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순호는 취업 준비중 머리도 식힐 겸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덧 서울 한 고급 주택 단지를 거닐게 되었다.
"이번에도 안 되면 어쩌지..." 한숨 섞인 혼잣말이 어둠 속에 흩어졌다. 그때, 근처 분리수거장에서 작게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한 노인이 돋보기를 들고 페트병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노인: "저기... 젊은이, 미안하지만 이것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순호가 고개를 들자 노인이 민망한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
노인: "눈이 침침해서 이 투명한 라벨 떼는 곳이 도통 보이질 않아서 말이야. 바쁘겠지만 잠깐만 부탁하네"
순호는 얼른 일어나 노인의 손에서 페트병을 건네받았다. 능숙하게 라벨을 제거하고 뚜껑을 따로 분류하는 순호의 손길을 노인은 조용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순호: "다 됐습니다, 어르신. 이쪽이 플라스틱이에요."
노인: "아이고, 고맙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혼자 힘으론 안 되는 게 많구먼. 바쁘지 않다면 우리집 마당에서 잠시 쉬었다 가게나. 보아하니 자네도 두꺼운 책이랑 씨름하느라 머리가 꽤나 뜨거울 것 같은데. 내가 도움을 받았으니, 인생에 도움 될 만한 '진짜 공부' 이야기나 좀 들려주고 싶군."
순호는 엉겁결에 노인을 따라 한 고급 주택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큰 주택단지 앞에는 잘 정돈된 정원이 있었다. 둘은 그 정원 끝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고, 노인은 순호가 보던 문제집을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노인: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 애쓰는 모양이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명찰을 다는 게 목표인가?"
순호: "아무래도 그렇죠. 요즘 세상에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기업에 들어간다면 자유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순간, 노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노인: "젊은이, 그게 바로 세상이 가르치는 가장 달콤한 거짓말이라네. 받는 돈에 상관없이 직장인은 모두 자유가 없는 사람들이거든. 즉,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나 다름없다네."
순호: "네? 노예라니요?"
노인: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파는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네. 부자로 태어나건 가난뱅이로 태어나건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건 시간밖에 없어. 시간을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면, 그게 노예의 삶과 다를 게 뭔가?"
순호: "그래도 높은 소득을 버는 직장인이나 의사같은 전문직은 다르지 않나요?"
노인: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아주 비싼 값에 팔고 있을 뿐일세. 오히려 그들은 시간에 더 큰 제약을 받을 수도 있지. 높은 연봉에 맞춰 생활 수준은 올라갔는데, 그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잠시도 일터에서 벗어날 수 없네.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실상은 일에 꽁꽁 묶인 채 평생을 바쳐야 하는 '비싼 비자유인'인 셈이야."
순호는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다. 노인은 말을 이었다.
노인: "진짜 자유인은 따로 있다네. 책이나 음악처럼 잠자는 동안에도 수익을 만드는 저작권을 가진 창작가,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사업가, 또는 투자가 등이 있다네."
순호: "그런 사람들은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죠?"
노인은 순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노인: "그래서 나는 자네가 '투자가'의 눈을 가졌으면 하네."
순호: "투자가요? 저는 주식의 '주'자도 모르는걸요. 돈이 많은 사람들만 하는 것 아닌가요?"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노인: "아니야. 그건 오해지. 투자가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돈의 생리를 아는 사람이지. 자본주의라는 게임의 룰을 이해하는 사람이야. 이건 천재성이 필요 없는 분야거든."
노인은 벤치 바닥에 지팡이로 작은 점을 찍었다.
노인: "돈이 스스로 일하게 만드는 법. 그 원리만 깨우치면 되네. 그게 자유인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티켓이지."
순호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순호: "취업 준비를 하는 지금부터... 정말 그게 가능한가요?"
노인: "물론이지. 오히려 지금이 적기야."
노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노인: "취업을 인생의 종착역이라 생각하지 말게. 직장은 자네의 몸값을 올리는 곳이 아니야. 자네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종자돈'을 빌려오는 곳이지. 자본을 모으는 수단일 뿐이야."
순호는 멍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말은 이어졌다.
노인: "직장에 다니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깨어 있어야 하네. '어떻게 하면 내 돈이 나를 대신해 일하게 할까.' 이 질문을 멈추지 말게. 남들이 월급날 명품 가방을 살 때, 자네는 돈이라는 병사를 고용하게. 씨앗을 심고 가꾸는 거야."
순호는 말없이 정원의 잔디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노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무릎을 가볍게 탁탁 턴 그가 순호를 향해 나지막이 덧붙였다.
노인: "내일 아침 눈을 뜰 때를 상상해 보게. '돈 벌러 가야지'라는 생각. 지겹지 않나? 그건 영혼이 갉아먹히는 소리야. 대신 이런 꿈을 꾸게. '두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 오늘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쓸까?"
노인의 눈빛이 저녁노을을 담아 깊게 빛났다.
노인: "진정한 자유인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자기 삶의 '운전대'를 쥐고 있는 사람이지. 남이 정해준 시간에, 남이 정해준 장소에서, 남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사는 건 아무리 화려해도 자기 인생이 아니라네."
순호는 노인의 말을 가슴속에 새기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 "자유롭게 산다는 건 말이야, 자네가 가진 가장 귀한 자산인 '시간'을 온전히 자네 자신을 위해 쓰는 걸 의미하네. 인생이라는 주어진 짧은 시간동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웃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이 아름다운 노을을 아무 걱정 없이 바라보는 것. 그 평범한 권리를 되찾는 게 자유인이 되려는 진짜 이유야."
노인이 순호의 어깨를 다시 한번 지긋이 눌렀다.
노인: "이건 저 두꺼운 수험서보다 훨씬 중요한 공부일세. 인생은 한 번뿐이야. 누군가의 부속품으로 살기엔 자네라는 존재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시간의 주인이 되게. 그게 자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진짜 목적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