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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키 Jul 06. 2024

N잡러의 현재 일터, 엘리 앤틱은,  44년 전

엘리 레코드가 뿌리다.

엘리는 모험심과 실험정신, 낭만을 가득 품었던  번째 가게 이름이다. 물론, 경제 수단으로의 기능도 제대로 발휘했었다. 1980년, 대학 졸업반 때, 전두환 군사 정권은 대학생들의 과외를 금지시켰다.


학비와 생활비 모두를 과외생 지도로 충당했던 나는 그래서 모교 정문 바로 아래 레코드 가게를 열었다. 음악을 사고파는 거니까  상대해야 되는 사람들 수준도 괜찮을 것 같았고 내 이미지에도 큰 무리가 없을 듯싶었다. 무엇보다도 음악과 함께 간을 보낸다는 게 좋았고 레코드  가게 사장님이라는 타이틀이 나름 멋지게 들리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대학생이 사업하는 일이 참 드물어서 무엇을 어떻게 파느냐에 신경을 많이 썼다.


1년 후,  가게를 학교 정문 바로 위, 좀 더 넓은 공간으로 옮긴 나는, 레코드에 앤틱과 패션도 접목시켰었고 카페도 함께 운영했었다. 친하게 지내던 가수들과  투어 콘서트 같은 실험적 이벤트들도 벌려가며... 1988년 5월까지  그렇게 엘리를 꾸려 나갔다.


그때 나는 엘리언니라는 애칭으로 불렸었다.  내 후배들뿐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불문, 엘리 레코드를 드나들던, 가수, 배우, 아나운서, 작가, 화가 등 유명인들 포함한 모든 이들이, 나를 그렇게 불렀다. 


돌이켜보니, 내 20대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무척이나 다채로운 경험으로 꽉 채워져 있었던 거 같다. 진짜 재밌고 흥미로운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들도 제법 있었을 텐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잠깐 스치는 부정적 기억은 이미 빛이 바래 오히려 아스라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특히,  황병기 교수님과의 추억은  너무 소중해서 지금도 어쩌다 떠올리면 따뜻한 기운이 돈다. 교수님의 첫 번 째 방문은 교수님의 음반 매출 확인차였다. 곧, 나와 엘리 단골들과 함께 커피 마시며 음악과 삶을 아주 담백하게 풀어 주셨던 교수님은 엘리 사람들에게는 친근하고 멋지신, 그 시절의  셀럽이셨다. 신촌역 굴다리께 즐비했던 식당을 돌아가며 맛난 고기를 사 주시던 교수님은 무언의 응원으로 내게 건강한 자존감과 자신감을 지키게 해 주셨다. 정말 분 좋았던 건, 창작 행위와, 이벤트와 연애, 결혼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엘리 레코드 공간을 교수님께서 '살롱 엘리'라 칭하셨던 거다.




아무튼, 엘리 레코드 시작 동기 중의 하나가 계속 공부하고 싶어서였는데, 대학 졸업 직전, 난 그 계획을 바꿨다. 의료보험제도가 생기기 전인 1981년도, 많이 아프신 엄마의 입원 치료를 위해 연세대학교 부설 원주기독병원 특수학교 교사가 되었다. 계속 공부한다 해도 실제 교육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던 지도 교수님의 지적도 한 몫했다.


막 법대에 입학한 남동생과 후배 아르바이트생들의 도움을 받으며, 1년 간 서울과 원주를 오가며 교사와 레코드 가게 주인 생활을 병행했다. 사명과 낭만을 섞어가며, 의미와 재미로 두 역할을 해내고 다시 엘리 레코드로 복귀했다. 그 사이 엄마는 병원 직원 가족의  혜택을 받고 또 내가  새롭게 사귄, 병원 영양사와 간호사 또래 친구들의 특별한 돌봄으로 모든 병이 완치되셨고 아주 건강해지셨다.


그런데, 원주기독병원 부설 특수학교는 내게 또 하나 운명적 사건준비놓았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폴 무니 예비 신부님을 만나게 된 거다. 예배 집전 훈련 외에 한국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뭔가를 찾던 그는 지학순 주교님의 해외 커뮤니케이션담당하기로 했고 그래서 원주에 왔었다. 그리고는 그해 막 시작한 특수학교 소식을 듣고 우리 학교를 방문한 거였다.

 

알퐁스 도데의 ""이나 황순원의 "소나기" 속 소년 소녀 같은 우리 감정은 아일랜드와 한국을 사이에 두고 7년 동안의 망설임과 고민 속에서 만남과 이별을 반복케 했다. 만난 지 2년 후에 사제 서품을 받았던 폴이 결국  5년 만에 사제직을 포기하겠다며 내게 청혼을 했다. 막상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니 겁이 더럭 났지만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서니 오히려 내 선택이 옳다는 걸 강렬하게 입증하고 싶어 졌다. 다행히 폴과 유머 코드가 맞았던 엄마는 찬성을 하셨기에 결단을 내렸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인가 보다 하고. 1987년 1월과 12월에 각각 아일랜드와 한국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88년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 엘리 레코드 가게를 동생에게 넘겼다. 그리고는 남편 따라 부산에 갔고, 그곳에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1990년  부산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과정을 밟으며 학문하는 긴 여정에 들어섰던 거다.


1994년 벨기에로 이주해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2018년까지, 벨기에와 아일랜드, 영국, 미국, 한국을 오가며 심리치료 관련 학위훈련을 받느라, 일을 하느라, 참 많이 분주하게 살았다.


2019년 1월, 인생 큰 위기에 부딪쳤을 때,  내 속에 숨어 있는 비즈니스 역량을 다시 일깨우기로 했다. 막연했던 꿈, 앤틱 딜러의 삶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마음 한편에서 늘 바라만 보았던 앤틱 세계! 드디어 그 세계에 텀벙 뛰어들었던 거다. 


계기는 간단했다. 끝과 시작의 변주곡이었다.


2016년 동생 선거를 돕기 위해 한국에  잠깐 왔던 나는 얼결에, 서울에 이어 제주도까지, 두 곳에 심리상담 교육센터를 차렸었다. 초반에는 신나게 잘 나가긴 했다. 그러나 곧 높은 임대료의 압박감과  일주일에 비행기를 두세 번 타고 서울과 제주도를 오르락내리락하던 벅찬 일정은 결국 내게 번아웃을 갖다 줬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빚만 잔뜩 지고 한국을 떠나기로 했었다. 결국 망하는 걸 택했던 거였다.


아이로니컬 하게도, 양 쪽 센터의  정리 과정에서 나의 길이 정해진 거였다. 센터를 고풍스럽게 꾸며줬던 앤틱 가구들과 인테리어 장식으로 썼던 앤틱 소품들을 비싸게 가져가려는 당근마켓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내게 방향을 가리켰다고나 할까. 아무튼 사람들에게 지쳐있던 나는 물건으로 관심을 돌렸고 다시 대학 졸업반 때처럼 장사를 해보기로 했던 거다. 그렇게 내 앤틱 셀러의 삶이 시작됐다.


그다음의 우여곡절로 난 정말 참 많은 걸 배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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