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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Jul 24. 2023

부지런한 게으름

나의 봄을 오롯이 바친 전직 시험을 끝내고 일상의 즐거움을 찾아야겠다 하던  찰나에 몸에 이상한 증상들이 등장했다. 턱 주변이 가려워 종종 긁어야 했고 눈은 건조하다 못해 눈두덩이 위로 하얀 각질 같은 게 생겨났다. 턱과 얼굴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가려움이 목까지 번지더니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의식하지 못한 채 얼굴을 긁고 있는 내 모습이 산스럽고 바보스러웠다. 몸이 건조해서 그런가 싶어 물도 하마처럼 먹어보고 운동도 해보았지만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친구는 그런 나를 보며 성인 아토피 같고 했다.


가려움뿐만이 아니었다. 학기말이라 여러 가지 행사와 결과 수합 안내 등으로 업무망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거의 매일 메시지에 오타가 있었다. 평소에 하지 않는 실수들이라 어느 날부터인가 신경이 쓰였다. 르게 타이핑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있음 직한 오타가 아니라 낱말이 아예 다르게 입력되는 경우까지 생기니 창피했다. 퓨터 화면을 확대해서 여러 차례 확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가 나기도 했다. 눈의 노화인가 아니면 정신의 노화인가 나이 탓을 하며 나를 또 바짝 긴장시킨 채 한 학기를 마무리했다.


비단 가려움과 실수뿐만 아니고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기분 좋자고 만난 친구와 술 한잔 하면서도 금세 취기가 올라 말실수를 하고, 기억을 하지 못해 다음날 사과를 해야 했다. 왜 그랬던 거냐고 묻는 친구 앞에서 답을 할 수 없는 내가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가방에서 나온 술집 영수증에 '많이도 마셨네' 자조 섞인 웃음만 나왔다. 적극적으로  뭔가 이유를 찾고 싶었다. 왜 이런 것인지.


우연히 나 같은 증상들이 번아웃으로 인한 증상들일 수 있다는 글을 읽었다. 번아웃 해결방법은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하면 된다고 했다. 그날부터 조금씩 하루를 달리 쓰기 시작했다. 챙겨 먹지 못하던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모닝커피 한잔의 카페인으로 퉁치던 나의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었다. 몸속 허기가 채워지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아침을 챙겨 먹는 것과 함께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운동앱을 켜고 달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달리기에 숨이 턱 막혀오지만 어느 순간 역치를 채우고 나면 송골송골 맺히는 땀에 기분이 좋아졌다. 달리기를 마치면 하루치의 독소가 몸에서 빠져나가 해독되는 기분이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잠이었다. 11시 전에는 무조건 자려고 노력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고 잡다한 생각을 듬뿍 지니고 사는 뇌를 지닌 나여서 곤히 자는 것이 쉽지 않았다. < 최고의 수면법>이라는 책까지 읽어가며 잘 자보려고 노력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던 가려움과 실수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많은 부분들이 사라졌다. 피부는 가렵기는커녕 촉촉해지고, 일처리는 어느 때보다 빨라졌다. 여전히 쉽게 오르는 취기에는 긴장을 하며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켜기는 한다. 돌아보니 잔뜩 긴장하며 하루를 살아왔던 나를 보며 몸이 감히 말을 못 걸다가 이제는 나 힘들다고 몸이 신호를 보낸 것 같다.  머리로는 괜찮다고, 잘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몸에서 나타나는 이상 증세들은 나를 지키기 위한 내적 반항이었다. 더 이상은 혹사시키지 말라고, 나는 이제 일을 하지 않겠다는 파업의 순간이었다.


내 몸을 챙기기 시작하니 내가 살아나고 있다. 지난 말 내내 뒹굴거렸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심심하면 멍을 때렸다. 빗소리가 세차 지면 진해지는 커피 향이 맡고 싶어 비싸서 아껴둔 커피를 내렸다. 마침 연락온 친구가 뭐하냐길래 자랑했더니 친구가 남들은 다 원래 그러고 산다며 더 쉬라고 했다. 친구말처럼 더 쉬었다. 게으름을 피운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저녁쯤 되니 '이젠 뭐 좀 해볼까?' 몸을 일으킬 에너지가 생겼다. 부지런한 게으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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