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슈타트(Hallstatt) 가는 길

사랑, 이것이 없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호사

by 숲속의 고목나무

11시간 비행 끝에 프라하에 도착했다. 처음 타 보는 비즈니스 석 덕분에 편안하게 왔다. 프라하는 견고해 보였다. 빙판을 질주하는 그 나라 스케이팅 선수의 터질 듯한 허벅지처럼. 땅은 단단하고 건물은 육중하며 사람들은 튼실했다. 도착한지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나보다 키 작은 사람은 못 봤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못 볼 것 같다. 프라하의 밤하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푸르기만 했다. 프라하는 과묵한 남자가 턱을 괴고 상념에 잠겨 있는 도시 같다. 체코가 엄마라면 프라하는 틀림없이 진중한 맏아들일 것이다.

20190917_1951071.jpg 프라하의 밤하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푸르기만 했다.

날이 밝아 길을 나섰다. 도심 차도가 비좁아 운전이 힘들었다. 도시는 덩치에 비해 혈관이 좁았다. 프라하를 벗어나니 동화가 펼쳐졌다. 길 양옆으로 서서히 ‘저 푸른 초원’이 나타나고 그 위에 듬성듬성 ‘그림 같은 집’이 서 있었다. 그 안에서 그들은 보나 마나 ‘사랑하는 님과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이 나이 되도록 뾰족하게 18번 없는 나 같은 것들이 가끔씩 흥얼대는 ‘님과 함께’의 가사는 이 나라 풍경을 표절한 게 틀림없다. 그들은 진작부터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그렇게 살고 있었다. 초록으로 물든 구릉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위에는 소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초원 위의 집들도 띄엄띄엄이더니 놀고 있는 소들도 듬성듬성이다. 암만 봐도 소떼가 아니어서 ‘저 푸른 초원’의 공간이 낭비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좁은 땅덩어리에서 빽빽하고 촘촘하게 살아온 이방인의 괜한 오지랖이다. 인구 밀도가 낮으니 소 밀도도 낮을밖에. 잿빛 하늘과 콘크리트 빌딩숲에 갇혀 숨 가쁘게 살아온 이방인에게 풍경은 서정을 넘어 몽환으로 다가왔다. 초원과 맞닿은 맑고 고운 하늘은 그들의 가을 동화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우리 강토만 금수강산이요 우리의 가을만 천고마비라고 하는 것도 속 좁은 듯하다. 이쪽도 만만찮다. 아니 여기는 오히려 사시장철 천고마비일 것 같다.

20190918_0946331.jpg 프라하의 외곽을 벗어나자 동화 같은 목가적 풍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20190918_0940161.jpg 이 나라는 모든 게 자유로워 보였다. 길거리의 삐딱한 도로표지판조차도 편안하고 안온해 보인다.
20190918_0933061.jpg 비록 풍족해 보이지는 않아도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듯한 그네들의 삶을 닮은 듯한 풍경이다.

우리는 프라하에서 E65번 도로를 타고 <벨케포포비체>까지 내려와 거기에서 다시 E55번 고속도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 길로 계속 남하하면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북동부를 거쳐 지중해의 최북단에 도달하리라. 좀 더 우회하여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거친다면 아드리아해 서안에 떨어져 그 옛날 게르만족과 대치하며 살았던 슬라브족의 거친 숨결을 느낄 수 있으리라. 십수 년 전 일본인 여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15년에 걸쳐 저술한 <로마인이야기> 전 권을 단숨에 읽었던 적이 있다. 지금 내가 그 책의 배경이 되는 무대를 누비고 있다는 흥분감에 가슴이 뛰었다.

20190917_1831511.jpg 이번 여행 동안 일행을 태우고 다닌 승합차다. 체코 프라하 공항에서 렌트했다.

눈 뻔히 뜨고도 언제 국경을 넘었는지 몰랐다. 도로 표지판 글꼴이 달라졌음을 알고 나서야 체코를 넘어 오스트리아에 진입했음을 눈치챘다. 그들의 국경은 흉측한 철조망이나 버거운 장벽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점선이었다. 서로 총부리 겨누다가 한 뼘이라도 월선하면 가차없이 총질해대는 곳에 살던 이방인의 의식이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 점선으로 그어진 국경이야말로 관대함과 조화로움과 여유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것이 바로 EU연합이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근본이 아니겠는가.


체코의 풍광이 순수한 동화라면 오스트리아의 그것은 섬세한 수채화였다. <할슈타트>로 가는 길의 하늘은 파랗다 못해 시퍼랬다. 햇빛이 조금만 더 앙탈부리면 깨질 듯했다. 저렇게 맑고 투명한 하늘을 본 적 없다. <프라이슈타트>를 지나 <린즈>에 이르자 독일에서 발원된 도나우강의 잔잔한 은빛 물결이 햇빛 머금은 채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차창 밖 풍경에 넋 잃은 이방인의 마음속에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왈츠>의 음률이 서투르게 흘렀다. 이 물길은 끊임없이 남동쪽으로 흘러 저편 동양에서 흘러온 강물과 만나 흑해를 이룰 것이다.


E60번 고속도를 달리다가 152번 국도로 접어들자 갑자기 신천지가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3대 호수 중 하나인 아터호(Attersee)였다. 차를 세워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깨질 듯한 코발트색 하늘빛이 그대로 호수로 내려앉았다. 그래서 하늘과 호수의 빛깔은 동색이었다. 훤히 보이는 호수 바닥의 색깔도 그러했다. 사방 천지가 코발트로 물들어 있는 눈앞 풍경이 꿈결 같은 가을의 전설로 다가왔다. 넋 잃고 쳐다보는 이방인의 눈빛도 여지없이 코발트로 물들었으리라. 강변에는 다이빙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연신 풍덩거리고 호수 위에는 이름이 <Seascape>인 요트 한 척이 자신의 이름처럼 바다 풍경이 되어 떠 있었다. 그 뒤로는 알프스의 고봉 샤프베르크(SCHAFBERG)가 무심하게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떠나간 옛사랑의 행복을 빌어주는 속 깊은 남자처럼. 이 맑고 깨끗한 호수의 물도 한 때는 저 높디높은 알프스에서 함께 머물다 이별했을 것이니.

20190918_1349591.jpg 아터호에 떠 있는 요트 한 척, 뒤로는 알프스 산이 말없이 호수를 내려보고 있었다.
20190918_1447121.jpg 호수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알프스를 등진 목가적 풍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아터호 옆으로 난 좁고 긴 산비탈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달리다 좌측으로 꺾자 짙푸른 삼림지대를 가르는 153번 도로가 나타났다. 초점 맑잖은 이방인의 눈을 또 한 번 시리게 했다. 이 나라는 전 국토가 오직 두 가지의 색깔로만 채색된 국가임이 분명하다. 코발트와 초록으로 말이다. 드디어 145번 국도와 만나 목적지를 향했다. 그 길을 따라 알프스에 막혀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할슈타트에 이르렀다.


할슈타트(Hallstatt)!


펼쳐진 눈앞의 광경에 눈을 의심했다. 세계 최초의 ‘소금광산’이었다는 산업적 지형 특성은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소금 캐던 광부가 천사들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북적대는 사람들만 없다면 할슈타트는 천사들이 살고 있는 천상의 마을인 듯했다.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 할슈타트호는, 어쩌면 딸이 납치 당한 것을 슬퍼한 부모의 눈물이 모여진 백조의 호수일지도 모른다. 호수 건너편의 하얀 집에는 악마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린 오데트 공주가 외로이 살고 있을 것 같다. 지금 호수에서 노닐고 있는 저 거위는, 낮이면 백조로 살아가며 지그프리트 왕자의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맹세를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녀일지도 모른다.

20191013_1356551.jpg 할슈타트 호의 아름다운 풍경. 저 건너편 하얀색 집에는 오데트 공주가 살고 있을 것 같다.
20191013_1406001.jpg 어쩌면 한가로이 노닐고 있는 저 거위는 마법에 걸린 오데트 공주일지도 모른다.

산 아래쪽에 자리 잡은 집들은 알프스와 어우러져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바람 없는 맑은 날이면 호수 표면에 마을 전체의 모습이 담겨진 멋진 데칼코마니를 그려낼 것이다. 집집마다 창문에는 어김없이 붉은 장미더미가 걸려 있고 정원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정연하게 피어 있었다. 우리는 레스토랑에 들러 식사를 한 후 마을을 산책하며 풍경에 취했다. 그리고 나서 보트에 몸을 실어 이국의 낯선 정취를 만끽했다. 우리는 그래야만 했다. 마실 다니듯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곳이니. 여기가 바로,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웅장한 알프스를 등지고 날마다 맑은 호수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아름다운 작은 마을, 할슈타트다!

20191013_1430361.jpg 할슈타트 호에 그림 같은 집들이 줄지어 있다.


20190918_1634341.jpg 알프스의 시린 물이 마을을 가로질러 호수로 흘러내리고 있다.
20190918_1701321.jpg 호수 옆 카페에서 여행객들이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90918_1604471.jpg 알프스 아래쪽에 자리 잡은 집들은 동화 속의 그림처럼 보인다.
20190918_1631071.jpg 집집마다, 그리고 창문마다 아름다운 꽃더미들이 장식되어 있다.

독일에 살고 있는 사위와 딸이 운전하고 안내하느라 수고했다. 고마웠다. 사랑, 이것이 없었다면 누리지 못할 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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