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착각, 올바른 미래』중에서... 02
역사적으로 새로 등장하는 기술은 항상 기회이자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대표적인 예다. 제1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수많은 자본가를 탄생시키며 시장경제를 꽃피웠다.
그러나 증기기관을 이용한 공장생산체제의 개막은 노동 계층에겐 고난의 시작이었다. 방직기로 인해 집에서 가족들이 모여 물건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은 도태됐다. 숙련공과 비숙련공의 차이는 기계의 도입으로 사라졌다. 실직과 임금 삭감의 공포가 삽시간에 퍼졌다.
공포는 곧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이내 계급투쟁을 불러왔다. 투쟁의 대상은 자본가, 투쟁의 방식은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소중한 기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폭동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낡은 것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저지하려는
러다이트와 낭만주의자들을 밟고 지나갔다.”
그러나 러다이트 운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국 정부가 폭동을 일으키고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사형 등의 가혹한 벌로 다스리자 운동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또 영국 의회는 1812년 기계파괴방지법(Frame Breaking Act)을 통해 산업 사보타주를 중범죄로 규정했다. 그때부터 러다이트는 역사의 뒤로 사라져 갔다.
러다이트 운동의 실패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당시 러다이트들은 몰랐겠지만, 그들은 기계화·자동화를 견인하는 혁신 기술을 막기에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수공업자들이 아무리 더 빨리, 더 열심히, 더 정교하게 직물을 짜내도 방직기를 이길 수 없듯이, 러다이트의 저항은 자본주의라는 변화의 물결을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영국 정부는 더 큰 장애물이었다.
더 큰 문제는 러다이트 운동 그 자체에 있었다. 그들은 대안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술을 거부했다. 사회 변화를 부정했다. 그 결과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역사는 끊임없이 낡은 것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저지하려는 러다이트와 낭만주의자들을 밟고 지나갔다.”
러다이트들은 산업혁명이 파괴하는 일자리와 실업자를 보고, 기계를 부숴야 노동자가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산업혁명 덕분에 새롭게 생겨나는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1차 산업혁명의 혜택이 커졌고, 반기술주의적 폭력 행위는 영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뉴욕타임스는 “열흘이면 유럽에서 우편물이 도착하는데
10분만에 오는 뉴스 쪼가리가 왜 필요한가?”라며
전신(電信) 기술의 유용성을 의심했다.
1858년 8월 최초의 대서양 횡단 케이블이 뉴욕과 런던을 연결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전보를 보내는 전신(電信) 기술로 인해 뉴스의 속도가 “진실에 비해 너무 빨라질 수 있다”라고 비판했다. 가짜 뉴스와 허위정보를 걱정하는 오늘날 어디선가 들어봄 직한 소리다. 뉴욕타임스는 “열흘이면 유럽에서 우편물이 도착하는데 10분만에 오는 뉴스 쪼가리가 왜 필요한가?”라며 전신의 유용성을 의심했다. “전신의 유용성이 인류의 행복에 어떻게 이바지할까요? 육상 전신이 어떤 선한 일을 했습니까? 어떤 악을 추방하고 어떤 슬픔을 덜어주었나요?”
흑역사는 더 있다. 1904년 뉴욕타임스는 전화기가 사람들의 청력을 영구적으로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1913년에는 전화 때문에 사람들이 더는 연애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1924년엔 라디오를 “시끄럽고 불필요한 소음”을 발생시키는 골칫거리로 평가했고, 1937년에는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십 년이 지나 1979년 소니 워크맨이 출시되자, 개인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우리를 반사회적으로 만들 것이라 지적했고, 22년 뒤 아이팟이 등장하자 이런 비판은 재탕됐다. 그리고 1994년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물었다. “인터넷은 과대 포장된 것일까?”
착한 기술도, 나쁜 기술도 다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술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항상 틀린 건 아니다. 기술은 의도치 않은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예를 들어 SNS 때문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맞춤형 콘텐츠에 만 노출되어 인지에 편향이 생기는 ‘필터 버블(Filter Bubble)’ 등이 그런 사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과거가 더 좋았다는 러다이트식 논리는 비약이 심하다. 세월 타령은 우리에게 추억과 낭만을 줄 순 있어도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지혜를 주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자신이 아는 것을 선호한다. 구관이 명관이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향수는 기술 발전과 상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기술이 사회와 개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흥미와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된 2010년부터 디지털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여 SNS, 이커머스, OTT, 가상현실 등 수많은 새로운 혁신 서비스를 탄생시켰다.
이와 함께 기술을 악용하는 사례가 발생했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오는 등 다양한 우려를 낳았다. 챗GPT 신드롬을 보며 AI에 빼앗길 자신의 일자리를 걱정하면서도 인공지능 관련주를 사 모으는 사람들이 좋은 예다. 그래서 테크놀로지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의견을 물으면 팩트와 픽션이 혼재한다. 평균적인 사람은 때로는 기술애호가(Technophile·테크노파일)였다가, 때로는 기술혐오자(Technophobe·테크노포브)로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술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일까? 정답은 기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며, 그 주인은 언제나 인간이다.