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버지의 숨결을 찾아서
그러고 보니 상하이(上海)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아 있었다. 그때는 무서웠고 지금은 그리운 것이 그랬다. 나는 상하이에서 오롯이 5년, 베이징(北京)을 오가며 5년, 그래서 10년을 살았다. 40 중반, 삶의 해일이 몰아치던 그때 상하이는 내게 무서운 도시였다. 그러나 폭풍우가 지난 뒤 평온을 되찾은 바다처럼 지금은 그립다. 뒤돌아보니 도시는 죄가 없다. 상하이는 가만있었는데 내가 요동친 것이다. 아버지 또한, 그분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 마음만 그랬던 것 같다. 이제 무서움은 지나가고 그리움만 남아서 상하이도 아버지도 다 좋다.
“불 질렀뿌라!”
초등학교 때였다. 아버지는 나를 광에 가두고는 어머니께 그렇게 일갈했다. 말만 들어보면 사도세자가 받은 것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나는 불타는 지옥을 연상하며 안에서 오열했다. 동네 껄렁패 형들이 놀던 노름판을 기웃거린 죄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억울함도 좀 있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곡식 훔쳐 먹는 쥐들과 함께 보내고 나는 석방되었다. 나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연소 투옥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내 싹수는 일찍부터 노란 색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군학일계(群鶴一鷄)였던 내 싹의 색깔을 바꿔보기 위해 자식들 중 특히 나에게 엄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 색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고 나는 무서웠던 아버지의 주변을 빙빙 맴돌기만 했다. 태양에게 다가가지도 떨어지지도 못하고 내내 공전만 하고 있는 지구별처럼.
오랜만에 찾은 상하이는 가을의 문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시내 중심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당루(马当路) 양편에는 제법 굵직한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무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불현듯 나무 이름이 궁금해 가을볕을 쬐고 있는 노인에게 물으니 '우통수(梧桐树)', 즉 오동나무라고 했다. 고루한 건물과 바로 앞의 오동나무는 서로의 속내를 맞춘 듯 조화롭다. 조선의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인 신흠(申欽) 선생의 글이 생각난다. 그 시절 이곳으로 모여든 이들의 기개도 그와 같았으리라.
桐千年老恒藏曲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잃지 않고
梅一生寒不賣香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달은 천 번을 이즈러져도 본 모습 잃지 않으며
柳經百別又新枝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나온다.
황푸취(黄浦区) 마당루(马当路) 302-304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과거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청사다. 상하이에 살던 시절 손님이 올 때마다 별 생각 없이 여러 번 왔던 곳이지만 이번에는 감회가 남달랐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이끈 걸음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너머 강남 강북이듯, 상하이도 황푸(黃浦)강 너머 푸동(浦东) 푸시(浦西)다. 20세기 초, 중국을 집어삼킨 유럽의 외세(外势)들은 와이탄(外滩)이라 불리는 푸시 쪽 강둑에 진을 쳤다. 도시는 자연스레 와이탄을 중심으로 번졌다. 당시 우리 임시정부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려서 힘 안 들어 남이 웃던 행복자(幸福者)고 도규계(刀圭界)에 투신(投身)하여 공(功)인들 있다 하랴. 일본 만주 상해(日本 滿洲 上海)에서 얻은 것 무엇이며 남 위해 한 일 없어 그 또한 낯없어라. 강산풍여월(江山風與月)에 방랑성(放浪性)만 짙던 몸이 갑년(甲年)에 한 맹서(盟誓)도 억진 듯만 하여라.>
아버지는 환갑을 맞이해 스스로 가묘를 짓고 비석을 세웠다. 말은 자식들이 못 미더워서라지만 실은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때 세운 비석 한 면에 당신 삶의 이력과 소회를 직접 써서 새겼는데 위는 그 내용 중 마지막 구절이다. 도규계(刀圭界)란 의사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적 평양의전(平壤醫專)에서 수학하고 공의(公醫)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현역 시절에는 주로 시신 부검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부검의였던 셈이다. 은퇴한 후에는 낙향하여 고향에 병원을 세웠고 나는 그즈음에 태어났다. 아버지 오십에 나를 낳고 내 나이 서른 때 돌아가셨으니 우리 부자는 이 세상에서 삼십 년을 같이 머물렀다. 당신 자신의 삶은 적정했을지언정 자식이었던 나와의 인연은 너무 짧아 애석하다. 그나마도 처음 이십오 년은 내 싹수가 노랬던 세월이고 마지막 오 년은 아버지가 깊은 병중의 세월이었으니 애통함은 더하다. 삼십 년 중 이십 오년은 나 때문에 아버지가, 나머지 오 년은 아버지 때문에 내가 한숨지은 세월이었다.
고층빌딩을 비집고 마당루(马当路)에 내려앉은 가을햇살 사이로 바람이 스친다. 나뒹굴던 나뭇잎은 옅은 바람에도 자지러진다. 험했던 그 시절,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시 출렁였던 임정 요인들의 마음처럼.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분명 이곳을 다녀갔다. 그 당시 상하이는 도시 규모가 작은데다 여기가 중심지 부근이었기 때문이다. 1911년생인 아버지가 이곳을 다녀간 것은 대략 30대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신은 혈기 넘치고 나라는 피 철철 흘리던 일제 치하 때다. 그전에는 공부하던 시기였고 40대에는 6.25 전쟁을 맞았으며 50대 이후 아버지의 삶은 내가 어렴풋이나마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추정이다. 비석에 새겨진 아버지의 행선지, 즉 일본 만주 상해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동선과 대략 일치한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독립투사였다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시절, 그 나이, 그 형편에 현해탄을 건너고 만주 봉천 행 기차를 타면서 유람 다닐 처지였겠는가 싶은 것도 사실이다. 아버지가 만주에 개 팔러 다니거나 상하이 왕 서방들 상대로 비단 장사 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밀정(密偵), 즉 일본의 앞잡이가 아니었던 것도 그렇다. 그렇다면 세월이 칼날 위에서 흐르던 그 시절에 왜 굳이 거기까지 갔는지는 내 아무리 궁금한들 이제 아버지도 비석도 말이 없다.
어렸을 적 왕진 가방을 든 아버지 따라 골짝 마을을 다닌 기억이 있다. 치료 받은 노인들이 내미는 사례금에 손사래 치던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난다. 요즘 말로 하면 의료봉사였던 셈이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 못해 숨이 끊어진 농부 앞에서 한참 동안 망연자실하던 아버지의 모습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 스무 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전날 밤새도록 퍼마시고 중천이 되도록 떡이 되어 퍼져 있는 나를 깨웠다. 그때까지도 나는 싹이 노랬다. 아버지가 무서워 일어나긴 했지만 몸 가누기 힘든 나에게 아버지는 꿩 한 마리를 안기고 앞장섰다. 가묘가 만들어진 앞산 중턱까지 올라,
“날려 보내라!”
산에 오를 때는 물론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한 말은 그것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마을사람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판 꿩을 다시 살려준 것 같다. 아버지는 어려웠던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것은 무엇이든 다 샀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매년 여름 방학 때쯤이면 아버지를 찾아오는 일본사람이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 일본인은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 왔다. 알고 보니 그는 해방이 되던 해 죽창에 찔려 죽은 숱한 일본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한 사람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그를 변복 시켜 부산까지 데리고 가 일본으로 밀항시켰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 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찾아왔다가 산소까지 찾아가 묘소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일본인이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지 내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못된 자식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무엇보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분이었던 것 같다.
이제 밤이 되었다. 와이탄(外滩)에 서서 동방명주(東方明珠)가 우뚝 솟은 푸동(浦东)을 바라본다. 오색 불빛 머금은 현대판 만리장성이다. 황푸강(黃浦江)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몰려온다. 와이탄은 금새 밤안개에 휩싸인다. 안개 속에서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아버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야속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버지는 이미 아득하게 멀어져 있다. 아버지의 앞모습이 생각나지 않아 답답하다. 아버지가 그립다. 어머니가 생각나면 눈물이 흐르지만 아버지가 그리우니 깊은 곳 어디에선가 속울음이 터진다. 다시 아버지를 만나면 그때 일본 만주 상해는 무슨 일로 가셨느냐고, 그때 그 꿩은 어디에서 난 것이며 내게 무슨 말씀 하고 싶으셨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이 한 마디도 꼭 하고 싶다.
"제가 아버지의 마음을 안 것은 나이 오십이 넘어서였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