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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Oct 05. 2022

엄마의 큰 그림

13살 지구인 이야기(54)

나는 장을 볼 때마다 대파와 양파를 산다. 거의 모든 음식에 두 채소를 넣고 요리를 즐겨한다. 그런데 대파 한 묶음과 양파 한 망을 사고 오면 둘이 한 번에 먹기에는 많은 양이라서 미리 손질을 해서 냉동 보관을 해두고 사용한다. 9시가 넘은 시간에 부엌에 갔더니 한 구석에 사다 둔 대파 한 묶음이 보였다.

"아... 이거 손질해둬야 되는데." 그런데 영 내키지가 않는다. 자기 직전에 파를 썬다는 것은 괜히 벌스럽다.


"엄마 내가 할까?" 말을 들었는지 아이가 자기가 한단다. 대파를 씻고 잘게 채 썰어 두는 일을 여러 번 해봤던 아이 그 시간에 자기가 한다며 나선 것이다.

"지금?" 뭐 어려운 일이냐는 듯이 아이는 벌떡 일어나 5~6 줄기의 대파를 하나하나 씻어가며 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건지 해주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러라 허락은 했지만 늦은 시 부엌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아이의 모습과 앉아서 지켜보는 나의 모습은 아직도 왠지 어색하다.


"아.. 눈물 나." 어느 순간 아이는 눈이 매웠는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엄마, 예전에 며느리들은 이럴 때 울었다며?"

"그랬대. 시어니가 너 왜 우니? 하면 파가 매워서요. 이렇게 핑계를 대면서."

"엄마 그래도 우리 할머니는 엄마한테 잘해줬잖아."

"당연하지. 너희 할머니 같은 분은 없으셔." 사실 그랬다. 언제든 내가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를 선뜻 돌봐주셨고, 그런 부탁을 하고 돌아서는 내게 항상 손수 커피를 내리시곤 건네주시며 힘내라고 하셨던 분이다. 행여나 내가 아이 걱정이라도 할까 봐 사진과 영상을 찍어 보내주시기까지 하셨다. 아이가 이만큼 자라는데 나의 노력이 50이라면 50무책임한 아빠 대신 할머니 사랑이 있었다.


"그런데 왜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한 거야?" 이해가 안 된다는 목소리가 파를 써는 아이의 등 뒤로 넘어온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이제는 아빠의 흉도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보는 사이가 된 아이와 나. 둘만 사는 게 더 이상은 어색하지도, 이제는 옆에 없는 아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너를 만나려고? 그래도 아빠 덕에 너를 만지!"

"아하! 엄마의 큰 그림이구나!" 아이는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또 눈물을 흘려가며 파를 썬다.


오늘따라 어느새 나 보다 넓은 등을 가지게 된 아이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나의 큰 그림은 내게 가장 따뜻한 그림이 되어가고 있다.  삶의 무게를 서서히 덜어주는, 가난했던 내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아이의 뒷모습은 내가 이제껏 본 가장 뭉클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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