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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Jul 14. 2022

하나님과 하느님, 그리고 이단

다시 사랑을 꿈꾸는 이들은,

 일요일 아침이면 우리 부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교회로 향한다. 아내와 함께 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그럭저럭 2년이 다 되어간다. 교회는 도심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맥의 뒷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내가 처음 그곳에 발을 내디뎠을 때는 가을낙엽이 거의 다 떨어져가는 늦가을이었다. 그때는 난생 처음 교회의 문턱을 넘어선 어색함 때문에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인지 자각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교회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그때의 어색함을 떨치고 매주 아내를 따라 편안하게 교회를 드나든다. 물론 아름다운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제가 교회를 다녀도 괜찮은가요?”


 몇 년 전 아내와 만나고 있을 때,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그 물음이 의아했다. 질문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사실은 ‘허락’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나는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교회가 그녀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지는 못했다.


 “본인이 행복하다면 다녀야지요.”


 상대방의 종교 생활에 대해 ‘된다’ ‘안 된다’라고 말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는 그때의 내 대답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그 전에 소개를 받아 만났던 남자들 대부분은 ‘그건 당신 자유지만 나한테까지 강요하지는 말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말한 ‘본인이 행복하다면 다녀야지요’는 그들이 말한 ‘그건 당신 자유지만’과 같은 뜻이다. 둘 다 교회에 다녀도 좋다는 말이다. 다만 똑같은 물건을 그들은 한 손으로 불쑥 내밀었고 나는 예쁜 포장지로 싸서 공손하게 건넨 것 정도의,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또한 그들은 ‘나한테까지 강요하지는 말라’며 자신은 교회에 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지만 나도 그때 ‘같이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또한 둘의 뜻은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은 미리 나발을 불었고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내를 따라 교회에 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뒤이어 나온 그녀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이단이라고 해요.”


 순간 나는 언젠가 방송에서 봤던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얼굴이 모자이크된 교주와 그를 추앙하는 신도들의 광적인 모습이 맥락 없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 나는 허공을 향해서는 열광적으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도 정작 사회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세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송 관계자들은 그들을 이단 교회의 전형이라고 했다. 신앙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들의 진짜 목적은 ‘돈벌이’고 그 정점에 교주가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때까지 ‘이단’이라는 말은 내게 그런 의미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이 여자의 입에서 자신의 교회가 이단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나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더욱이 내가 ‘본인이 행복하다면 다녀야지요’라고 우아하게 말한 직후여서 그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내 속도 모르고 이 여자는 한 술 더 떠서 내게 다정하게 말했다.


 “나중에 우리 목사님께 인사하러 같이 가면 좋겠어요.”


 얼굴이 모자이크 된 그 교주를 만나러 가자는 말이었다. 방송에서도 신도들은 ‘교주님’이 아니라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이 여자가 ‘나한테까지 강요하지는 말라’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이단을 먼저 말한 다음에 허락을 구했고, 내게는 허락을 받은 다음 이단을 자백하는 기술을 구사했나 싶기도 했다. ‘이단’을 먼저 들었으니 그들이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표시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다음부터 나는 태연한 척 만났지만 여자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말하자면 마음의 카메라로 몰카를 찍은 셈이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이단의 기색이나 잔재는 은연중에 나타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그런 단서는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언행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늘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아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생각은 합리적이고 인간적이었으며 행동에는 늘 진중함과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렇다고 자칫 한순간에 인생 조질 수 있는 중차대한 일을 쉽게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화할 때마다 묻어나는 목사님에 대한 존경심의 이유에 대해 물었다. 교주한테 미쳐버린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탐색하는데 좋은 질문이었다.


 “목사님과 교회가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겁니다. 30대 초반에 어린 딸 하나 데리고 살기 위해 새벽에 건물 청소하러 다니는 일이, 힘든 건 고사하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그런데 목사님께서 ‘밥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은 다 똑같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셔서 그때부터 가슴 펴고 살 수 있었어요.”


 사실 그분의 말씀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듣기에 따라서 진부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청자聽者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화자話者의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신도들에게 ‘삥’ 뜯는 게 목적인 교주가 온갖 감언이설로 혀를 굴려도 그런 인격까지 제조해낼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때 아내에게는 ‘삥’이 없었으니 교주가 헛다리짚지 않은 이상 애써 그런 재주를 피울 필요도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목사님의 인격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겨울햇살이 내리쬐는 볕 좋은 날에 목사님 댁을 찾았다. 오기 전까지 아내는 내게 목사님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줬다. 목사님의 자서전, <주의 손에 이끌려>를 추천하기도 했다. 아내는 목사님을 삶의 큰 은인으로, 또한 큰 어른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서로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내는 그저 그분의 말씀에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80을 훌쩍 넘기신 목사님은 마치 강가에 홀로 서서 조용히 세상을 바라다보고 있는 학처럼 고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화를 한 후에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소탈하고 솔직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는 많이 써봤지만 당신은 방언도 할 줄 모르고 치유의 은사 같은 것도 없었다며 젊은 시절 섬에서 나와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자서전을 읽은 터여서 이미 알고 내용이었다. 아마 당신이 주의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듯이 너희들도 하늘의 뜻으로 맺어졌음을 알고 서로가 잘 연합하여라,는 뜻인 듯했다. 어느덧 내 마음속에서 돌아가던 탐색의 렌즈가 꺼지고 아내의 힘겨웠던 지난 삶을 보듬어주신 데 대한 감사가 흘렀다.


 목사님은 교주가 아니고 아내는 광신도가 아닌 게 확실했다. 그런데도 누가, 왜 교회를 향해 ‘이단’이라고 하는지 궁금했다. 교회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이를 망설이게 하는 작은 앙금이 있었다. 사실 나는 30대 때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었다. 열렬한 신자도 아니었고 더욱이 지금은 냉담 중이지만 그래도 내 종교적 뿌리는 천주교라는 마음의 짐이 있었다. 힘들었을 때 신부님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회에 발을 내딛는 것은 왠지 성모마리아를 배신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나는 ‘하나님’이라는 개신교의 호칭에 대해 막연한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인들 역시 ‘하느님’이라는 천주교식 호칭에 반감을 가졌을 것 같다. 각각의 논리와 설명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런 저간의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이것 하나조차 통일하지 못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분열적 고집이 낳은 산물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아내 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내 의식이 머물고 있던 ‘하느님’의 강을 건너 ‘하나님’의 땅에 도달해야 한다. 나는 그 강을 헤엄쳐 건너기로 했다.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편안했다. 자신과 함께 하게 된 사람이라는 아내의 소개에 많은 이들이 축하와 환영의 말을 전했다. 연로하신 목사님을 대신해 말씀을 전하는 또 한 분의 목사님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예배는 목사님의 말씀 후 그 내용을 주제로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간증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나는 줄곧 신경을 곤두세워 귀 기울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이단의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목사님의 말씀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온기가 흘렀고, 교회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의 간증에는 교회에 대한 애정과 목사님을 향한 존경심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후에도 내 발걸음은 계속되었지만 예배의 패턴과 내용은 변함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언뜻 봐도 장애인인 듯 보이는 교우들의 행동과 교회의 반응이었다. 목사님의 말씀 도중 연단 앞에서 서성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씀을 빨리 끝내라는 뜻으로 피아노 건반을 살짝 두드리며 무언의 시위를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목사님은 태연하게 말씀을 이어갔고 다른 교우들은 미소만 지을 뿐 그들에 대해 어떤 특별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소외받기 쉬운 그들이 교회에 와서라도 하고 싶은 것은 맘껏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사님의 생각이 반영된 듯한 풍경이었다.


 얼마지 않아 세상은 코로나19 여파에 휩싸여 꽁꽁 얼어붙었다. 교회는 집단 감염의 온상지로 지목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정부의 방역 지침을 철저하게 준수하는가 하면 감염이 확산되자 스스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는 모범을 보였다. 교회에는 어떤 조직도, 어떤 직책이나 직함도 없었다. 사회적 지위도, 빈부의 격차도 이곳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모두가 똑같은 형제자매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루저'들만 모여 있는 곳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특별한 전도 활동도 없고 예배 시간에 헌금을 모금하는 행위도 없었다. 또한 모든 봉사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역시 무엇이든 강요하면 잡음이 생기고 자발적일 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목사님의 철학이 구현된 듯했다. 그러나 교회가 혼란스럽기는커녕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아내를 통해 교회에는 지난날 중범죄를 저질렀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가 편안해져갔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집단 지성’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나는 이 교회야말로 ‘집단 이성’이나 ‘집단 사랑’의 표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아내의 사랑이 출발하는 곳, 즉 나에 대한 아내의 사랑이 샘솟는 발원지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단의 이유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렴풋하게나마 그 이유를 알기도 하지만 자세히 안들 그게 정답일 리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교회를 놓고 하는 이단 논쟁은 마치 ‘하느님’과 ‘하나님’의 호칭 난맥처럼 은근히 상대를 비난하거나 서로를 구분하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이단이라는 말은 특정 교단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그래서 그들이 제시한 조직도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씀의 방향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함부로 써서는 안 될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교회는 ‘사랑’이라는 공통분모의 대지 위에 서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다를 리 없다. 내가 아내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교회에 오는 게 귀찮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교회에 잘 빠지지 않는 이유는 우선 그렇게 하면 아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내의 힘겨웠던 삶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교회에 대한 감사의 의미도 있다. 무엇보다 내게 보인 아내의 삶 자체가 강력한 전도 활동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내가 내게 주는 사랑의 원천이 바로 이 교회이고 내가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당사자라면 망설일 일이 아닌 것이다. 아내는 지금까지 내게 단 한 번도 교회에 같이 갈 것을 강권한 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승선했던 사랑의 배가 난파된 아픔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재혼 부부다. 사랑을 아무 생각 없이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그리고 이단의 이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그 탐색의 여정 끝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사랑’이었다. 다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은 지쳐버린 내 영혼의 쉼터나 나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의탁처를 미리 꿈꿔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먼저 삶에 짓눌려 있는 이의 쉼터가 되고 그의 상처를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안식처가 될 때 찾아오는 선물이다. 아내에게 ‘그건 자유지만 나한테까지 강요하지는 말라’고 했던 사람들이 조금만 더 말을 사근사근하게 했더라면 나보다 먼저 그 선물을 받는 행운을 누렸을지 모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게는 정말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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