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 다시 봄이 오다

벨벳혁명, 그리고 벨벳이혼

by 숲속의 고목나무

프라하(Prague)는 생동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활력이 넘쳐나고 자유의 열기로 가득했다. 그 옛날 이곳은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였다. 135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까를 5세가 프라하를 행정 중심지로 선포하자 보헤미아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는 동안 보헤미아는 늘 종교와 정치의 볼모가 되어 역사의 거친 물결에 출렁여야만 했다. 보헤미안 집시들의 슬픈 눈동자를 떠올려 보라. 이곳이 바로 보헤미안 랩소디의 광기 어린 운율과 가사, 그리고 그 처절한 몸짓의 진원지다. 그러니 지금의 활력이 원래부터 있었던 활력은 아니다. 그 속에는 암울했던 세월을 견뎌낸 자부심이 스며 있다. 그래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어깨는 당당하고 치든 고개는 꼿꼿하며 걸음걸이는 힘차다. 이제 그들은 견고하다. 그래서 이 도시는 다시 생동하고 있다.


'봄'이 원래 그렇듯이 '프라하의 봄'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1968년, 그때까지 체코(정확하게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는 공산 치하였다. 그해 체코의 개혁파 지도자 두브체크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천명하자 프라하에도 봄이 찾아왔다. 예기치 않게 흘러든 자유의 물결에 체코는 환호했고 소련은 놀랐다. 동유럽 전역에 견고하게 쌓아 놓은 공산주의의 담벼락이 무너질까봐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군 20만 명을 앞세워 체코를 침공했다. 두브체크는 소련으로 끌려갔고 그의 지지자들은 숙청됐다. 100여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온 도시를 억압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체코인들이 내쉬던 자유의 숨결 위에 소련제 탱크가 올라타고 흔들어댔다. 밑에 깔린 체코의 자유는 버둥거렸다. 소련이 체코를 강간한 것이다. 그해 '프라하의 봄'은 그렇게 질식했다.

20191114_1415151.jpg '프라하의 봄'을 시대적 배경으로 네 남녀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밀란쿤테는 그때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했다. '시위는 증오감에 도취되어 벌이는 축제'라고. 맞다, 시위는 슬픈 축제다. 그들은 그 축제를 벌이며 저항했다. 아니 저항하기 위해 축제를 벌여야만 했다. 그들은 도로 표지판을 모조리 뽑아냈다. GPS가 없던 시절, 침략자들의 위치와 방위 감각을 무력화함으로써 군사 작전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술집 바텐더에서 신문사의 사진기자로 변신한 테레자도 바츨레프 광장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닥치는대로 강간범들의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성질을 긁었다. 찍다가 잡혀가고 풀려나면 또 찍었다. 그들은 그렇게 탱크에 저항했다. 그러나 소련은 내린 바지춤을 쉽게 올리지 않았다. 끌려갔다가 되돌아온 두브체크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부역자가 생겨나고 배신자도 출몰했다. 지식인들의 망명도 줄 이었다. 테레자와 외과의사인 그녀의 남편 토마시도, 또한 토마시의 애인 화가 사비나도 망명길에 올랐다. 바츨레프 광장에는 촛불 든 시위대와 탱크에 올라탄 소련군이 맞섰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대치했다.

20190923_1750451.jpg 바로 이곳에서 젊은이들이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성 바츨레프 광장은 체코인들이 자유를 수확한 민주화의 텃밭이다.

이렇듯 온 나라가 열망과 두려움, 갈등과 분열, 혼돈과 모순의 기로에 서 있던 1969년 1월 19일, 광장 맨 위에 자리한 국립박물관 앞에서 한 젊은이가 고뇌하고 있었다. 동유럽 특유의 혹독한 겨울 바람이 옷깃을 파고 들었지만 그의 가슴은 뜨거웠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비한 기름을 온 몸에 붓고 불을 당겨 분신했다. 그는 얀 팔라흐(Jan Palach), 당시 까를 대학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공부하던 스물한 살 청년이었다. 훗날 의식이 남아 있던 그와 대화한 의사는, 그가 체코 국민들이 이 상황에 굴복해 침묵하지 않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는 스무 살 청년 얀 자익(Jan Zajic)이 같은 자리에서 자신을 불살랐다.

20191124_1212461.jpg 그들은 얀 팔라흐와 얀 자익이 분신한 자리를 이렇게 보존하고 있었다.
20190923_1751491.jpg 성 바츨레프 동상 바로 앞에 두 의인을 추모뫃하기 위한 비석이 새겨져 있다.

죽음이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소련 침공 이후의 세월은 매장의 시기였다. 사망률이 이렇게 높은 적은 없었다. 그것은 어느 역사가도 기록하지 않은 사실이다'


밀란쿤테가 그 소설에서 한 말이다. 그들은 이토록 죽음이 즐비했던 세월을 견뎌내고 공산주의가 짓밟았던 황량한 땅에 자유의 꽃을 피워냈다. 그때까지 그들은 긴 시간 동안 침묵해야 했다. 침묵했지만, 그러나 침묵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존 레논의 <Imagine>을 들으며 가사 속의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고 죽을 일도 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염원하며 침묵했다. 소련이 아무리 감시하고 통제해도 자유롭게 떠도는 전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은 가슴에 대고 <Imagine>을 불렀다. 그 시절 존 레논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있어도 그의 목소리와 <Imagine>을 모르는 체코인은 아무도 없었다.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이 급사하자 체코인들은 프라하 대수도원장이 살고 있는 담벼락에 낙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추모이자 항거였다. 또한 그것은 의미 없는 글질이 아니라 보헤미안들이 자신의 가슴을 스스로 지지는 인두질이었다. 소련 압제 하에서는 아무리 지워내도 끝내 지워지지 않은 문신이 되었다가, 이제는 전 세계인들의 낙서장이자 포토존이 되어 버린 <존 레논의 벽>은 그렇게 탄생했다.

20190923_1152571.jpg 이제는 전 세계인들의 낙서장이 되어 버린 <존 레논의 벽>

얀 플라흐와 얀 자익이 죽은 지 이십 년이 지난 1989년 11월, 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공산 정권을 붕괴시킨 후 자유를 되찾았다. 이른 바 벨벳 혁명(the Velvet Revolution)이다. 마치 벨벳처럼 부드럽게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인 듯하다. 이렇듯 바츨레프 광장은 체코인들이 자유를 수확한 민주화의 텃밭이다. 나는 그 숭고한 밭이랑에 죽음으로 뿌린 민주화의 씨앗을 추모하고 싶었다. 유장하게 흐르고 있는 블타바 강 위 까를교의 낭만이야, 또한 그곳에서 바라보는 프라하성의 야경이야,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보는 언덕받이에 당당하게 서 있는 성 비투스 성당의 웅장함이야 굳이 더 말할 게 있겠는가.

20191213_1536391.jpg 까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 성의 야경
20190923_1511481.jpg 성 비투스 성당의 웅장한 모습. 프라하는 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입지 않아 유적지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들의 경이로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안다. 같이 살던 사람들이 헤어지는 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그 고통은 갈라지는 두 사람이 서로 진심을 다해 위무해야 할 정도로 깊고 아프며 모순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게, 또한 헤어진다는 게 어디 그런가. 종국적으로는 아픔만 남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왠지 상대 잘못이 더 큰 것 같고, 그래서 내가 더 억울한 것 같은 감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람 둘이 헤어지는 게 이럴진대 하물며 나라와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일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서로 총질하고 대포 쏘는 거야 뻔한 일이고 잘못하면 옆집의 형들 나라까지 쫓아와서 집구석이 난장판 되어 버리는 게 동서고금의 상례다. 그러나 이들은 달랐다. 깔끔하고 명쾌하게 헤어졌다. 말들이야 많지만 두 사람 이불 속에서 벌어진 일들 자세히 알 수 없듯,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왜 헤어졌는지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알아도 득 될 거 없고 모른다고 욕 될 것 없는 남의 나라 이불 속 이야기다. 어쨌든 이들은 벨벳 혁명이 일어난지 삼 년 여 만인 1993년 1월 1일, 서로 악수하고 웃으며 헤어지는 벨벳 이혼을 했다. 전 세계 이혼 남녀들의 모범이 된 셈이다. 이혼 후에도 두 나라는 서로 관세 협력과 산업 교류를 통해 지금은 동유럽의 경제 허브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해낸 것을 우리가 못할 이유는 없다. 우리나라의 잘난 위정자들과 북쪽에서 장군질하고 있는 젊은 친구도 아무 도움 안 되는 눈치싸움질 그만하고 이런 사례나 참고하면 좋겠다.


우리의 삶은 늘상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 이유를,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되었던 이네들의 역사가 말없이 말해주고 있다. 프라하에서처럼, 당신의 삶에도 따뜻한 봄이 다시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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