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이라는 말이 좋다. 이유를 부여하지 않아도 생각 없이 그냥 보고 있어도 좋은 그런 뻔한 감정이 필요했다. 가만히 서서 눈이 쌓여가는 공터를 보면서 겨울을 보내는 것도, 카페에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도, 유튜브 뮤직이 추천해 주는 알고리즘도, 제주도에서 본 모닥불에서 타고 있는 소원도, 2018년도부터 써온 일기장을 정리하는 시간도, 그냥 있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밤에 친구들과 <오만과 편견> 영화를 봤다. 2인용 침대에 3명이 붙어서 자는 올해 마지막 밤이 넘어가고 새해가 온 새벽에 나만 잠들지 않고 결말까지 봤다.
서로를 인식하고 편견으로 오해하고 부정하고 깨닫고 결국에는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였다. 참 바보 같으면서 재밌고 궁금하면서 참견하고 싶고 아쉽고 속상하고 기다리게 되는 밤. 부식되어 금이 간 케이스, 초록색 츄리닝 바지, 꼬질꼬질한 캐리어를 보면서 진짜 어떡하지 싶으면서 참견하고 싶고 바꾸고 싶지만 그래도 그냥 좋았다.
태어난 김에 사는 듯한 무해함이 편안했고, 어리숙하면서 눈치는 빨라서 바보 같으면서 아닌 듯한 느낌이 신기했고, 툭툭 튀어나오는 다정한 행동과 말이 좋았다. 앵무새라고 잘 따라 한다고 말하더니 진짜로 따라 하는 그 말들이 웃겼다. 가방 들어줄까요? 물어보고 거절 안 한다고 들으라고 했더니 가방이 무겁다고 하는 것도, 집 가고 싶냐고 했더니 집에 누워있고 싶다고 했다가, 진짜 가고 싶었다면 아까 갔을 거라는 말도 어이없었다.
조각 케이크 사겠다고 하고서는 밥값만큼 비싸다고 그나마 크기가 큰 초코케이크 골랐다는 말도 그 사람다웠다. 마지막 인사로 열심히 살고 있으라는 말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대단한 말은 기대도 안 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이런저런 다른 이야기 하다가 가만히 웃고만 있는 얼굴이 좋았다. 위로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타이밍과 상황이 아쉽다는 말이 한 달 내내 쌓여있던 속상함이 조금 덜어졌다. 처음이었다. 그냥 좋다고 느낀 그 감정은, 물리적 거리도 시간도 타이밍도 상황도, 상관없었다. 그저 몽글몽글한 재밌는 감정이었다. 비눗방울 같아서 금방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