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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Oct 04. 2022

제주, 지미봉

아침저녁으로 싸늘하다 싶은 바람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가을이다. 나의 '가을이 되면' 리스트에는 오름 등반이 있다. 지난봄 여기저기 오름을 다니면서 이제야 내가 나고 자란 제주를 제대로 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리스트 가장 앞에 있던 오름 중 하나가 지미봉이다. 여기저기 살펴보면 성산과 우도를 품은 오름이라며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지미봉은 가고는 싶으나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던 오름이었다.  처음 선생님이 되었을 때 지미봉으로 당시 6학년 아이들과 등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오름 정비가 잘 되지 않았던 터라 경사진 비탈길을 풀을 잡아가 엉엉금 올랐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20대에도 오르기 힘들었던 오름을 나이 마흔이 훌쩍 넘어간다니 가능할지 괜히 겁이 났다. 여러 차례 계단으로 정비가 잘 되어 있다는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갈 용기가 생겼고 결국 20년 만에 다녀오고야 말았다.


지미봉 입구는 주차장도 잘 정비되어 있고 둘길과 오름 정상 등반의 갈림길이 나눠지며 시작을 알린다. 당연히 정상 등반을 목표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나무 계단 놓인 비탈길이 처음부터 맞이하더니 정말 계속 비탈이다. 정상까지 거의 직선으로 뻗어 있다. 역시 내가 기억하는 그 오름이 맞다. 경사긴 길을 나무 계단을 밝고 오르는데 나도 같이 간 친구도 말이 사라지고, 거친 숨소리와 길 양옆으로 난 풀 숲의 풀벌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만 들린다.


이 나기 시작하고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할 때쯤 정상까지 몇 미터가 남았는지 이정표가 나온다. 정상까지 250m! 물 한 모금으로 거친 숨소리를 달래고 뒤를 돌아보니 나무 틈 사이로 하늘과 바다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인다. 이제까지 주변의 나무들에 가려서 바다도 하늘도 안보이더니 오름오를 때는 이런 게 오아시스 같은 청량감을 준다.

정상까지 150m! 100m! 드디어 가파른 경사길 위로 하늘이 보이는 것을 보니 정상에 다다른 모양이다. 가장 지칠 때 마지막 한걸음을 내딛게 하는 것은 역시 정상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이런 작은 힌트가 아닐까. 뺨을 따라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으며 정상에 이르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 펼쳐진다. 정면으로 우도부터 종달 포구, 성산일출봉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높아진 파란 가을 하늘과 어울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비탈길을 낑낑거리며 올라온 수고로움이 한 번에 사라지는 마법 같은 풍경이다. 전망대에 앉아서 한참 바다를 봤다. 나무 그늘 아래 시원해진 공기는 더없이 좋은 풍경을 더 맛나게 해주는 조미료 같다. 분명 제주 동쪽 바다를 눈과 마음에 담고 싶다면 반드시 찾아야 할 오름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힘들더니 내려가는 길은 한결 수월했다. 하지만 경사가 심하고 나무 계단이 끊기고 코코넛 매트가 깔린 곳에서는 미끌림이 있어서 조심해서 내려가야만 한다. 가파른 곳에서는 계단 옆으로 함께 있는 줄을 꽉 잡고 내려왔다.

오름 책들에는 오르는 시간을 25분 정도로 이야기하지만 빨리 걸으면 20분 안에도 가서 왕복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오름이지만 이 오름이 주는 여운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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