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몸과 마음이 허기졌던 퇴근길. 그대로 방에 들어가 잠을 자고 싶은 마음뿐인 그런 날. 이런 날도 엄마인 나는 퇴근하자마자 부엌으로 향한다.
머피의 법칙처럼 마침 밥통을 열어보니 밥이 없고 쌀은 다 떨어졌다. 얼마 전 지인이 준 10kg 햅쌀을 까기로 했다. 입구만 개봉해서 계량컵으로 필요한 만큼 쌀을 꺼내면 될 것을 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10kg 쌀을 통째로 들고 그릇에 넣다가 와르르 쌀을 흘렸다. 하얀 햅쌀들은 다다다 거실 바닥에 통통거리며 흩어졌다. '에이!'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이왕 쏟아진 거 한번 더 들고 그릇에 넣으려는데 기분 탓일까 쌀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엄마 도와줘." 아이를 필요 없이 큰소리로 불렀다.
"잠깐만" 아이가 뭘 하는지 몰라도 한걸음에 오지 않는다.
"빨리 오라고!" 급기야 아이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만다. 다급하게 온 아이에게 괜히 또 날 선 말 한마디를 더하고야 만다.
"엄마도 집에서는 쉬고 싶다고!"
엄마의 느닷없는 화풀이에 아이는 입을 다물고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고 몇 분 뒤에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쏟아진 쌀을 치우며 바로 왜 화를 내버렸는지 후회가 밀려와 나 자신에게 화가 더 나고야 만다.
겨우 밥을 짓고 요리를 하고 저녁상을 다 차릴 무렵 아이가 씻고 나왔다.
"엄마 아까 내가 빨리 못 도와줘서 미안해."
아무 잘못 없는 아이가 사과를 했다.
"넌 잘못이 없어. 엄마가 지치다고 너한테 짜증 낸 거야."
"짜증내서 엄마가 미안해."
"괜찮아. 엄마 이 맛있는 냄새는 뭐야?" 아이는 이렇게 늘 내 사과에 관대하고 별일을 별거 아닌 일로 만든다.
아이와 나는 어릴 적부터 서로에게 미안하다를 남발하며 살고 있다. 서로에게 잘못한 일을 하면 주저 없이 인정하고 사과를 구한다. 10번 중 7번은 오늘처럼 내 잘못이다. 사과는 절대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 꼭 자기 전에는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는다. 아이가 무엇이든 나로 인한 걱정과 불안, 화를 가지고 잠자리에 들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항상 좋은 엄마가 되긴 힘들다. 글에서 늘 좋은 엄마인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글로 적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잔뜩 갖고 있는 엄마다. 사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알게 됐다. 예민한 성격인 편이라 기분 따라 아이에게 날 선 말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이기적이라 글 쓰고 책 읽는 시간을 갖겠다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한다. 이런 가끔 좋고 가끔 나쁜 엄마를 아이는 늘 이해해주고 용서해준다. 아이의 이해와 용서가 어쩐지 더 미안하기만 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