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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Nov 24. 2022

영웅 안중근安重根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김훈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간결하지만 묵직한 그의 필치에서 전해지는 울림 때문이다. 그가 올여름에 내놓은 신작 <하얼빈>을 읽었다. 110여 년 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주된 소재로 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먼발치에서만 봐왔던 안중근을 이 글을 통해 더 가까이 다가서서 볼 수 있었다. 그는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브라우닝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고도 그는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그는 실물로 존재하는 자신의 생명보다 무형으로 존재하는 조국의 안위를 더 중시했다. 그의 담대한 애국심과, 거사 후 재판 과정에서 보인 당당함과 높은 기개, 그런 상황 속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그의 선구적인 사상을 기린다.


 아즈마吾妻호와 대통령 특별전용기


 1909년 1월 7일 아침 8시 10분 순종 황제를 실은 열차는 서울역에서 출발했다. 6박 7일간 남순南巡 일정의 시작이었다. 이 모든 일정을 기획한 이토 히로부미도 동행했다. 열차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일본 천황 메이지明治는 제2함대의 기함 아즈마吾妻호를 부산항으로 보내고 순종에게 전보를 쳤다.


 '순행하시며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시는 귀 황제 폐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짐의 함대를 부산항으로 보냈으니 배를 순시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일본 제국의 문명화된 우호 정책을 전 세계에 알리고 조선에게는 일본 함대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전략이었다. 황제가 기함에 오르려고 하자 부두의 공터에 모인 흰옷 입은 수천 명의 백성이 부복해 머리를 조아리고 외쳤다.


 "폐하, 일본 배에 오르지 마소서."

 "저들이 폐하를 일본으로 모셔갈까 두렵습니다."

 "폐하, 날씨가 춥사옵니다. 속히 대궐로 돌아가소서"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2022년 11월 11일 동남아 순방을 위해 대통령을 실은 특별전용기가 남쪽을 향해 이륙했다. 그 비행기를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그들은 흰옷이 아니라 검은옷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면 대통령이 탄 저 비행기가 추락할 수 있으니 온 국민이 그것을 염원하는 뜻을 모으자고 했다. 그들은 각각 성공회와 천주교의 신부 직함을 가진 사제들이었다. 남들 앞에 서기는커녕 흰옷 입었던 무지렁이 백성들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다. 나라의 국권을 뺏긴 불행도 그 시작은 분열이었다.


  그에게는 오직 조국과 민족만이 있었을 뿐이다.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청했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그랬던 그가 '살인하지 말라'는 가톨릭의 계명까지 어겨가며 이토를 저격했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자신의 생명이나 계율보다 더 상위의 가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가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라고 했겠는가. 지금의 한반도 정세가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음하던 구한말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식자들의 우려가 간혹 들린다. 이 불안의 시대를 맞아 우리의 위정자들도 겉으로는 안중근 의사의 마음과 똑같아 보인다. 입만 열면 국가와 국민을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편을 갈라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을 위해 말폭탄을 쏟아내며 오히려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 그들이 나라를 위한답시고 뿜어내는 소음 때문에 정작 온 나라가 시끄럽다. 찢어지고 갈라진 작금의 이 나라를 그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는가? 내게는 진보도 보수도, 좌도 우도 없다. 오직 조국과 민족만 있을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라는 자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는 1906년에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기 위해 서울에 설치한 불법 관청이다. 그 관청의 장을 한국통감韓國統監이라 불렀고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한국통감이었다. 그는 한국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정책을 입안하고 그것의 실행을 진두지휘한 두목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 내각의 헌법 기초를 마련해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내기도 한 근대 일본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토의 침실 발치에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항에 건설되었던 파로스 등대의 모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또한 통감부 집무실 책상 위에는 인천 월미도 등대의 축소 모형을 세워놓았다. 그의 눈은 조선을 징검다리 삼아 대륙을 뛰어넘고 종래에는 그 너머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토가 개인 여행이라고 위장막을 쳤지만 하얼빈을 방문한 진짜 목적도 동양을 효과적으로 경영할 구도를 짜기 위함이었다. 그 일환으로 만주철도 시찰과 러시아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의 회담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일본은 이미 청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둬 청나라를 한국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다 러일전쟁에서까지 이긴 일본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하게 확보했다. 이토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안중근의 젊은 시절重根安重根安重根


 그의 아명은 응칠應七이었다. 태어날 때 배에 점이 일곱 개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어렸을 때부터 밖으로 나도는 기질을 누르기 위해 그의 부친 안태훈安泰勳은 무거울 중重과 뿌리 근根을 써서 개명했다. 그러나 바꾼 이름도 타고난 기질을 누르지는 못했다. 그는 1904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산둥을 거쳐 상하이로 떠났다가 이듬해 12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돈을 가진 자는 더러 있어도 뜻을 가진 한국인을 만날 수 없어서였다. 1906년에는 고향에 삼흥학교를 세우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해 아이들에게 직접 영어 지리 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항일 투쟁을 하기 위해 1907년 8월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그는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고 큰아들 분도는 세 살, 둘째 아들 준생은 태아였다. 자식이지만 장남은 거의 본 적 없고 차남은 아예 본 적 없다. 만약 그 당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설령 그랬더라도 그의 심중에 애국심이 없었다면 그 역시 여느 남자들처럼 자식들의 볼을 부비며 안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는 황해도 해주의 신천에서 이름난 부잣집의 장남이었다. 그는 진사였던 아버지에게는 한학을 배우고 무관이었던 조부의 피를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명포수였다. 또한 프랑스 신부 빌렘에게는 외국어와 신학문을 배웠고 국채보상운동의 관서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떡잎부터 달랐던 그의 젊은 시절이었다.


 무장 항일투쟁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고향을 떠난 안중근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원산을 거쳐 연해주에 도착해 의병대에 참여한다. 1908년의 일이었다. 그는 참모중장의 계급과 우영장의 직책으로 두만강 일대의 홍의동 신아산 영산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마지막 회령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에 부대가 궤멸되는 패배를 당한다. 국제법에 따라 사로잡은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 게 화근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그는 처절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뜻을 꺾지 않았다. 1909년 2월 7일 러시아령 크라스키노에서 12명의 동지들과 독립투쟁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다. 그 자리에서 안중근을 필두로 전원이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그 피로 태극기의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는 글자의 혈서를 썼다. 이른바 단지동맹斷指同盟이었다. 그날 밤 안중근은 동료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와 친일파를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저격과 체포, 재판과 순국


 안중근은 1907년 8월 부산에서 동해 바다를 거슬러올라 북쪽으로 갔다. 1909년 10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역시 시모노세키항에서 서해 바다를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가 탄 기선 데스레이마루鐵嶺丸는 중국 대련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약 2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한반도의 동쪽과 서쪽 바다에 몸을 실었던 두 사람은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하얼빈역에서 만났다. 한 사람은 대륙과 그 너머를 지배하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뱃길과 철길을 달려왔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꿈을 깨부수기 위해 반대편으로 먼길을 돌아왔다. 그때 이토의 가슴은 꿈에 부풀어 있었고 안중근의 가슴에는 한恨이 서려 있었다. 그날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안중근의 손가락이 아니라 바로 그의 가슴으로 응집된 우리 민족의 한이었다.


 "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라는 뜻이라고 한다. 안중근이 세 발의 총탄으로 이토를 저격한 후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되면서 외친 말이다. 안중근은 그때까지 이토의 얼굴을 확실히 몰랐다. 그래서 그를 쏘고도 호위하던 옆의 세 명에게 각 한 발씩의 총탄을 더 발사했다. 그리고 의연하게 체포되었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의 관할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그들은 안중근을 일본으로 넘겨버린다. 일본의 관동도독부가 있던 대련의 여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은 1910년 2월 7일부터 10일까지 네 번의 공판을 마쳤다. 안 의사는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5개의 이유를 당당하게 말했다. 이후 12일에는 일본인 국선변호인이 변론했고 14일에 재판장 마나베가 사형선고를 내렸다. 수감되자마자 <안응칠의 역사>를 썼던 안중근은 사형선고일로부터 3일 후인 2월 17일부터는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항소를 해야 하지만 그는 그런 이유로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1910년 2월 17일 안 의사와 면담한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는 비교적 긴 시간 동안 동양평화에 대한 관점과 일본 정부에 권고하는 말을 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미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을 결심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항소하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


 안중근은 결국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해 3월 26일 감옥에서 순국했다. 이토는 안중근으로부터 저격당한 그날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


 여순 감옥에서 5개월 동안 생긴 일


 일본 혼슈 북부 지역의 미야기현宮城縣에 다이린지사大林寺라는 절이 있다. 그곳에는 두 개의 영정이 따로 모셔져 있다. 그중 하나는 안중근 의사이며 다른 하나는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다. 지바는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그를 전담했던 일본 헌병 간수였다. 안 의사는 사형 당일 아침 지바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글을 써서 주고 홀연히 사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지바는 이 유묵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고 안 의사 탄신 100주년이 되던 해에 그의 후손들이 한국으로 반환했다. 그 글은 안 의사를 깊이 존경했던 지바 도시치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다. 지바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1934년 사망할 때까지 매년 그의 순국일에 이 절에서 그의 넋을 위로했고, 이제는 다이린지사에서 영정이나마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하고 있다. 지바 이외에도 안 의사는 숱한 일본인 간수들에게 글을 써서 주었다. 그의 의로움과 훌륭한 인품과 당당함은 여기에서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모든 일화는 그가 수감되어 있었던 단 5개월 동안 벌어졌던 일이다.


 유언


 사형 집행일을 며칠 앞두고 동생 정근定根 공근恭根과 빌렘 신부의 면회가 허락되었다. 그들은 황해도 해주에서 먼길을 왔다. 이 자리에서 안중근은 동생들에게,


  "내가 죽으면 하얼빈에 시신을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뼈를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해 그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또한 순국 직전에는 동포들에게 고하는 유언을 남겼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죽기 전 안중근이 감사해한 일


 안 의사는 면회 온 두 동생을 먼저 돌려보내고 빌렘 신부와 마주해 하느님께 감사한 일을 말씀드려도 되겠느냐고 했다. 이에 빌렘 신부가 허락하자 안 의사가 말했다.


 "저는 작년 10월 19일 포시예트항에서 기선을 타고 우라지(블라디보스톡)로 갔습니다. 배가 떠나기 직전 항구에 도착해서 겨우 배를 탔습니다. 그 배는 두 주일에 한 번씩 운행합니다. 그때 배를 놓쳤으면 이번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감사합니다."


 "저는 10월 26일에 이토를 쏘았는데 저의 처자식이 27일에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저의 처자식이 미리 도착해서 저를 만났다면 저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을 것입니다. 저는 이 하루 차이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토를 쏘아서 쓰러트린 후에 총알이 정확히 들어간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 옆에 있는 세 명을 쏘았습니다. 세 명 모두 총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에 다들 회복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도, 보호, 감독에 조처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1905년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당시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 아래 전쟁 당사국인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 강화조약 내용 중 일부다. 루스벨트는 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화가 나지 않는가?


 지금 우리의 위정자들은 겨우 110여 년 전 이 꼴을 당한 나라의 치욕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니 알고나 있는가? 또한 안 의사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이토를 저격할 때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곱씹어 본 적 있는가? 아니 그의 애국심을 단 한 번이라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국록으로 밥 먹고 사는 당신들은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 의사는 국록은커녕 하얼빈으로 갈 차비가 없어 이석산에게 100루블을 뺏어 시베리아 벌판을 달려갔다. 눈만 뜨면 서로 치고 박는 쌈박질, 이제는 제발 그만들 두시라. 안 의사는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치는 것이 국민 된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일제 때는 이완용 일당이 도장을 찍어서 나라를 팔아먹더니 이제는 우리가 뽑았던 대통령이 북쪽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비아냥까지 듣는 지경이 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다. 안중근이 이 꼴 보려고 자기 목숨 바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은 김훈 작가의 작품 '하얼빈'의 내용과 줄거리를 모티브로 삼고 '안중근 기념관'의 기록과 '안중근 공원'의 비석에 새겨진 글귀, 그리고 국방 TV 다큐멘터리 외에도 신뢰할 만한 인터넷 자료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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