ‘성질’을 버리고 그들의 길목에 매복하는 전략을 택해 마침내 왕건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를 간파하지 못한 채 ‘성질’부터 앞세웠던 왕건은 공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사면초가의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윽고 두 남자는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죽기 위해 옷을 벗었고 또 한 사람은 살기 위해 벗었다. 통일의 대업을 위해 반드시 살아야 할 사람은 임금이었다. 지금 이 순간 적들이 원하는 것 또한 임금의 수급이었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반드시 왕건을 살려야 했고, 고려와는 견원지간이었던 견훤은 필히 왕건을 죽여야 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왕건의 목숨은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그들은 벗은 갑옷을 서로 바꿔 입기 시작했다. 신숭겸은 스스로 죽기 위해 왕건의 옷을 입었고, 왕건은 어떡하든 살아남기 위해 신숭겸의 옷을 입었다. 이제 그들의 삶과 죽음은 오직 입은 갑옷의 문양에 달려 있었다.
“부디 살아 남으셔서 통일의 대업을 이루소서.”
신숭겸의 하직 인사는 스스로 죽기를 결심한 자의 죽는 이유와, 이로써 살아남는 자의 살아야 할 이유를 동시에 설명하고 있었다. 임금은 글썽이는 눈물로 대답했을 뿐이다. 죽음을 염두에 둔 이별은 죽음보다 더 가혹했다. 죽는 자가 슬퍼하지 않고 살아남을 자가 기뻐하지 않는 이별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이별이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고 떠나면 필히 돌아온다는 법어法語도 마냥 진리만은 아니었다. 지금 그들에게 회자정리會者定離는 맞고 거자필반去者必返은 틀렸다. 떠난 자가 돌아오는 길에는 죽음의 강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사당 안에는 신숭겸의 충절을 기려 쌓은 표충단이 있다. 그 뒤로는 왕건이 피신한 길이라 하여 이름 지어진 왕산이 보인다.
적을 등지고 산으로 향한 왕건은 죽음에서 멀어졌고, 산을 등지고 적을 향해 나아간 숭겸은 죽음에 가까워졌다. 적과 가까워져서가 아니라 입은 옷이 임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계곡의 칼바람에 잔뜩 독이 오른 적병의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목젖을 파고들었다. 적은 환호했고 숭겸은 퍼득거렸다. 아직은 의식이 살아 있다. 숨이 끊어지는 고통은 어차피 감당키로 했으니 괜찮다. 그러나 통곡하는 늙은 아내와 흐느끼는 어린 자식들의 모습이 떠올라 한 웅큼의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이승에서의 모든 것은 이것으로 끝났다. 주군의 생사는 죽음의 강을 건너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송악으로 무사히 생환한 왕건은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좌우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여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춘천에 묻었다. 또한 그들이 죽은 곳에는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명복을 빌고 신숭겸에게 장절공의 시호를 내렸다. 비록 팔공산에서 큰 패배를 당했지만 왕건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고려와 후백제는 930년과 934년의 병산전투와 운주전투에서 계속 각축을 벌였다. 왕건은 동수전투와 함께 후삼국 시대의 3대 전투였던 이 두 전쟁에서 힘들게 승리함으로써 통일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러다가 936년 지금의 구미 지역에서 양측 군사 10만 명이 격돌한 최후의 전투, 즉 일리천一利川전투에서 왕건이 승리해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주군의 불굴의 의지와 죽음을 불사한 신하의 충절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극적인 승리였다. 그들이 죽은 지 약 200여 년 후에는 고려 예종이 두 장군을 애도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그들의 숭고한 죽음을 후세에 널리 알렸다.
두 숙적이 맞붙은 팔공산 동수전투(일명 공산전투)에서 왕건의 오천 군사 중 살아 돌아간 병사는 고작 칠십이었으니 왕건은 대패였고 견훤은 대승이었다. 그러나 천년이 지나 패자 왕건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치던 길은 ‘팔공산 왕건길’로 되살아났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면치 못한 패장 신숭겸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죽은 지묘동 자락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나 그 전투의 승자 견훤이 칼을 휘두르며 포효했던 길은 ‘견훤 길’이 아니라 그냥 ‘길’일 뿐이다. 그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역사에서는 패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거울은 단지 동수전투가 벌어졌던 927년 동짓달의 팔공산 골짜기만 비추지 않았다. 처절한 패배 후에도 끝내 좌절하지 않은 자의 굳건한 의지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주군과 나라의 목숨을 구하려 한 자의 신념까지 비추어 역사의 최종 승자를 판정한 것이다. 역사서는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는 교본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관심사는 단지 싸움의 승패만이 아니다.
지금 그대! 혹시 세상의 날카로운 칼날에 베여 무참히 쓰러져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검붉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은 담담하게 패배를 받아들여라. 그러나 훗날 당신을 비추는 역사의 거울이 단지 이 장면만을 기억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다시 일어서 당신의 병산전투와 운주전투를 준비하라.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의 깃발을 쳐든 일리천전투에서의 승자처럼, 당신 자신의 역사 전쟁에서도 기필코 승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